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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리한 May 17. 2021

아버지의 마음 표현!

잔소리가 점점 귀 기울어져가는 시간!

아버지가 용돈을 두둑하게 보내주셨다. 용돈을 보내드려야 하는데 되려 받았다.  아이에게 맛있는  사주라며 보내준 용돈으로 둘째 놈이 그렇게나 조르던 발레학원을 등록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전화를 드리고 반찬도 떨어졌으니 한번 찾아뵌다고 했다. 주말인 토요일에 내려간다고 몇일인지 확인해보니 어버이날 이였다. 완벽하게 어버이날을 잊고 있었다.  역시 누군가의 어버이가 되어 어색한 마음으로 카네이션을 받았다. 하지만  부모님에 대한 어버이날을 고 지낸 건 이번이 처음인  같다.


미세먼지가 가득한 토요일 아침에 부모님 집으로 출발했는데 평소보다 배는 걸렸다. 토요일에 어버이날이 걸렸으니 너도나도 다 이동했고 명절보다는 아녀도 평소 주말보다 통행량이 많으니 길이 막힐 수밖에 없고 막히는 길을 운전하다 보니 한주 미룰걸 이란 후회를 했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도착했고 두 분 모두 식사도 안 하시고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식사를 거르며 자식 오는 걸 기다리는 부모님을 보며 잠시 오지 말걸 이란 후회를 한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점심을 먹으며 아내가 부모님에게 내 자랑을 많이 해줬다. 난 그다지 부모님에게 이런저런 일들을 시시콜콜 말하지 않는다. 우리 집안 자체가 대화가 없다 보니 무소식이 희소식인 마냥 잘 지내고 있겠지 라며 지나가지만 아내는 그렇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내 이야기와 손주들 이야기를, 살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참 재밌게 말했고 관심 없는 듯 두 분은 귀담아듣고 기뻐하거나 안타까워했다. 내 글이 라디오에 당첨됐다고, 작은 월간지에 실려 경품도 탔고 꾸준히 글을 쓴다면서 아들 자랑을 그렇게나 해줬다. 내친김에 아버지에게 브런치를 소개하며 여기에 시를 올리면 좋을 것 같다고 했건만 아버지는 단호하게 ‘NO’를 외쳤다. 어머니 역시 글 쓰는 일이 직업이 되면 안 된다며 역시나 기뻐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내 나이쯤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만 다니던 직장은 잘 다니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하고 싶던 일이라 지금으로 말하면 N 잡을 했지만 주된 벌이가 아닌 본인의 자아실현을 위한 선택이었다.

내가 학창 시절에 배운 시는 참 아름다웠다. 단어를 응축하고 응축하여 짧은 단어에 수많은 생각과 배경을 담고 있었고 그 단어를 선택하기 위해 시인은 세월을 보내며 고뇌하며 쓰고 지우 고를 반복하면서 작성했으니!

하지만 가족으로써 본 시와 시인의 모습은 판이하게 달랐다. 적어도 내 경험, 어머니의 경험으로는 그랬다. 시인은 욕쟁이에 시대적 흐름을 거부하며 고리타분하여 언제나 술을 곁에 두고 사는 고주망태였다. 시를 쓰기 위해 고통과 외로움에 몸부림치다 받은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가족에게 푸는 존재였기에 아무짝에 쓸모없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쓰기 위해 수많은 욕설과 상처가 쌓여서 나온다는 걸 알고 나선 누군가의 시를 읽지 않았다. 편견이지만 다른 시인들 역시도 가족들에게 수많은, 아니면 온갖 욕설과 외로움 속에 몸부림치고 있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 들었다.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는 가장 가까이에서 다 맞춰주다 참을 수 없어서 몇 번의 다툼 끝에 포기하셨고 글 쓰는 사람들을 싫어하게 되셨다. 절묘하게 내가 요즘 백수로 글을 쓰면서 이것저것 경품을 받다 보니 아버지 따라 글 쓰는 직업을 갖게 될까 걱정됐셨던 듯하다.


