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 이야기
나는 항상 나 자신이 쏘쿨한 여자라고 생각해왔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에 내가 지금까지 사 왔었던, 가지고 있거나 있었던 모든 가방 중에서 가장 비싼 가방은 채 10만 원이 되지 않으며, 핸드폰은 항상 트렌드와 무관하게 고장이 나면 고장이 난 시점에서 가장 싼 핸드폰으로 바꾸었다. 평생에 내 돈 주고 립스틱을 사본 적이 없으며, 20대 초반에 마스카라와 비비크림을 사봤던 것이 마지막으로 산 화장품이며, 멋 모르고 남들을 따라 하던 대학교 1학년 시절을 제외하고 나면 살면서 화장을 해본 것은 졸업 사진 찍을 때와 결혼식 하였을 때 두 번뿐이다.
흔하다면 흔할 유럽 여행도 아직 가보지 못했는데 딱히 아쉽지고 꼭 가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없었고, 없다.
인스타, 페이스북, 트위터를 계정 조차 만들어 본 적이 없고, 계획도 없다.
딱히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주관대로 소신대로 사는 쿨한 여자라고 생각해왔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결혼한 지 4달 정도 지나서 남편과 여름휴가로 푸껫에 갔다. 푸껫에 있는 내내 속이 좋지 않아서 혹시 임신한가 하는 불안감이 있었었다. 푸껫에서 비행기를 타기 전 마지막 유람선 관광에서 남편에게 내가 말하였다.
"이번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고나면 한 몇 년간 비행기를 못 탈 거 같아"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시행한 임신테스트기에서는 선명한 두줄이 보였고, 나는 내가 뱉은 저 말대로 한 3년간 비행기를 타지 못하였다.
나는 내가 임신해도 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는데 그건 정말 나의 오판이었다.
태동이 있기 전까지는 아이가 문제가 있을까 봐 두려워 혼자 깜깜한 초음파 실에서 아이 움직이는 지를 확인하였고, 기형아 피검사에서 아이에게 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고 말았다. (아이는 건강히 잘 크고 있습니다.) 세상 귀한 내 아이를 조리원에 둘 수 없다는 일념으로 아이를 낳은 다음날 퇴원하여 집으로 가 그날부터 아이와 함께 잤다. (이건 별로 추천드리고 싶지는 않네요...)
아이를 낳고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내가 처음 한 말은 '아프가 점수 몇 점이에요?'였다. (주: 신생아가 태어나면 아프가 점수를 매겨서 아이의 안녕을 평가한다. 10점 만점으로 아이 울음, 피부색들을 확인한다. 당시 소아과 선생님과 산부인과 선생님이 산모가 의료인인 경우는 자주 봤지만 아이 낳자마자 아이 아프가 점수부터 묻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며 웃으셨다. 돌이켜 생각하면 너만큼 유별난 산모는 처음이다의 웃음이었을 수도...)
병원에서 많은 의료진들은 소아 진료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부분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아이는 이쁜데 엄마가 너무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나도 이렇게 생각한 시절이 있다. 근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 자신이 직접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가 없거나 전적으로 친정엄마, 시엄마 혹은 이모님에게 아이를 맡기고 자기는 부양육자로 한발 물러 서 있는 경우다. (아이가 3돌 되기 전까지는 아이랑 자본적이 없어서 언제까지 아이들이 자다가 깨는지 모르겠다고 하신 분도 계셨다.)
전공의 시절에 아이를 낳고 일하랴 아이 보라 허덕이고 있는 나에게 교수님 한분이 말씀하셨다. 출산휴가만 쓰고 복귀한 지 한 달 정도 된 시점이었다.
"둘째는 언제 낳니?"
"네????!!! 낳으면 누가 키워요. 못 낳죠"
"아이는 낳아놓으면 알아서 다 커"
아이가 낳아 놓으면 알아서 다 큰다니...
엄마가 힘든 게 아니다. 물론 정말 유별난 엄마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그냥 그 사람이 유별난 것일 뿐이다. 엄마로서의 당연한 것들 조차, 유별남과 힘듬이 되어 버린 세상이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