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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스푼 Oct 01. 2022

엔딩크레딧의 추억

소환된 눈물



아침부터 디플을 보고 있던 큰 아이가 얘기했다.


"와, 엄마, 디즈니는 엔딩크레딧이 진짜 길어."


나는 영화를 볼 때 엔딩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본다. 엔딩크레딧에는 영화 관계자들, 촬영 장소와 음악에 대한 소소한 정보가 있고, 무엇보다 음악을 통한 감독의 안배를 마지막까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한국영화보다는 외국영화들의 엔딩크레딧이 길다. 아이에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엔딩크레딧에 대한 세 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첫 번째는 반지의 제왕이다. 1,2,3 중의 어느 편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그날 나는 자정 무렵에 시작되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관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에도, 나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혼자 엔딩크레딧을 보고 있었다. 그날의 엔딩은 정말 길었다. 최소 15분 이상이었다. 그 무렵의 C 극장은 서비스가 모토였기 때문에, 마지막 관객이 자리를 뜰 때까지 한 명의 스텝이 문에서 대기를 했다. 내가 미동도 없이 15분가량 앉아있는 동안, 스텝의 포즈는 계속 변했다. 매우 힘들었을 거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마지막 상영이었기에.


하지만 나는 엔딩크레딧을 끝까지 보지 못하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지 않은 거라서 꿋꿋하게 버텼다. 그리고 결국 듣고야 말았다. "아이, O발..." 너무도 선명히 들리는 육두문자였다.... 마침내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는 너무 미안했기에 수고하셨다는 말 한마디를 하려 했으나, 직원의 욕설 한 마디가 미안한 감정을 없앴다. 또한 직원의 욕설에 대해서도 컴플레인을 제기하지 않았다. 역지사지로 직원이 너무 고생한 것도 알기에.


독립영화관을 제외하곤, 일반 극장에서 엔딩크레딧을 끝까지 보는 관객은 나 역시 거의 본 적 없다. 뭐든지 빨리빨리의 민족인 만큼 엔딩크레딧이 올라가자마자 바로 일어서는 것이 당연하고, 나처럼 끝까지 남아있는 관객은 민폐처럼 느껴지는 경험이 비일비재했다. 그래도 그 당시 C 극장의 영업방침상 내가 컴플레인을 제기했다면, 그 직원은 분명 징계를 받을 것이 틀림없었으므로 그럴 수 없었다. 물론 새벽이라는 시간의 특수성과 마지막 퇴근의 즐거움을 지연시킨 것 또한 작용했다.




두 번째 기억은 올드보이의 엔딩크레딧이다.


올드보이를 통해 구현된 박찬욱 감독의 모든 미장센을 사랑했다. 올드보이의 마지막 엔딩크레딧이 끝날 때, 스산하게 울려 퍼지던 겨울산의 바람소리까지 사랑한다. 단언컨대 그 메마르고 황량해서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바람소리를 들은 사람은,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 거의 없음을 확신한다. 언젠가 엔딩크레딧의 마지막 바람소리에 대한 감독의 메시지를 들었을 때는 정말 울컥했다. 내가 감독의 의도대로, 끝까지 제대로 보았구나 싶어서 말이다. 너무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엔딩크레딧이 끝나는 순간까지 영화를 보는 것을 강력 추천한다.




마지막 기억은 인터스텔라다.


이 영화는 정말 힘들게 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힘들게 보러 나갔다. 그 무렵 나는 아직 어린아이들을 한참 육아 중이었다. 정말 귀하고 귀한 시간을 내어 거의 마지막 상영일 무렵에 간신히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 내내 차곡히 쌓아 올린 감정이 엔딩크레딧의 음악과 더불어 고조되는 순간, 갑자기 영화 필름이 끊어졌다. 정말 그 순간의 악몽은 지금도 선명하다. 믿을 수 없었다.


예전부터 C 극장을 다녔던 이유는 아무리 긴 영화라도 엔딩크레딧을 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 무렵 다른 극장들은 대부분 엔딩크레딧을 잘랐다.) 오랜만에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같은 C극장이었는데 영화의 엔딩크레딧을 끊다니. 더 이상 문에 대기하던 서비스 스텝도 없었고 어디에도 내 상황을 알릴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상영관에서 나와 데스크로 향했다. 그리고 매니저를 붙들고 나는 어린애처럼 펑펑 울었다.


모처럼, 정말 간신히 짬을 내어 나간 나의 세 시간이, 엔딩크레딧의 중단으로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영화 내내 벅차게 차오르던 감정을, 마지막까지 다시 한번 곱씹고 차분하게 정리할 수 있었던 기회가 영원히 안드로메다로 사라져 버린 거다. 그때의 그 시간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무이한 경험이다. 나는 두 번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고, 새로 영화를 본다 한 들 다시는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다. 같은 영화라도 처음 보았을 때의 감상과 두 번째 이상부터의 감상이 계속 달라지기 때문이다.


엔딩크레딧을 보지 못하느니, 애초에 영화를 보지 않는 것이 낫다. 나에게 이 상황은, 용변을 보다가 휴지로 마무리하지 못한 상황이나 진배없으므로. 엔딩크레딧이 왜 이리 기냐는 아이의 말 한마디에 소환된 엔딩크레딧의 추억 끝에 그날의 눈물이 찔끔 배어 나온다.  




덧) 예전에 쓴 글이지만 엔딩 크레딧의 이야기가 있어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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