아버지는 내가 글을 잘 쓴다는 아내의 이야기에 찬물을 확 끼얹으셨다. 글을 잘 쓰려면 독서량이 많아야 하며 손에서 책을 떼면 안 되는데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매우 싫어하는, 독서량도 부족한 아이라 저놈은 글을 잘 쓸 수 없다는 결론과 함께 그런 삶의 푸념들이나 지나온 것들에 대한 글들을 쓰는 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며 핀잔만 늘어놨다.

아내는 살짝 민망해했다. 아버지 닮아 글 쓰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하시고, 시인인 아버지께서 브런치에 시를 올리면서 타인에게 그 아름다운 시를 공유한다면 좋을 법 한데 아버지는 그런 며느리의 마음을 이해하긴 커녕 아들에 대한 자랑조차 받아주지 못하셨으니 말이다.

하지만 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마 8년 전이라면, 결혼하기 전이라면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거나 귀담아듣지 않거나 분명 말대답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난 아버지의 잔소리가 무시되지 않았고 오히려 귀담아듣기 시작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집 근처 개울물을 퍼 나르기 위해 주문했던 호스가 시내에 도착했다며 아버지는 나와 함께 시내로 나갔다. 가는 길에 아버지는 내게 물어봤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며. 그리고 지금의 내 상황이 못마땅했는지 한마디 꺼내셨다. 그만둔 첫 직장의 근무년수는 8년이었지만, 33년을 한 직장에서 다니고 정년 퇴임한 아버지의 눈에는 끈기가 없어 보였는지 그렇게 뛰쳐나온 것에 대해 꾸지람을 시작했다.

퇴사를 고민하고 수없이 되뇔 순 있지만 뛰쳐나온 건 끈기가 없는 것이고 사람이 그렇게 이리저리 직장 옮기는 건 타인에 대한 신용을 얻지 못한다고 했다. 본인의 진급이 남들보다 빨랐던 이유도 33년간을 한 직장에 다니며 타인에 대한 신뢰와 신용을 바탕으로 일해왔고 윗사람에 대한 모든 걸 맞추었으며 더럽고 힘들어도 인내하고 참고 버텼다고 했다. 남의 위신을 세워줘야 하는 게 바로 아버지의 직장 원칙이자 내가 직장생활을 할 때 명심해야 할 원칙이라고 일장연설을 시작하셨다.


나는 한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그 말에 직장 뛰쳐나와보니 아버지의 말이 맞다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아버지는 몇 마디의 잔소리를 더 하더니 멈췄다. 3시간은 넘게 잔소리와 상처 주는 말을 하시던 아버지가 30분도 안돼서 잔소리를 멈췄다.

다 컸다 생각한 아들이 철이 너무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한 가정의 가장이니 그만하신 건지 아니면 술을 한잔밖에 안 하셔서 취기가 덜 올라와서 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의 잔소리에 공감하고 빠르게 수용 한 건 나도 처음이었다.

아버진 짧은 잔소리를 마치며 아내에 대한 칭찬을 쏟아냈다. 백수인 남편을 두고도 저렇게 행복해하며 날 이해해주는 수더분한 여자를 만난 건 복이라며, 어머니를 닮은 여자를 만나 다행이라고 했다. 아마도 아버지의 며느리에 대한 최고의 칭찬이었을 것이다. 이후엔 본인의 앞날에 대한 생각과 손주들에 대한 애틋함을 이어 이야기했다.


아버지의 저 잔소리는 분명 예전이라면 듣기 싫고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술주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잔소리가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로 들리기 시작했다. 진심 어린 충고라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미워했고 증오했던 대상인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지면서 더 이상은 잔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용서할 수 없었던 아버지를 용서하고 있었다. 사랑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는 지금까지 저주를 퍼붓고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증오했던 내 모습을 용서받고 싶다. 아직은 용서해달라는 말이 용기가 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사랑합니다 라는 말조차 꺼낼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첫발만 땠다. 아버지의 잔소리는 아들이 걱정되지만 따뜻하게 고민을 물어보고 나눌 수 없어서 그저 예전의 습관처럼 강하고 호되게 말하는 것이라는 걸. 하지만 그 안에는 아버지의 마음이 들어있다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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