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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Mar 23. 2020

곰탕과 설렁탕은 전혀 다른 음식이다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대갱과 형갱, 두 종류의 국물이 있다. 형갱은 나물을 곁들인 국이고 대갱은 기본양념인 매실과 소금, 나물을 더하지 않았다.


곰탕과 설렁탕을 혼동한다. 두 음식 모두 쇠고기 혹은 소 부속물로 만든다. 국물 형태로 내놓는다. 비슷하다. 혼동할 수 있다. 곰탕과 설렁탕은 전혀 다른 음식이다. 


곰탕은 대갱이다. 대갱(大羹)은 고기즙 혹은 고기 곤 국물이다. ‘육고기를 끓여 우려낸 국물’이다. 육고기는 ‘정육(精肉)’이다. 껍질, 지방, 내장, 뼈를 모두 걷어낸 살코기다. 


곰탕의 오래전 이름은 ‘대갱읍(大羹湆)’이다. ‘읍(湆)’은 즙(汁)이다. 갱이나 읍, 즙 모두 국물이다. 대갱, 대갱읍은 큰 국물을 이른다. ‘대(大)’는 ‘크다’와 더불어 ‘바탕’ ‘으뜸’을 뜻한다. 곰탕은 큰 국물, 모든 음식의 바탕, 으뜸이다. 


한식은 한상차림이다. 밥과 국, 탕반은 한상차림의 바탕이다. 제사를 모실 때, 신위(神位)의 가장 앞자리에 밥과 국을 내놓는다. 탕반(湯飯)은 밥상의 바탕이다. 제사상에는 또 하나의 국물이 있다. 곰탕이다. 탕이 가장 앞자리에 있는데, 국이 한 그릇 더 있다. 탕반이 아니라 ‘탕탕반’이다. 어색하다. 중국과 한반도의 상차림을 섞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밥과 국을 밥상의 으뜸으로 삼았다. 탕반을 가장 앞자리에 놓는 것은 한반도의 제사 방식이다. 제사상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밥상처럼, 밥과 국을 가장 앞자리에 놓는다. 우리 밥상에 중국의 유교적 밥상을 더한다. 우리 밥상인 ‘탕반’에 유교적 ‘대갱’을 더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희한한 밥상이다. 우리 방식, 중국 방식을 뒤섞고, 우리식으로 변형, 발전시킨 것이다. 밥상에 국을 두 그릇 놓는 이유다. 


우리는 탕반에 대갱, 곰탕을 더하면서 꾸준히 곰탕을 귀하게 여겼다. 

고려 말기 문신 목은 이색(1328~1396년)은 유교 국가 조선의 학문, 정신적 시조다. 제자 포은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었고, 삼봉 정도전은 유교 국가 조선의 기틀을 닦았다. 고려를 지켰던 이들이나 조선을 세운 이들은 상당수 목은의 문하였다. 목은은 조선 유교 사대부의 뿌리였다. 목은도 ‘대갱(大羹)’을 간결하게 설명한다. “목은시고_제12권_시(詩)”의 일부다.      


“식례의 기원은 대갱에서 시작된다[食禮之起由大羹, 식례지기유대갱]”.      


식례는 음식, 음식 진설, 음식과 관련된 예의범절 등을 통칭한다. 음식, 음식 진설의 시작은 바로 대갱이다. 이보다 더 명확하게 ‘곰탕=음식의 으뜸’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대갱이 바로 오늘날 곰탕이다. 


곰탕, 대갱은, 유교에서 시작되었다. 고대의 제사에는 희생(犧牲)을 가장 귀하게 여겼다. 희생은 제사에 사용한 짐승이다. 날고기 혹은 그 자리에서 도축한 고기였다. 희생의 피로 맹세하고, 동맹임을 서약했다. 너와 내가 피로 맺어진 끈끈한 혈연임을 증명했다. 


육즙, 대갱, 곰탕은 희생 중에서도 최고의 정수다. 피도 희생에서 나온 육즙의 하나다. 고기를 고면 또 다른 육즙이 나온다. 고기 곤 국물, 곰탕 혹은 대갱이다. 희생 못지않게 귀한 것은 피 혹은 고기 곤 국물, 곰탕이다. 제사에 반드시 곰탕을 사용하는 이유다. 


