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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리한 Sep 22. 2021

아내와 잡담 4

세상살이 다 거기서 거기, 당근에서 당근이었네!

아내는 쇼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본인의 옷을 사러 가면 30분도 안돼서 다 고른다. 마음에 드는 옷을 빠르게 찾는 건 아니다. 그저 돌아다니는 것도 힘들고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싫어서이다.

가끔 대형 쇼핑몰이 모여있는 곳에 가면 보통의 사람들은 아이쇼핑을 시작한다. 건물에서 건물로 이동하여 한 바퀴 둘러보며 스타일을 생각하고 비용에 맞는 옷을 고르기 위해 발품을 판다.

남자끼리 간다면 아마도 1시간 이내로 끝날 테고 여자끼리 간다면 3~4시간은 훌쩍 넘기고 식사와 디저트까지 먹고 온다. 남녀 커플이라면 영화 코스가 추가되고 아내와 남편, 아이들과 동행한다면 십중팔구 아이들 옷을 사러 온다. 그렇게 온 아빠들은 어쩔 수 없이 끌려왔기에 뒤에서 훈수를 열심히 둔다.

"좀 빨리빨리 사자!" "아 그거 괜찮아! 뭐하냐... 대충 사! 아무도 안 봐"

하지만 우리의 경우엔 조금 달랐다. 오히려 내가 더 아내와 아이들의 옷, 스타일을 위해 돌아다니자고 했고 본인은 대충 사자고 하니 세상 이런 아이러니도 없다. 그만큼 아내는 쇼핑을 정말이지 좋아하지 않는다.


코로나 시대가 되며 모든 것들이 비대면으로 이뤄지다 보니 온라인 플랫폼은 좀 더 편하고 정확해졌다. 굳이 대면하지 않아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플랫폼들이 너무나 많았다. 쇼핑을 싫어하는 아내한테는 기가 막힌 호재였다. 매장을 돌아다니느라 체력이 소모될 일도 없었고 어느 누구도 본인에게 '이거 해라, 저거 사라' 강요하지 않는다. 마트에서 장보라고 보낸 남편이 구매 목록 10개 중에 8개만 사 와서 남은 2개에 대한 책임 추궁 과 분노를 할 필요가 없이 아주 자유롭게 의류부터 먹을거리, 가전제품까지 휴대폰 안에서 넘나들 수 있었다. 본인의 신체 사이즈를 줄자로 재더니 몇 번의 의류 쇼핑 실패를 겪고선 요즘은 꽤 잘 산다.


온라인 플랫폼의 활용도가 최대치로 올라갔으니 지출도 그에 비례하여 늘어났고 수입은 한정돼있으니 이대로 지속시켰다간 누가 봐도 마이너스로 간다.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교육비가 늘고 필요한 용품들이 많아지니 교육비는 어쩔 수 없다 쳐도 용품에 들어가는 지출을 줄이기 위해선 자연스럽게 중고시장을 찾게 되고 아주 손쉽고 믿을만한 건 역시 당근 마켓이다. 가격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고 생각보다 상태도 좋고 무료 나눔도 있어서 돈 주고 버려야 하는 것들은 무료 나눔을 통해 이웃에게 전달하고 필요한 것들을 구매하면서 지출이 줄어야 마땅하지만 그리 줄어들지는 않았다.

용품들이 저렴하다 보니 더 많이 구매하게 되고 새 상품 하나 사는데 10만 원이었다면 중고상품 4~5개 사고 11만 원을 지출하다 보니 목적이 완전히 변질되고 있다.(그만큼 내 부업 역시 취미에서 생계형으로 변질될까 우려되니 취미의 변질을 막기 위해선 내년 연봉협상을 위해 회사 업무를 더 열심히 할 예정이다)

크고 비싼 걸 산다면 지출에 대한 체감은 크게 다가오니 쉽게 지르지 못하지만 불변의 법칙인 아이들을 위한 건데 저렴하다면 닫힌 지갑도 열리는 충동구매 정도야 우습게 할 수 있다. 그렇게 구매의 재미를 붙이다 보면

당근에 중독된다고들 말하는데 아내는 한동안 당근을 보며 본인을 위한 것이 아닌 아이들을 위한 모든 것들을 충동구매했다.

