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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May 18. 2020

한반도에만 존재하는 '냉면'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냉면(冷麪)은 차가운 국수다. 그뿐이다. 국수를 차게 해서 먹는 것, 냉면이다. 단순하지만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냉면’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다. 냉면은 단순히 차가운 국수가 아니다. 냉면은 냉면이다. 


국수를 먹지 않는 나라는 드물다. 국수를 뜨겁게 혹은 차갑게 만들어서 먹는다. 유럽, 미국, 남미와 더불어 동양에서도 국수는 흔하다. 국수를 먹지 않는 나라는 드물다. 


‘냉면’은 한반도에만 있다. 한국의 많은 식당은 ‘평양’냉면을 내놓는다. 냉면은 재미있는 고유명사다. 어디에나 있는 차가운 국수지만 한반도에서는 냉면이라는 고유의 음식을 내놓는다. 서울의 많은 식당도 굳이 ‘평양’ 냉면을 내놓는다. 우리 시대의 것일까? 그렇지도 않다. 뿌리 깊은 음식이다. 조선 시대 왕과 사대부의 ‘냉면’을 소개한다. 


냉면이라고 정확히 표현한 첫 문헌은 계곡 장유(1587~1638년)의 글이다. “계곡선생집” 제27권_오언 율시 “자장냉면(紫漿冷麪)”이다. 자장냉면은, 자줏빛 육수에 말아낸 것이다.        


높은 집 툭 터지니 좋다마다요/새롭고 기이한 맛 또 한 번 놀라네/
자줏빛 국물에 노을 같은 영롱함이라/옥가루가 눈꽃처럼 고루 내렸어라/
젓가락 넣으니 이에 향기가 돌고/몸이 서늘해서 옷을 껴입는다/
나그네 시름 이로써 사라지니/돌아가고 싶은 꿈 다시는 괴롭히지 않으리
(已喜高齋敞/還驚異味新/紫漿霞色映/玉粉雪花勻/
入箸香生齒/添衣冷徹身/客愁從此破/歸夢不須頻)    

  

현재로서는, 조선 중기 문신 계곡 장유의 “계곡집”에 나오는 냉면이 가장 오래되었다. 냉면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계곡의 ‘자장냉면’이 가장 오래된 냉면이다. 


계곡의 냉면이 어떤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계곡은 임진왜란 전에 태어나 병자호란까지 겪었다. 광해군 시절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실각, 고향 경기도 안산 언저리에서 지났다. 인조반정에 앞장서서 다시 벼슬살이를 시작했지만. 고위직을 지냈음에도 삶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전쟁과 반정(反正)의 시대다. 계곡은 향리에서 긴 시절을 보낸다.  


이 시는, 아마, 한양이 아니라 향리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큰 집에 초대받아 갔다. 그 자리에서 냉면을 접대받는다. 자줏빛 국물에 옥가루가 눈꽃처럼 내린 냉면이다. 자줏빛 국물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당시에는 비교적 구하기 쉬운 오미자가 아닐까, 라고 추정할 뿐이다. 근거는 없다. 얼마나 차가운지 옷을 다시 껴입는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 ‘돌아가고 싶은 꿈’을 이야기한다. 돌아가는 것은 한양으로 돌아가 벼슬살이를 하는 것이다. 시름 깊은 향리의 삶이지만, 냉면을 먹으면서 한양으로 돌아가고 싶은 꿈을 접는다고 말한다. 


현직에서 물러났지만, 계곡은 명문가 출신의 벼슬아치다. 냉면은 반가(班家)의 음식이다. 냉면이 왜 반가의 음식이었을까? 엉뚱하게도 국수 때문이 아니라 국물과 얼음 때문이다. 혼란의 시대다. 궁핍하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속된 말로, ‘입에 풀칠하기 바쁜 시절’이다. 국수를 준비하고, 국물을 따로 장만하는 것은 사치다. 


문제는 얼음이다. 냉장, 냉동이 없던 시절이다. 얼음은, 일반 가정에서는 생각도 하지 못할 사치다. 설혹 구한다 해도 양은 아주 적다. 겨우 제사음식 장만에나 쓸 정도다. 


