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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형외과 신한솔 Feb 17. 2022

정형외과 사람들 (2)

EBS "명의"

     소위 말하는 좋은 의과 대학을 나와서 큰 병원에서 인턴을 하고 레지던트를 하는 것의 최대 장점은 '명의'인 교수님들께서 수술하는 걸 볼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거다. (작은 병원에 명의가 없단 게 아니라 의사 10명 중의 한 명 꼴로 명의라고 하면, 모집단이 클수록 명의도 많아지는 효과가 난다.) 진짜 그런 수술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감동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수술은 학문을 넘어서 art라고 생각한다. 수술은 1+1이 항상 2가 되지 않는다. 사실 이점 때문에 처음에 전공의 생활을 시작할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자랑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진짜 공부하나는 정말 잘했는데, (머리가 좋다기보다는 단기 암기와 출제자의 의도 파악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형외과는 공부를 잘한다고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는 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말 초반에 미세 수술 등을 배울 때 내 손이 내 맘 같이 움직이지 않는 게 너무 싫었다. 


    이러한 수술의 지식적 측면과 기술적 측면이 어우러져 예술의 경지에 다다르셨던 우리 의국의 교수님들은 여러 분이 EBS "명의"에 나가셨다. 한 번은 내가 모 교수님 파트를 돌고 있을 때, EBS 촬영 날짜가 잡혔다. 내가 아프면, 내 가족이 아프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바짓가랑이를 붙자고 매달릴 교수님이지만 수술장에 들어가 싶지는 않은 교수님이었는데, 이유가 수술장에서 정말 무서우셨기 때문이다. 옆 수술방에서도 교수님이 화내시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디폴트 값이라 아무도 누가 저렇게 소리 지르냐고 놀라지도 않았다.) 정말 수술에 있어서 항상 최고를 추구하셨고, 수술 중에 본인의 모든 걸 갈아 넣으시기에 옆에서 멍 때리고 실수하고 있으면 화가 나시는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반 욕설과 큰 소리가 난무하는 수술장이기 때문에 전공의들 사이에서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곳 중 하나였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교수님을 받쳐주지 못했던 우리의 잘못이긴 하다.)


    그래도 나는 이 교수님이 정말 좋았는데, 화를 내시는 정도는 약간(이라고 하자. 이제 나도 졸국(의국을 졸업한다는 뜻, 전공의 수련을 마치는 걸 의미한다.)한 지가 한참 되어 아름다운 기억만 남아있다.) 과하셨지만 절대 이유 없이 화를 내시지 않았고, 본인이 과하게 화를 내심을 알고 계시는 선생님이셨기에, 평소의 젠틀하심과 학식을 생각하면 좋아해 마지않을 분이었다. 하루는 수술장에 임신한 간호사님이 들어왔는데, 본인은 수술장에서 계속 하이텐션이고 예민해서 소리를 지르는 경우가 있는데 임신한 간호사가 들어오면 정서적으로 아이에게 안 좋을 것 같다며 다른 간호사 분이 들어오면 좋겠다고 하시는 걸 보고, 아 이 교수님이 내시는 화는 이해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상대방의 사정 따위 상관없이 고성과 욕설이 난무하는 수술장도 많다.) 인턴을 돌면서 여러 과의 다양한 교수님 수술을 돌다 보면 본인이 화를 낸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선생님도 많다. 나 정도면 수술장에서 양반이지 하시며 다른 교수님을 디스 하는 교수님들 앞에서 인턴의 역할은 맞장구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렇게 무서운 교수님일수록 촬영 스케줄이 잡히면 모두들 좋아한다. 대부분의 경우는 촬영 카메라가 돌고 계실 때는 절대 소리치시지 않고 예쁘고 고운 말만 오가기 때문에 명의 스케줄이 잡히자 모두 한동안은 조용한 수술장이 될 거라며 좋아하였다. EBS 팀이 수술장에 들어오고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교수님의 수술 속도를 assist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시한폭탄의 타이머가 켜진 느낌이었지만 모두들 설마, 지금 수술자에 촬영팀이 몇 명이 있는데 하는 순간, "야! 정식 똑바로 안차려!"라는 사자후를 시작으로 평소와 다름없는 수술장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고백컨데 나는 그 순간 교수님께 반했다. 마조히스트여서가 아니라 카메라가 돌던 말던, 나는 내 갈길을 간다는 교수님의 한결같음에 반했다. 내가 수련받던 대학병원의 특성상 정말 온갖 VIP들이 오고 간다. 모 구청장, 모 국회의원. TV 촬영도 빈번하다. VIP 앞에서, TV 앞에서 달라지는 의사들도 많다. 이건 의사를 비난할 수 없다고 본다. 이건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니 음식점들도 TV에서는 친절하고 양도 많았는데 직접 가니 별로 였어요 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우리 교수님은 정말 EBS가 촬영을 하건 VIP가 오건 한결같으셨다. 수술이 끝나고 스크럽 간호사님과 와 이거 편집하면 쓸 장면이 하나도 없을 거 같은데 방송은 대체 어떻게 나간대요?라고 걱정하였으나 EBS는 역시나 완벽한 편집으로 인자한 교수님을 연출해 주셨다. 


    한 번은 수술장에 들어왔던 외국인 전임의가 수술 준비를 하는데 가벼운 실수를 하였다. 수술이 시작한 것도 아니고 수술 준비 중이었고 환자에게는 아무 지장이 없었지만, 역시나 고성과 사자후가 오갔다. (사실 이 포인트도 정말 이 교수님이 멋있는 부분인데, 대부분의 교수님은 수술 준비 중에는 안 들어오신다.) 수술이 끝나고 나서 교수님께서 부산에 가족을 두고 서울에서 혼자 수련을 하고 있는 동기 오빠를 부르시더니, 큰 액수의 돈과 함께 주말에 오프를 줄 터이니 너는 부산에 가서 가족을 보고, 외국인 전임의는 바다 구경 좀 시켜주라고 하셨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하는데 사람이란 간사하여 사회적 지회가 생길수록 고개를 뻣뻣이 든다. 자기보다 한참 아랫사람에서 내가 잘못하였다는 마음을 전달하기 쉽지 않은데, 우리 교수님은 참 어른이란 생각이 들었다. 점점 사회에 참 어른이 없어져 가고 있는 느낌이다. 요즘 정치를 보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냐 와 무관하게 그들이 존경할 만한 어른들인가에 대해 고민이 든다. 존경할 만 어른들께 배움을 받아놓고서 나는 존경할 만한 어른으로 크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든다.

    

1편이 있습니다. 내용이 이어지지는 않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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