추석이라 귀성은 포기한 채 첫째님과 같은 장애를 갖고 있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저런 그간의 일들을 얘기하는데 아내의 휴대폰에선 연신 "당근"을 외쳐대는데 나 빼고 다들 당근을 걱정했다. 어서 당근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한다는 주변의 목소리에 아내는 휴대폰을 들여다봤고 한 당근 하시는 분들이었으니 빠른 대답이 기다리는 자를 위한 배려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명절 전날 손녀가 보고 싶은 건지 부모님이 역귀성을 하셨다. 또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아내는 어머니한테 당근에 중독됐다고 말했더니 어머니가 수긍하는 눈치였다.

"여보! 어머니는 여보가 생각하는 그 당근과 다른 거 생각하는 거야!"

라고 말했더니 어머니가 대뜸

"나도 알아! 당근! 중고거래 말하는 거잖아!"

세상에! 우리 부모님도 당근을 알고 당근 거래를 하는지 나만 몰랐던 것이다. 이쯤 되니 당근은 그냥 나 빼고 다들 하는, 그러니까 나만 시대에 뒤쳐진 사람이 돼버렸다.



일주일간 재택근무를 하며 아침에는 아이들 밥을 차려주고 학교와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후 재난지원금으로 근처 빵집에서 신선한 샌드위치나 빵을 사서 왔다. 커피 한잔 내려서 아내와 간단한 아침을 먹고 아내는 출근을, 난 집에서 노트북을 켜고 근무 모드로 들어간다. 재택의 장점은 쉴 때는 정말 편히 쉴 수 있었지만 단점은 아이들이 집에 오는 순간부턴 업무가 마비돼버린다. 끊임없이 사고 치는 아이들한테 소리치다 엑셀에 걸어놓은 수식을 지워버렸고 강사와 통화하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났다. 녹음된 통화내역을 다시 듣고 해결하기도 했다. 그렇게 4시부터 6시까지 아이들과 분노의 업무를 마치고 나면 저녁 먹일 시간이 됐다. 저녁을 차려 밥을 먹일 때쯤 돼야 아내가 퇴근하고 돌아와선 나한테 말한다.

"찰리 한! 오늘은 여기 가야 돼!"

가야 되는 곳은 아내가 당근에서 구매한 애들 장난감이었다. 집에만 갇혀있다 보니 차로 가면 빠른 거리를 굳이 걸어가겠다고 했다. 몸도 뻐근하고 운동을 필요로 하는 내 몸을 위해 20분을 걸어갔다. 거래장소에 도착 후 아내한테 연락을 해서 도착했음을 알렸고 잠시 후 거래 대상자가 나와서 뻘쭘하게 기다리는 나를 보며 "당근이세요?"라고 물었다. 당근을 많이 해본 사람들은 기다리는 사람만 봐도 당근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네 당근입니다!"라고 대답을 하니 반가운 목소리로 물품을 건넸고 나 역시 아내가 챙겨준 봉투를 건넸다. 이미도 약속된 거래이고 단 돈 몇 천 원인데 그걸 봉투에 넣어야 하나 라는 내 무심함과 반대로 아내는 꼭 봉투에 넣어 보냈다. 채팅 중 거래 상대의 아이가 어리다면 비눗방울이라도 하나 꼭 챙겨 보낸다. 그렇게 아내가 준 돈 봉투를 건네면 대부분 "어머! 봉투까지!"라고 말했고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감사합니다'라는 의미를 전달받을 수 있었다. 무심하게 굳이 봉투까지 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웠고 동시에 아내의 배려심에 나 역시도 고마웠다.

그렇게 일주일 내내 근무가 끝나면 당근 거래를 위해 출동했다. 도착한 장소에서 잠시 기다리면 상대방이 와서는 "당근 이세요?"라고 물어본다. 이쯤 되니 나도 걸어오는 상대가 당근인지 아닌지가 조금씩 판별되기 시작했다. "네 당근입니다!"라고 대답하고 물건 상태를 보며 기분 좋은 거래가 성사되면서 점점 당근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대중교통으로 갈 때도,  부피가 크면 차를 몰고, 가까운 거리는 걸어서 받아오고 무료 나눔을 위해 집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무료 나눔을 위해 집 앞을 나섰는데 저 멀리 기다리는 사람을 보고는 나도 웃기게 저분이 당근을 기다리는 사람이다란 걸 쉽게 알고 물었다.

