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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리한 May 23. 2021

back to work!

다시...re...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어 갈 언저리 때마다 이벤트가 발생했다. 9살에서 10살이 될 때는 2학년에서 3학년으로 바뀌고 무서운 선생님을 연달아 만난 정도였지만 19살에는 수능을 봤고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아 20살에는 재수를 하며 잠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갔다. 버스를 타려고 버스카드를 찍으면 학생의 신분인 "삐삑" 이 아닌 성인의 표시 "삑" 소리가 났지만 대학생도 아니며 성인도 아녔다. 그냥 무직의 어중간한 잉여인간, 수험생이라 불리지만 학교의 울타리가 없는 존재였다. 그런 재수생활을 보내고 대학에 들어갔다. 즐거운 청춘을 보내다 군대에 끌려갔고 휴학도 하면서 7년을 지내고 나니 28살이 됐다. 이대로는 취업할 수 없다며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고 29살에 돌아왔다. 30살이 되기 5개월도 안 남아 취업준비를 하면서 30살이 된다는 기분이 매우 싫었고 우울했다. 30살이라면 어른스러우면서 본인이 생각한 것을 이룬 꽤 멋진 나이라 생각했는데 난 목표조차 없는 취업 준비생이며 내로라하는 스펙도 없다 보니 내가 생각하고 기대하던 30살과 너무나 차이 났기 때문이다. 다행히 30살에 교육회사에 입사하여 진로를 고민하는 청소년을 위해 8년간 열심히 일했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인지 일에 대한 열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평소 하고 싶었던 바리스타로써의 삶을 살았고 그게 39살이었다. 누구나 남자라면 한 번쯤 걸린다는 사업병 때문에 나만의 카페를 위한 여러 가지 즐거운 상상을 했건만 코로나라는 무시무시한 역병에 자영업자들이 몸살을 앓았다. 다니던 카페에서 해고를 당하고 재취업을 하기 전 육아에 전념하다 보니 40살이 됐다. 3월부턴 아이들이 어린이집과 학교를 가면서 개인 시간이 늘어났고 이력서에 공을 들여 카페에 제출했다. 2달간 70 군대 정도는 지원했지만 면접은 딱 한 번뿐 이였다. 면접을 보러 간 자리엔 3명이 더 있었는데 무경력자 2명에 전직 개인 카페 사장님 이셨다. 질문이나 여러 정황으로 봐도 나와 전 카페 사장님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날 문자에는 아주 정확하게 탈락되어 아쉽다고 쓰여있었다. 어째서였을까! 분명 자만하지도, 소극적이지도 않았다. 대답도 잘했고 미래를 위한 준비와 카페의 비전을 물어보며 격한 공감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방향을 웃으면서 얘기했었다. 떨어진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 보니 오해만 수두룩했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건가? 외모가 별로였나? 옷차림이? 말투가? 온갖 외적인 부분만 신경 쓰며 이후 지원하는 곳마다 전혀 묵묵부답이었다.


'코로나 시국에 자영업자들이 무너지는데 미래에 내가 카페 창업을 한다한들 이런 역병이 또 한 번 휘몰아쳤을 때 대비할 수 있을까'부터 '카페일을 하면서 정말 내 카페를 낼 수 있을까'에 수많은 고민을 했다. 이미도 넘쳐나는 커피시장에 독특한 나만의 강점이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이렇다 할 주 무기가 하나도 준비돼있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커피에 대한 기술을 늘리다 보면 분명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고민이 있지만 타인이 보기엔 그저 실업급여받고 편하게 지내는 백수 가장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내 마음 역시도 실업급여에 연맹하다가 카페 알바를 하면서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첫째님은 특수학교에서 잘 적응하며 꽤 선방하고 있다. 둘째 놈 역시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면서 할아버지의 지원하에 발레까지 배워온다. 혼자 발레학원 차를 타고 어린이집에서 발레학원으로, 또 집으로 오는 걸 보니 이 아이 역시도 잘 성장하고 있어 기특해 보였다. 아내는 부모연대에 들어가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기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다. 나 역시 집안일과 아이들 양육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분명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건 중요하지만 치열하게 삶을 살기 위한 어떠한 준비를 하고 있지 않다 보니 이런 마음으로 재취업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지금 내 모습이 옳은지에 대한 대답을 더욱더 할 수 없어서 냉정하게 나 자신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봤다. 그러던 중 하루는 예전 교육회사로 돌아가서 열심히 일하는 꿈을 꿨다. 꿈을 깨고 일어나니 몸도 무겁고 기분이 너무 이상하고 별로여서 그냥 옛 동료에게 잘 지내는지 연락을 했다. 여느 직장인처럼 죽어가는 목소리로 일을 하지만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었다. 반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구직활동을 하는데 마음속에 무언가 꿈틀거렸다. 이전 교육회사의 일들이 사람 관계에서 힘들었지 일적인 부분에서는 즐거워 보였다는 아내의 말도 생각이 났다. 혹시 미련이 남은 건가 해서 옛 동료에게 소심하게 문자를 날렸다. 혹시나 내가 돌아간다면 일 할 수 있냐고!