지방도 마찬가지. 대도시에는 어디나 공자 사당이 있다. 향교(鄕校)다. 학문과 통치이념, 사대부 교류의 중심지다. 향교에서는, 공자와 그 지역 출신 사대부를 모신다. 제사에는 얼음이 필요하다. 지방 관청의 주요 업무는 각종 제사와 행정 업무, 한양 등에서 지방으로 오는 벼슬아치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다. 제사 모시고, 손님맞이 하는 일,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다.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 얼음이 필요하다. 지방에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氷庫)가 남아 있는 이유다. 지방도 마찬가지. 일정량을 민간에 나누어 주었지만 역시 부족하다. 세민(細民)들이 얼음을 먹는 일은 힘들었다. 한여름, 얼음 없는 냉면은 없다. 냉면이 사대부, 벼슬아치들의 음식인 이유다. 


냉면을 두고 ‘겨울 음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다. 겨울에 먹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다. 겨울에만 먹을 수 있었다. 역시 얼음 때문이다. 세민들은 여름철 얼음을 구할 수 없다. 메밀은 11월이 수확 철이다. 동치미도 겨울철 음식이다. 메밀도 있고, 동치미도 있다. 게다가 겨울이면 얼음이 흔하다. 동치미에도 살얼음이 낀다. 비교적 양이 넉넉한 메밀로 국수를 만들고 동치미 국물을 더한다. 동치미의 살얼음은 덤이다. 서민들은 겨울철 깊은 밤에 냉면, 막국수를 말아 먹었다. 그뿐이다. 겨울이 좋아서가 아니라, 겨울이라야 메밀국수, 냉면, 막국수는 가능했다. 


조선 후기 문신 신야 이인행(1758~1833년)은 1802년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를 떠난다. ‘서천록(西遷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기록했다. 기록 중, 냉면이 등장한다. “6월 초 이틀. 냉면을 즐기는 것이 이 지방(위원)의 풍습이다. 교맥(메밀)으로 (국수를) 만든 후, 김칫(沈菹·침저)국물로 (맛을) 조절한다. 눈, 얼음이 흩날리는 깊은 겨울에 쭉 마시면 시원하다”고 했다. 위원군은 평안도 북쪽 지역이다. 압록강과 가까운 전략요충지다. 추운 곳이다. 겨울이다. 메밀로 국수를 만든 후, 김칫국물로 맛을 조절한다. 김치는 동치미 혹은 고춧가루가 거의 들어가지 않은 백김치였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글을 기록한 시점이 더운 계절인 음력 6월 초이틀이라는 점이다. 


신야도 벼슬아치다. 비록 유배길에 올랐지만 위중한 죄인도 아니다. 왜 음력 6월 더운 날 겨울철 냉면을 이야기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어쨌든 여름철에 겨울냉면을 이야기한다. 역시 사대부니, 여름철에 냉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인행과 교류가 있었던 다산 정약용(1762~1836년). 그의 벼슬살이는 짧다. 길게 잡아도 회시(會試)에 급제한 1783년부터 고향 경기도 마현으로 돌아간 1800년까지 18년간이다. 짧게는 전시(殿試)에 급제한 1789년부터 불과 10여 년의 기간이다. 짧은 벼슬 생활 동안, 다산은 황해도와 몇 차례 인연이 있었다. 한양 북부 지역의 암행어사, 황해도 과거시험 감독관, 황해도 지역 행정관으로 일했다. 다산의 냉면은 황해도 지역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다산의 행적을 참고하면 ‘다산의 냉면’은 18세기 후반의 것이다. ‘계곡 장유의 냉면’과는 약 200년의 차이가 있다. 냉면은 발전하다. 내용도 더 구체적이다. 


황해도의 고시 감독관으로 갔을 때 다산은 서흥의 도호부사 임성운을 만나고 시를 남긴다. 시의 제목은, ‘서흥도호부사 임성운에게 장난삼아 지어준 시’(다산시문집)다.     