"당근이세요?"



내가 당근 어플을 처음 설치한 건 한 달 전이었다. 라디오 사연으로 경품을 받았는 데 사용할 일이 없다 보니 중고로 팔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처음 가입하다 보니 거래내역도 없고 물품 사진은 엉성하며 설명하는 글도 대충 써서 그런지 팔리지 않았다. 나보다 거래가 활발한 아내에게 대신 팔아달라며 상품을 올렸고 3주간 안 팔렸던 물품이 일주일 만에 팔렸다.

그때부터 아내는 또다시 본격 당근질을 시작했고 지난주에 정말 많은 물품들을 사다 보니 아내한테 말했다.

"여보! 당근... 이제 그만해도 될 거 같아! 장난감은 좋은데 비슷한 게 너무 많아. 꼭 안 사도 될 거 같아!"

일 끝나고 당근질 하러 가는 것도 조금은 힘들었지만 계속 당근을 통해 뭔가를 구매하는 아내를 말리기 위해서였다. 쓸데없는 걸 사는 건 아니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것도 아녔다. 하지만 당근에 중독된 아내한테는 이것저것 다 좋아 보이는 것 같다. 나한테 허락을 받으려 보여준 물품들을 보면 '꼭?? 굳이... 지금?' 이란 생각이 들어 죄다 거절하고 있다.


평소처럼 아침밥을 만들어 주는데 식탁에 앉은 첫째님의 자세가 구부정했다. 가뜩이나 근육이 약하니 첫째님의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아침부터 호통을 치며 밥을 먹였고 그 모습이 안쓰러운지 아내는 나한테 아이용 의자를 사자고 제안했다. 아내가 당근질을 시작하기 위한 전초 증상이구나 라고 넘기려 했는데 식탁의자가 첫째님한테 맞지 않겠구나 라는 생각을 왜 여태껏 못하고 아이한테 호통쳤을까 하고 반성하게 됐다. 아내는 첫째님이 아이용 의자에 앉을 땐 허리를 잘 세운다면서 당근에서 순식간에 제품을 찾아냈다. 골라놓은 몇 개의 제품군을 살펴보니 하나는 원목으로 된 아주 고급스러운 독일산 의자였다. 모든 것이 아이의 신체에 맞게 조절되며 원목이 주는 고급스러움과 마음의 평안함이 좋았다.

또 하나는 이탈리아산 의자였다. 녹색의 플라스틱 재질 같은데 역시나 튼튼하고 견고하며 조절도 잘되며 톡톡 튀는 감성이 있고 편리하게 모든 걸 조절할 수 있었다.

두 가지 모두 가격대와 실용성에서 아주 완벽했고 관심 없듯 보던 나 조차도 집중해서 뭐가 좋은지 따져봐야 했다. 기술의 독일이냐 감성의 이탈리아냐 를 두고 고민하다 역시 난 원목의 고풍스러운 게 더 좋았다.

이탈리아산 보단 조금 비쌌지만 충분히 값을 주고 활용하기엔 좋았다. 구매의사를 밝히고 며칠 몇 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아내의 당근질에 어느새 나도 빠져들어 보게 됐고 나름의 만족스러운 결과, 아니 지금까지 당근질 하면서 제일 잘 산 것 같다는 뿌듯함도 들었다.

처음으로 당근에서 물품을 사면서 만족하다 보니 문득 깨닫게 된 건 세상 사는 사람들 다 거기서 거기였다. 나 빼고 당근질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부탁으로 싫지만 당근 거래를 하면서 당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채게 됐다. 독일이든 이탈리아든 아이용 의자는 다 있는 걸 보니 부모의 마음은 거기서 거기였다. 당근질 하는 아내의 모습이 별로였지만 점점 적응해가면서 혹시 커피용품도 있나 하면서 검색해봤고 하다 보니 알겠다.

"아!!! 이 재미에 당근 하는구나!"


아내 몰래 커피 내리는 상품 하나를 찜해놨다. 아내는 아이들을 위해 구매하지만 난 나를 위해 구매하려는 게 영 찜찜하다 보니 하트 표시를 다시 지웠다. 공모전에 열심히 도전하여 상금 거하게 받으면 하나 지르려고 고민 중이다. 당근으로 인해 구매하려는 기쁨을 받다 보니... 너 참 좋은 놈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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