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차근 하다보면
본격적으로 팀을 맡아 훈련을 진행한지 3주가 지났다. 어느새 후반기 개막전 경기는 이번 주(3월 2일)로 다가왔다. 훈련을 진행하면서 감독님과 똑같이 느꼈던 점은 바로 '조금만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이었다. 훈련을 시작한 지 3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팀 차원에서 혹은 선수 개인 차원에서 긍정적인 신호들을 확인하고 있다. 그래서 더 그런 생각이 드는 듯 하다. '조금만 더 일찍 시작했다면 더더욱 좋았을텐데..'
축구와 관련된 훈련에 앞서서 우리가 첫 팀 미팅 때 가장 강조했던 규율과 기강(Discipline) 마음 같아선 박종
환식 빠따축구 하고 싶다 을 나름대로 세워가고 있다. 훈련에 정시(오후 8시)에 참여하고, 훈련에 참여하지 못 할 경우엔 늦어도 당일 아침까진 알려줘야 한다고 선수들에게 이야기했는데 지금까지는 꽤나 성공적이다. 오늘은 내가 7시 50분 즈음부터 훈련장 입구에 서있었는데 평소엔 절대로 뛰지 않는 선수놈들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팀을 맡기 전에는 훈련 시간이 한참 지나고도 음악을 들으며 본인들이 부릴 수 있는 온갖 SWAG을 부리면서 들어오던 선수들이었다. 전 감독 랄프가 내 옆에 오더니 씨익 웃으며 한 마디 했다. "애들이 이제 너 무서워한다. 8시에 이렇게 선수들이 많이 있는건, 이건 기적이야"
기존에 사용하던 Whatsapp 채팅방도 조만간 버릴 예정이다. 현재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들어와있는데 그 중에 절반은 사실상 버리는 카드다. "훈련에 참여하는 선수들만이 경기에 뛸 자격을 얻는다" 는 너무나도 자명한 명제를 그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한다. 그래서 훈련에 온 사람들만 초대될 수 있는 새로운 채팅방을 생성할 것이고 팀에 관한 모든 내용은 오직 그 방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도록 강제할 것이다.
선수들이 제 시간에 대부분 오기 시작하니 훈련도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가볍게 운동장을 돌고 스트레칭을 진행한 이후에 훈련이 시작된다. 훈련은 총 4개의 세션으로 진행된다.
1. 코디네이션
2. 볼 컨트롤
3. 패스, 슈팅, 전술 훈련
4. 미니게임
지난 번에도 언급했듯이 감독님(사장님)과 나 모두 코치 라이센스가 따로 있지 않다. 둘 다 그냥 축구를 좋아하는 일반인이기 때문에 선수들을 어떻게 훈련시킬 지에 대해서도 외부 자료들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 일단, 우리 팀의 수준이 절대로 프로급이 아니기 때문에 아마추어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훈련 영상들을 우선적으로 참고하고 있다. Youtube 덕분에 국내, 해외 영상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국내의 경우에는 고알레(https://www.youtube.com/channel/UCI0FxD0282RxDk193_RJcJg)를 많이 참고하고 있다. 해외의 경우에는 Keepitonthedeck(https://www.facebook.com/Keepitonthedeck/)에서 소개하는 영상들을 활용하고 있다.
코디네이션은 주로 신체의 밸런스와 축구에 필요한 근육들을 강화하는 훈련인데 고알레에서 소개한 영상을 적용해서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볼 컨트롤 훈련은 2명이 한 조를 이뤄서 서로 공을 던져주고 그 공을 안정적으로패스, 혹은 트래핑하는 세션을 진행한다. 훈련 중 코디네이션, 볼 컨트롤 그리고 미니게임은 매 훈련마다 진행하고 있다. 덕분에 훈련이 조금씩 루틴화되어가고 있고 선수들도 무리없이 잘 따라오고 있다.
세 번째에 진행하는 훈련은 감독님과 내가 그 날마다 진행하고 싶은 훈련을 상의해서 진행한다. 어떤 날은 패스, 어떤 날은 슈팅 훈련을 진행한다. 오늘은 이번 주에 경기가 있기 때문에 전술적인 부분에 대한 훈련을 진행했다. 지난 시즌, 그리고 이번 시즌의 전반기에도 코너킥 실점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코너킥 때 공격과 수비는 어떻게 할 지 선수들에게 그 역할에 대해 설명해주는 시간을 가졌다. 평소에 선수들이 코너킥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알려준 내용을 완벽하게 따라오진 못했지만, 코너킥에서 각자 맡은 역할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만 해도 큰 성과였다. 그리고 실전에서 잘 될진 모르겠지만 서로 다른 2개의 코너킥 전술을 선수들에게 알려줘서 코너킥 키커가 표시하는 손모양에 따라 선수들이 다르게 움직이는 훈련까지도 진행했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팀의 기본적인 전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팀을 맡자마자 선수들에게 전술을 이야기하는 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3주동안 훈련을 진행하면서 조금씩 선수들에 맞는 위치와 포지션을 잡아갔다. 어느 정도 포지션별로 뛸 수 있는 선수들이 정해진 뒤에 전술 훈련을 진행할 수 있었다.
