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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형외과 신한솔 Feb 16. 2022

정형외과 사람들

교수님, 우리 교수님

    정형외과 사람들이 거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다. 오늘도 환자분 한테 반깁스를 대 드리면서 이런저런 설명을 해드리고 있는데, 환자분께서


"아휴, 여자 선생님이니까 친절해서 좋네요. 정형외과 자주 다니는데 남자 선생님들은 맨날 설명도 잘 안 해주고 원래 그래요, 이렇게만 말하고 말아요."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꼬박꼬박 듣는 말인지라, 항상 같은 대답을 하게 된다. 


"그냥 제가 말이 많아서 그래요 :)"




    병원 내에서도 가장 남자다운 과라는 인식이 있는 과가 정형외과이다. 전공의 시절의 일이다. 하루는 우리 과 교수님께서 내과 교수님이 전공의 중에서 괜찮은 선생님이 있으면 자기 딸과 소개 좀 시켜 달라고 하셨는데 여자인 네가 보기에 괜찮은 남자가 누구냐고 하셨다. 


"아니 그냥 본인과에서 찾으시지 왜 굳이 교수님께 부탁을..." 

"나도 그 이야기를 했는데, 그래도 남자라면 정형외과라고 하시면서 꼭 좀 알아봐 달라고 하네."


    이렇듯 같은 내부인들 조차 정형외과를 남자다움의 상징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정말 누구보다 나이스 하고, 배려 넘치시는 분들이시다. 5월에 큰아이를 출산하고 출산휴가 후 8월 달에 복직을 했다. 집에 언제 갈지 모르는 노비 생활에서 아이를 키우는 게 불가능하여 일단 10월까지만 친정에 아이를 맡기기로 서울로 왔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모든 엄마가 같은 마음이겠지만 100일도 안된 아이를 두고 홀로 몇 시간 거리의 다른 도시로 떠나는 건, 아이도, 엄마도 너무 힘든 일이다. 아이 100일 날이 복직 후 첫 출근일 이 있다. 대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일을 하나란 마음, 나이 먹고 쉬실 나이에 애 보는 엄마 생각, 100일에 같이 있어주지 못하는 여러 마음이 섞여 무겁게 출근을 하였다. 


    복직 후 내가 맡게 된 파트의 교수님은 저 연차 때는 뵌 적이 없었고, (우리 병원은 교수님도 전공의도 너무 많아서 4년 내내 교수님들을 한 두 번 만 뵙고 수련과정을 마치게 된다.) 치프가 되어 처음 뵌 교수님인데, 별명이 "큐렛"이신 교수님이 계셨다. 



    위의 사진처럼 생긴 의료기구인데, 뼈나 조직의 양성 종양이나 염증을 파낼 때 쓰인다. 좌측 끝의 수저 같은 부위로 염증을 파내는 것이다. 큐렛처럼 전공의, 전임의 간호사들의 멘탈을 파내셔서 붙어진 별명이다. 안 그래도 출산휴가를 갔다 와서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는데, 무섭다고 소문이 난 교수님 파트여서 초 긴장 상태로 수술방에 들어갔다. 


    이미 수술장에 들어오기 전 아침 회진에 다른 시니어 교수님께 (정년이 가까워 오시는 교수님, 혹은 전체 교수님 중에서 소위 말해서 짬밥이... 평균보다 많으신 교수님들을 시니어 교수님이라고 부른다.) 애나 키우지 왜 나왔냐는 말을 듣고 멘탈이 한번 탈탈 털린 상태였다. (이제와 말씀드리지만 마지막 4년차가 3달 남았는데 어떻게 때려치우나요. 이미 들인 시간이 있는데, 때려치울 거면 진작에 때려치웠어야죠...)


    수술장에서 조용히 집중하며 수술을 하고 있고, 중요한 부분이 다 끝난 후에 교수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셨다. 


어린 핏덩이 두고 나와서 힘들지?

    출근한 첫날인지라 누구랑 수다 떨 시간도 없이 일, 일, 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병원은 정말 최소한의 의사 인력으로 돌아가는 곳이기 때문에 내가 출산 휴가를 가는 바람에 사람은 당연히 부족했고, 복직하기 전까지 팀에 사람이 없어 교수님도 고생을 하셨으리라. 지금도 꽤 많은 병원이 그렇겠지만 교수님과 전공의 사이는 하늘과 땅 같은 위계질서가 있었고, (그래서 자조적으로 전공의 시절에 우리는 노비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계속되는 로테이션에 한 달 후면 떠날 전공의, 그것도 출산 휴가 때문에 오히려 본인을 고생시킨 전공의 걱정을 하고 계셨다.


    나름 강한(?) 여자라 자부하며 산 20여 년을 살아왔고,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건 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애 낳고 정말 호르몬의 이상이 왔는지 수술장에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와 중에도 수술장에 눈물이 떨어지면 안 되니 눈물을 참아야겠다고 악착같이 버티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나는 천생 서전(수술하는 외과의)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이후 교수님은 수술도 외래도 없는 연구하시는 날마다 점심을 사주셨다. 동기들은 이렇게 까지 매주 밥을 사주시는 건 없던 일이라며 매우 놀라워했다. 애 엄마는 잘 먹어야 한다며, 4년 차 끝이 얼마 안 남았으니 힘내라고 하시며 매주 사주시던 점심을 잊을 수 없다. 특히 우리 과 사람들은 고기와 술을 매우 사랑하고 학상 식사 자리라고 하면 항상 고기로 시작해서 술로 끝을 낸다. 낮이건 밥이건. 한 번은 회식 때 고깃집에서 더 이상 고기가 없어서 고기를 드릴 수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적도 있다. 이런 우리 과에서 메뉴도 스파게티, 덮밥, 화덕 피자 등등 대학로 맛집만 골라서 데려가 주셨다. 애 엄마 맛있는 거 먹여 주신다고 연구원들이나 간호사들에게 대학로 맛집을 물어보고 계셨다는 건 나중에 전해 들었다. 


    다른 과도 들어가는 간호사들 사이에서도 무섭기로 손꼽히는 교수님이셨는데, 실상은 누구보다도 인자하시고, 남을 걱정하시는 분이었다. 전공의들 그렇게 혼내신 것도 돌이켜 보면, 환자를 위해서, 그리고 다 우리가 좋은 의사가 되라고 혼내셨던 거다. 내가 교수가 되고 나니 전공의들을 혼내는 것도 정성과 사랑이 있어야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불러놓고 혼내고 가르치느니 내가 하는 게 더 훨씬 편하다.)


    선생님, 덕분에 둘째까지 낳고 잘 살고 있어요. 항상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 2편으로 이어집니다. - 

https://brunch.co.kr/@hansolto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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