대답은 새로운 사업 입찰이 돼야 직원을 뽑을 수 있다며 확답은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좋으니 알려달라고 말했고 계속 카페일을 찾아봤다. 만약 교육회사로 돌아간다면 옛 직장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고 싶었고 안된다면 열심히 카페일을 하겠노라 다짐했지만 이미도 마음은 교육회사로 기울어져있었다.

며칠 후 다른 동료에게 전화가 왔고 대표님이 한번 만나고 싶다며 연락해보라고 했다.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올진 몰랐고 대표님께 전화를 하며 만날 장소와 일정을 잡았다.


대표님은 뭔가를 제안하기보단 인간적으로 그간 내가 잘 지냈는지, 퇴사하고 나서 한 번도 연락을 못해서 삶이 궁금해 만나길 원하셨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회사의 규모와 매출은 성장했으며 매출이 꽤 큰 사업들이 많아졌다며 예전처럼 직원들 월급 밀릴 일은 없다고 웃으면서 말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창립된 지 막 3~4년 차에 급여가 한번 밀렸었고 그때마다 강의가 끝나면 대표님은 직원들 월급을 사수하기 위해 전화기를 붙잡고 여기저기 돈을 빌리려 전화했던 모습이 생각 나서였다.

그때보다 지금은 정말 눈부신 성장을 했으니 돈 앞에 장사 없고 권력 앞에 장사 없듯 대표님 역시도 조금은 변할 줄 알았다. 하지만 더 큰 비전을 보여주는 대표님을 보며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안 변할까 하며 놀랐다. 예나 지금이나, 아니 오히려 지금이 더 교육에 대한 열정이 불타고 있었다.

"좁은 길로 가시네요! 대표님은 항상 좁은 길로 가시네요"

라고 대표님의 앞날의 계획을 보며 말했더니 기가 막힌 대답이 날아왔다.

"재밌잖아!"

교육사업을 하며 교육과 재능을 기부하는 것이 여전히도 재밌다고 하시는 걸 보니 변할 이유가 없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불현듯 생각났다. 열정이 꾸준하게 지속되는 건 어쩌면 재미, 즉 교육을 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고 그것을 즐기고 있기에 그런 것 같았다. 천재도 이길 수 없다는 즐기는 자, 그러니 사람이 이리도 돈과 권력 앞에서 변하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2년 전 내 정신적 한계가 오면서 열정이 사라져 더 이상의 일을 할 수 없다며 그만둘 때가 8년 차였다. 대표님은 교육에 있어 거의 20년은 넘었는 데에도 불구하고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정신적 고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열정이 여전하다는 건 정말로 교육을 즐기고 교육을 통해 변하는 청소년들을 보며 희열을 느꼈기에 변치 않고 그 자리에서 교육을 선도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다시 한번 이런 분 밑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그로부터 두 달 정도 시간이 흐르고 옛 동료로부터 연락이 왔다. 사업부에 사람이 필요하다며 담당자 역시 나를 받아줄 생각이 있는데 포지션이나 여러 가지 여건들에 대해 괜찮은지 물었다. 못 참겠다며 뛰쳐나간 회사에 재입사를 하는 건데 어떠한 조건을 붙일 수 없었다. 너무 부당하지 않다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었는데 생각보다 더 괜찮았고 "YES"를 외쳤다. 그 후 임직원들에게 보고가 들어가서 다시 출근할 수 있게 됐다.



아내한테 다시 전 직장으로 돌아간다고 했더니 이미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갈지는 몰랐다고 했다. 나한테 가끔 농담으로 백수라고 놀린 것에 상처 받고 부담돼서 돌아가는 거냐고 되물어보길래 그것보단 2년간의 내 삶을 돌아본 결과를 토대로 결정했다고 오히려 지금까지 나만 편한 결정을 한 것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말했다. 정말 돌아본 2년의 삶을 생각해보니 인생을 상대로 아주 즐거운 게임을 했다.

가족들은 모두 각자의 역할에 있어 최선을 다했는데 나만 그러지 않았다. 게임에서도 팀이 각 역할에 최선을 다하여 합을 맞춰야 승리하는데 중간에 내가 하고 싶다며 이상한 캐릭터를 골라 게임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유저를 트롤이라고 불렀는데 내가 그 트롤 짓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트롤이 된 가장 역할은 이제 깔끔하게 벗어던지고 다시 집중해서 일하려고 한다. 아쉽게도 정직원은 아니지만 예전 30대의 그 열정 가득한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그때처럼 열심히 최선을 다해 공교육에 소외받는 학생들이 없는 그런 멋진 일을 한다는 설렘이 가득하다. 몇 달 일하다 보면 분명 설렘은 사라질 테지만 교육을 즐기는 대표님의 저 꺼지지 않는 열정처럼 나도 내가 즐기기 위한 방법을 찾아 열정을 꺼뜨리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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