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삶에 함부로 동정하지 말 것!
내가 살던 동네에서 32년째 벗어나지 않았다. 유치원부터 마흔이 된 지금까지 이사 한번 하지 않고 지금 사는 곳에 머물고 있다. 기존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새로운 건물들을 짓기도 했고 그런 건물들이 들어온 거리는 많이 변했다. 어렸을 적 슈퍼에서 물건을 훔치다 걸려서 부모님께 많이 혼났던 그 슈퍼는 사라졌고 은행이 입점하여 많은 손님들을 반겼다. 학교 가는 길에 있던 수많은 분식집과 문방구는 사라졌고 울퉁불퉁했던 비포장 길 역시 보도블록이 잘 깔리고 안전한 등굣길로 변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 또한 많았다. 재건축이 진행되지 않던 골목길, 산과 이어져있는 산책길, 내가 졸업했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여전히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변하지 않았던 건 장애인들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봐왔던 장애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동네를 활보하고 있다. 그때 그들의 나이는 아마 20대쯤 돼 보였다. 손수레를 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빈병과 폐지 등 돈이 될만한 것들을 모으고 다녔다. 그때에도 난 그들을 절대 놀리진 않았지만 피해 다녔다. 당시 장애인에 대한 내 인식은 그냥 ‘더럽다’였고 가까이하기 싫은 존재였다. 도움을 청하려고 하면 피해 다녔고 최대한 멀리서 지켜만 봤을 뿐 뭔가를 건네거나 친절하게 대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세월은 30년이 지났고 그 기간 동안 난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을 갖고 결혼을 했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장애인의 부모가 됐다. 첫 아이가, 그것도 뱃속에서 장애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땐 속상함을 넘어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내가 봐왔던 동네의 장애인의 모습과 그간의 인생 경험상 장애인들의 삶이 비참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도 몰랐기에 한동안은 너무 비관적이었지만 결국 장애를 받아들이고 잘 키우기로 결심했다.
출산 후 2년간은 정신없이 육아와 치료에 집중하면서 주변을 둘러볼 수 없었지만 어린이집을 다니며, 병설유치원에 입학하면서 조금씩 삶의 여유가 생겼다. 첫째 아이와 함께 동네를 걸어 다니다 보니 예전부터 봐왔던 그들은 여전히 동네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손수레에 폐지를 열심히 모으는 사람도,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말벗이 되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사람도 그대로 있었다. 세월로 인해 나이는 들었지만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난 한 아이의 부모가, 장애 아이의 부모가 되고 나니 이제는 그들이 더럽다는 편견은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들의 삶을 동정하고 있었다. 그들을 피하지 않았고 가끔은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했다. 그러나 부모가 된 입장으로써 그들의 삶을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장애 둘째 아이는 원하는 모든 걸 쟁취했지만 첫째 아이는 그렇지 못했다. 원하는 걸 말하지 못했고 항상 주변만 맴돌 뿐이었다. 장애의 특성상 그럴 수 있지만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은 언제나 편치 않았고 하나라도 더 뭔가를 해주려는 마음이 커지다 보니 안타까웠고 자연스럽게 그들이 불쌍하다고 느껴졌다.
하루는 퇴근 후에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처음 보는 첫째님과 같은 다운증후군의 성인 남성이 조그마한 카트에 폐지를 잔뜩 싣고는 열심히 걸어가는 모습을 봤다. 스쳐 지나가는 그 청년은 앞을 보며 열심히 카트를 끌고 갔고 뒷모습까지 보다가 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또 그 청년의 삶이 불쌍하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 첫째 아이 역시도 나중에 직업이 없으면 저렇게 지내야 할 텐데 과연 폐지를 줍는 것조차 못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부터 온갖 잡생각이 머릿속을 휘젓고 돌아다녔다. 집에 도착해서 아내한테 내가 봤던 상황들을 말하면서 마음속 한편이 매어와서 눈물이 살짝 흘렀다고 말했다.
아내 역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단호히 말했다. 그들의 삶을 동정하면 안 되며 그들의 삶을 불쌍하게 생각해서는 더더욱 안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는 정신이 번뜩 차려졌다.
장애에 대한 편견은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들의 삶을 동정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 역시 또 다른 편견이었다. 누구에게나 삶은 소중하며. 그 소중한 삶 속에서 어떤 직업을 선택하던 그 직업 역시 소중하다.
교육회사에 다니면서 청소년들에게 돈을 많이 벌고 적게 벌고, 현장이냐 사무직이냐 에 따른 직업의 귀천은 없으며 직업활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며 더 나은 비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 당당하게 말했던 나 자신이 생각나면서 너무 부끄러웠다. 저들은 최선의 방법을 사용하여 직업을 갖고 있었으며 열심히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어딜 봐도 웃으면서 지내는 그들의 모습을 마음속으로라도 응원하지 못할 망정 동정하고 있던 내 모습을 다시 되돌아봤다.
심지어 난 장애인의 부모니까 올바른 인식을 가져야 했고 그걸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데에도 남일 같지 않다 보니 감성에 젖어들었고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했다. 30년이 지나도 저들은 항상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여전히도 폐지를 줍고 말벗이 되어주며 주변 비장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좋아하고 웃으면서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아니 한 인간으로서 잘 해내고 있었다.
내 아이의 미래가 불투명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아직도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아이를 낳은 걸 후회할 때도 가끔 있다. 그래도 저렇게 변하지 않고 뭔가를 꾸준하게 하고 있으니 내 아이도 그럴 것이다. 사회의 한 구서원으로써의 역할을 해낼 것이고 앞으로 더 발전되는 장애인에 대한 정책을 통해 분명 그동안 나라의 지원을 받은 것들을 되돌려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