우리 팀의 기본 색깔은 전형적인 "잉글랜드 축구"다. 한껏 웅크린 뒤에 역습을 때리는 게 우리의 기본적인 뼈대인데 우리 팀에 있는 선수 자원들을 고려하여 약간의 변형을 줬다. 현재 팀에 롱킥이 좋은 수비수가 있고, 달리기가 빠른 자원들이 꽤 있다. 그래서 고안된 전술이 위에 있는 이미지이다. 킥이 좋은 리베로(1번)와 2, 5, 6번 선수가 공을 주고 받다가 특정 타이밍에 공을 좌우 사이드로 넓게 뿌리면 3번, 4번 선수가 공간을 찾아들어가는 방식이다. 오늘은 공격 6명과 수비 5명을 세워두고 가운데에서 공을 패스하다가 좌우로 넓게 뿌리는 훈련을 진행했다. 이 역시 선수들이 한 번에 잘 따라오진 않았지만, 우리 팀의 전술은 이러하고, 그 안에서 나의 역할은 이것이다 라는 생각을 조금이나마 선수들에게 심을 수 있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체육시간 중에 제일 재밌는 건 결국 N대N 미니게임이다. 이 선수들도 같은 마음인건지 결국은 미니게임을 가장 원한다. 그런데 오늘 굉장히 흥미로웠던 점은 기존에 진행하던 미니게임과는 다르게 나름대로 본인들이 훈련한 내용들을 써먹어보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게임 중간에 코너킥이 나오면 본인들만의 수신호를 써가면서 오늘 배운 전술들을 사용해보려고 했다. 그리고 공격 전술때 익혔던 위치, 움직임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불과 몇 주 전에는 전혀 맞지 않는 합이었는데, 이제는 심심치 않게 2대 1패스도 볼 수 있다. 조금씩 '팀으로서 호흡하는'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는 점이 오늘 훈련에서 느꼈던 아아아아주 고무적인 점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체계적인 훈련이 벌써 입소문을 탄건가 거 참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팀에 새로운 선수들이 잘 수혈되고 있다. 기존에 팀에 있던 선수들이 자신들의 친구들을 한 명씩 데려오고 있는데 생각보다 수준이 높아서 큰 힘이 되고 있다.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골키퍼 포지션에도 9부리그에선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실력의 선수가 제 발로 팀을 찾아왔고, 왼쪽 풀백 그리고 중앙 미드필더에도 수준급의 선수들이 팀에 참여하고 있다. 다만, 이번 주 경기까지 선수등록이 완료될 지가 변수인데 지금으로썬 쉽지 않아 보인다. 정확한 프로세스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아프리카 출신의 선수들은 선수 등록이 아주 오래 걸린다. 당장 경기에 내보낼 수는 없지만 어찌 되었든 팀의 수준을 올려주고 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있는 후반기 첫 경기는 기필코 잡아야하는 경기이다. 휴식기 이후 첫 경기인만큼, 새로 팀을 맡은 우리들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도 무조건 승점을 쌓아야한다.
그리고 우리보다 아래에 있는 몇 안되는 팀이며, 16경기동안 무려 106개의 실점을 기록한 팀이다. 이런 팀을 상대로 지거나 비긴다면 이 팀의 미래는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길 것 같다. 설레발은 필패지만, 이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길 수 있다.
감독님도 같은 생각이겠지만, 이 팀을 맡아서 운영하는 게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정말 훨씬 재밌다. 훈련을 진행하는데 선수들이 내가 준비한 것들을 따라하는 모습만 봐도 재밌다. 그냥 매 순간이 짜릿하다. 와 이게 되네? 와 이걸 하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훈련 시간 1시간 반이 훌쩍 지나가있다. Football Manager 게임을 할 때에도 선수가 골을 넣고 경기를 이기면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근데 이건 게임이 아니라 실제다. 우리 서비스에 있는 5부, 6부 리그의 경기 영상에서 득점이 터질 때마다 벤치에 앉아있던 선수, 코치들이 소리지르면서 경기장으로 뛰어나오는 걸 보면서 얘네는 뭐 이런걸로 좋아하나 싶었다. 근데 이제 알겠다. 좋을거다. 그것도 존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