서관의 시월이라 눈이 한자씩 쌓이니/
겹겹이 두른 휘장 푹신한 담요로 손님을 붙잡네/
갓 모양 따뜻한 냄비에 저민 노루고기는 붉고/
가지런한 냉면 가락에 배추김치는 푸르구나
(西關十月雪盈尺/複帳軟氍留欸客/笠樣溫銚鹿臠紅/
拉條冷麪菘菹碧)     


시기는 18세기 후반이고 배경은 황해도다. ‘평양’냉면이 아니다. ‘황해도’ 냉면이다. 계곡 장유도 마찬가지. ‘자장냉면’을 먹은 곳은 경기도 안산 일대일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평양’이라고 못 박지는 않았다. 


다산은 황해도 냉면을 먹었을 당시 해주의 과거 감독관이었다. 고위직 관리다. 상대도 마찬가지. 임성훈은 서흥도호부사였다. 부사(도호부사, 都護府使)는 종3품의 지방관리다. 고위직이다. 임성훈은 대대로 고위직을 지냈던 명문가 출신이다. 모두 반가의 사람들이다. 냉면은 반가의 음식이었다. 배추김치가 노랗지 않고 푸르다고 했다. 얼갈이배추다. 속이 노란 결구배추는 없던 시절이다. 


다산과 비슷한 시기 ‘평양냉면’도 있었다.

영재 유득공(1748~1807년)은 다산 정약용보다 조금 앞선 시대의 실학자다. 다산과 같은 시기 벼슬살이를 했다. 역시 정조대왕이 아끼던 사람이다. 명문가 출신이긴 하지만, 서자다. 정조 시절 규장각 ‘4검서’로 불린 실학자다. 4검서는 유득공, 박제가, 이규경, 서이수다. 

영재는 우리나라 이곳저곳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그중 평양의 풍경을 그린 기록이 있다. “서경잡절(西京雜絶)”이다. 서경은 평양이다. 음력 4월의 평양 풍경을 그리면서 “냉면과 돼지 수육값이 오르기 시작한다(冷麪蒸豚價始騰, 냉면증돈가시등)”라고 했다. 음력 4월이면 5, 6월 정도다. 18세기 전후하여, 평양에서는 초여름 냉면값이 오른다고 했다. 냉면을 즐겨 먹었고, 이때 이미 길거리 냉면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냉면은 이미 거리에서 파는 음식이었다. 


‘왕의 냉면’도 있다. ‘순조의 냉면’은 18. 19세기 무렵 이미 한양 도성에는 ‘냉면 전문점’이 널리 퍼졌음을 보여준다. 


순조(1790~1834년)는 1800년 6월, 정조대왕이 승하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불과 11세. 엉겁결에 왕위에 오른 어린아이다. 증조할머니 정순왕후 김 씨가 수렴청정. 어린 왕은 별로 할 일이 없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이유원이 남긴 “임하필기”에 순조의 즉위 초년 냉면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유원은 1814년 생이다. 아마 어린 시절 ‘순조 냉면’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달 밝은 밤에 순조가 군직(軍職)과 달구경을 하다가 문득 냉면이 먹고 싶다고 한다. 궁궐 밖으로 냉면을 사러 간다. 순조가 보니, 시립한 이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 수육이다. 순조는 냉면이 도착하자, “그이는 따로 먹을 것이 있으니 냉면을 주지마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이유원은 이 이야기로, 군왕이 속이 좁다고 평한다. 그렇지는 않다. 열한 살 어린아이를 두고 속이 좁다고 이야기할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우선 냉면과 더불어 돼지고기 수육을 먹었다. 지금도 수육은 돼지고기다. 지금도 냉면전문점에서는 수육을 내놓는다. 오래된 풍습이다. 


18세기 후반, 이미 한양에는 밤늦게까지 문을 여는 냉면 전문점이 있었고, 오늘날의 테이크아웃 서비스도 있었다. 배달도 가능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계곡 장유, 신야 이인행, 다산 정약용, 영재 유득공, 순조의 냉면을 보면 오늘의 냉면이 보인다. 냉면과 더불어, 수육, 배추김치 혹은 김칫(동치미)국물, 백김치를 더불어 먹었다. 오늘날 우리도 먹는 음식이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 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 올린 한식 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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