사계 김장생(1548~1631년)은 조선 최고의 예학자다. 관혼상례를 비롯한 모든 일상의 예법을 기록했다. “사계전서_제30권_가례집람(家禮輯覽)_제례(祭禮)”의 내용이다. 

     

“의례” 사혼례에 이르기를, “육고기를 끓여 우려낸 국이다.[大羹湆]”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에 이르기를, “고기를 삶아서 우려낸 국물이다. 금문(今文, 지금의 문장)에는 ‘읍(湆)’이 모두 즙(汁)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보주에 이르기를, “맛을 내지 않은 고깃국은 대갱(大羹)이고, 나물을 곁들인 고깃국은 형갱(鉶羹)이다.” 하였다. (중략) “예기”의 주에 이르기를, “대갱이란 것은 태고(太古) 시대의 국으로, 소금이나 매실로 가미하지 않은 육즙이다. (중략) 역시 현주(玄酒)를 숭상하는 뜻과 같은 것이다.” 하였다. (중략) “대갱의 즙은 그 맛이 남아 있어서 조화시키는 재료를 가지고 맛을 내지 않는다. 이 때문에 큰 것이 되는 것이다. 형갱 따위와 같은 것은 작은 것이다.” 하였다.    

 

두 종류의 국물이 있다. 대갱과 형갱(鉶羹)이다. 형갱은, 나물을 곁들인 국이다. 오래전에는 매실과 소금을 양념으로 삼았다. 대갱은, 나물은 물론이거니와, 기본양념인 매실과 소금마저도 더하지 않은 것이다.  형갱은 양념과 나물을 더했으니 한결 맛이 낫다. 하지만 아무리 형갱이 맛있더라도 대갱을 앞서지 못한다. ‘형갱 따위와 같은 것은 작은 것’이라고 낮춰 여긴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 밥상, 제사상의 ‘두 그릇 국’은 대갱과 형갱이다. 밥 옆에 놓는 국은 흔히 나물국이다. 콩나물, 무 등으로 끓인 국이다. 소금, 간장 등으로 양념을 한다. 형갱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나물로 만든 국을 먹는다. ‘탕반’의 ‘탕’은 형갱이다.


‘현주(玄酒)’도 의미가 깊다. 현주는 맑은 물이다. 정성스럽게 올리는 제사상의 물이 현주다. 우리 어머니들이 정성으로 길어와서 치성을 드렸던 정화수(井華水)도 현주다. 현주와 대갱은 모두 맛이 질박하다. 도드라지지 않고 은근하다. 귀하게 여긴 이유다.  


북한은 김일성 시대부터 ‘이밥에 쇠고깃국’을 이루고자 했다. 쇠고깃국은 곰탕이다. ‘이밥+곰탕’은 한반도의 오랜 꿈이다. 북은 끝내 이루지 못했고, 남은 이루었다. 


쇠고기 정육으로 끓인 곰탕, 곰국, 탕국은 조선 시대에도 최고의 음식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5년(1602년) 4월13일의 기사다.     

  

“(전략) 예조 참의 정경세(鄭經世)는 상(喪)을 당했을 때 남의 비난을 면하지 못하였으며 또 (중략) 공공연하게 기생을 끼고 놀았으므로 보고 듣는 자가 해괴하게 여겼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정경세는 애석하다. 이 말이 혹 사실을 잘못 안 것은 아닌가? 다시 조사해 보는 것이 마땅하다.”     


‘남의 비난을 면하지 못할’ 짓은, 예조 참의 정경세(1563∼1633년)가 임진왜란 중에 상을 당했고, 상중에 고기(육즙)을 먹었다는 것이다. 상중에 고기를 먹는 것은 대죄다. 사대부로서는 해서 안 될 행동이다. 상주(喪主)는 최소한 3년 소식(素食)을 한다. 소식은, 반찬이 없는 맨밥이다. 고기는커녕 일상의 음식도 줄이고 줄인다. 험한 옷을 입고, 험한 밥을 먹는다. 상주가 고기를 먹었다? 탄핵감이다. 


약 10년 후인 광해군 3년(1611년) 8월, 사간원에서 더 엄히 탄핵한다. 탄핵 이유는 거의 동일하다. “전라감사 정경세는 어미가 칼날에 죽었는데 상복을 입은 몸으로 관가를 드나들며 고기를 먹었습니다. 인간의 도리를 제대로 지키지 않은 정경세를…. (후략)”


정경세는 20년 이상을 ‘상중에 고기 먹은 일’로 고초를 치른다. 걸핏하면 탄핵을 당하고, 더러는 벼슬살이를 멈춘다. 시골로 가거나 외직으로 떠돈다. 


재미있는 것은, 정경세가 먹었던 것이 고기가 아니라 육즙이라는 주장이다. 고기와 달리 육즙은 환자의 보신용으로 인정받았다. 광해군 3년 11월, 상주의 진사 송광국 등이 연대 상소한다.     

 

“(전략) 사간원은 정경세가 상중에 고기를 먹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란 중 정경세는 상중이므로 지극히 조심했습니다. (중략) 불행히도 공주 인근을 지나던 중 천연두에 걸렸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공주목사 나급과 지사 윤돈이 묽은 죽에 육즙(肉汁)을 조금 섞어 정경세를 살렸습니다. (후략)”     


육즙은 보신용이니 용서해달라는 뜻이다. 곰탕은 여전히 귀한 음식이었다. 신하뿐만 아니라, 임금도 상중에는 곰탕, 육즙을 먹을 수 없었다. 세종 4년(1422년), 상왕 태종대왕이 돌아가셨다. 세종대왕에게 태종은 무거운 존재다. 아버지이면서 스승이고, 3남인 자신에게 권력을 승계해준 이다. 상주는 소선(素膳)이다. 고기는 물론이고, 대갱, 육즙, 곰탕을 먹는 것도 불가능하다. 세종은 곡기를 끊다시피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4년 11월의 기록이다.      


(전략) 임금이 허손병(虛損病)을 앓은 지 여러 달이 되매, (중략) 육조 당상(六曹堂上)과 대간(臺諫)과 더불어 청하기를, “(중략) 옛사람이 말하기를, ‘죽은 이를 위하여 산 사람을 상해(傷害)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또 ‘육즙(肉汁)으로써 구미(口味)를 돕는다’는 말도 있습니다.”(후략)     


허손병은 오늘날의 당뇨다. 세종은 운동은 거의 하지 않는 일 중독에 고기 마니아였다. 스트레스도 심했다. 당뇨가 올 수밖에 없었다. 신하들이 고기반찬을 권하지만, 세종은 움직이지 않는다. 육조의 고위직 관리와 대간까지 나서서 국왕에게 음식을 권한다. “육즙으로 구미를 돕는다”고 말한다. 육조는 정부의 전 부서다. 대간은 임금의 잘못을 탄핵하는 기관이다. 이들이 모두 ‘육즙’을 권한다. 육즙, 대갱, 곰탕은 이 정도의 음식이다. 


시를 평할 때도 대갱이 인용되었다.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읍취헌 박은(1479∼1504년) 은 갑자사화로 젊은 나이(25세)에 죽었다. 친구 이행(1478∼1534)이 읍취헌이 남긴 시를 모아 문집을 냈다. ‘읍취헌유고’다. 서문에서 이행은 ‘(박은의 시는) 자연스럽게 흘러서 쉬지 않는 것이 조미하지 않은 대갱과 같다’고 했다. 자연스럽고 질박하다. 시든 음식이든 최고의 상찬이다. 

설렁탕과 곰탕은 다르다. 서울의 설렁탕 노포는 1904년에 문을 열었다. 가장 오래된 곰탕전문점은 1949년, 한국전쟁 전 문을 열었다. 45년의 차이가 있다. 왜 곰탕 전문점은 늦게 문을 열었을까?


설렁탕은 저잣거리의 음식이다. 뼈와 내장, 머리 고기 등을 넣고 끓인다. 일찍 장터로 나왔다. 곰탕은 정육으로 끓인다. 반가의 음식이다. 반상의 구별은 무너졌지만, 여전히 반가의 음식으로 음식장사를 하는 ‘양반’은 드물다.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곰탕 전문점 홍보문구에는 “북촌 마나님의 음식 솜씨로 끓여낸 곰탕”이라는 표현이 있다. ‘북촌(北村)’은 ‘남산(南山)의 대칭어다. 남산에는 벼슬이 낮은 이들이나 무반,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 한양 도성 끄트머리다. 북촌은 정궁 경복궁 곁이다. 오늘날 삼청동 가회동 일대다. 고위직 벼슬아치와 권력자들이 살았다. ’북촌 마나님‘이 끓여내는 곰탕은 반가의 음식이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 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 올린 한식 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원연합회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익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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