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 평화? 아니, 내 적은 '평화'
다운 복지관이란 곳이 있다. 여기는 다운증후군 아이부터 성인까지 모여있는 기관으로 영유아를 위한 프로그램부터 주간보호센터, 직업훈련 그리고 복지관 내 커피머신에서 커피를 제조하는 바리스타(다운증후군의 성인)까지 있는 다운 전문 기관이다. 그리고 다운증후군은 우리끼리 항상 말하는 '다운 천사'라고 한다. 친화력도 좋고, 사회성도 좋다. 그래서 우린 천사라고 부른다. 다운 천사~
화, 목요일에는 복지관에서 영유아 교실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집에서 복지관까지는 차로 45~50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한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종료되는 오후 4시부턴 상황이 달라진다. 집으로 가는 길은 그 두배 정도 걸린다. 첫째가 힘들어한다. 90분 정도 쉼 없이 차를 타고 집에 가야 하는 건 아이한테도, 나한테도 쉽지 않다. 막히는 내부순환 진입로를 비집고 들어가야 겨우 비켜주는 차들. 'baby in car'라는 스티커가 무심할 정도로 경적을 울리는 뒤차들, 차는 막혀, 애는 울어, 날은 더워지는데 에어컨은 또 아이한테 안 좋다고 약하게 틀어서 덥고, 그 흔한 통풍시트도 없어 등에는 땀이 주르륵, 첫째도 카시트에 꼼짝 못 하니 땀이 주르륵.
"inner peace, inner peace"
아이를 태우고 운전하는 게 아직은 조금 불편했다. 신경이 더 날카로워서 급하게 끼어드는 차들에게 경적을 울리진 않지만 속으로 엄청 욕했다.
먼산, 하늘, 나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도심로에서 즐거운 생각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한테도 분명 좋지 않은 영향이 갈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듣고 싶었지만 그건 또 아이한테 그리 좋지 않다고 한다. 클래식을 듣자니 내가 졸음운전자가 될 것이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도착할 때쯤 첫째가 잠이 들려고 한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바로 아내가 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던, 무려 1년간 정기구독을 했던 학습지의 노래 CD이다.
말이 느린 우리 첫째에게 이론상 딱 좋은 학습지였다. 물론 여느 부모와 같이 우리에게도 이 학습지는 그저 아궁이의 땔감이 되어버렸지만 CD만큼은 정말 열심히 틀었다.(이건 모두 둘째에게 고스란히 교육시키는 좋은 학습지로 바뀌긴 했다)
모든 동물, 사물 등을 손과 몸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심지어 행동조차도 몸으로 표현해서 아이들의 EQ, IQ, 근육, 상호작용 등등 거의 천재가 될 수 있다는 마냥 나름 쓸모 있어 보이는 학습지였다.
CD를 틀고 가사를 같이 부르고, 가끔 아내가 제일 싫어하는 멜로디도 입으로 부르고, 잠깐씩 뒤를 보고 첫째의 상태를 보는데 꿈나라로 가려는 모습이 포착된다.
오후 6시가 다돼가는데... 그때 자면 분명 밤 9시에나 일어난다. 이러면 앞으로의 일정은 뻔하다. 새벽까지 안 자고 다음날 아침은 늦잠이고, 그럼 재활치료에 최악의 컨디션으로 치료받으면 분명 울면서 안 받을 테고...
이러면 안 된다. 더 크게 동요를 부르고, 창문을 열고, 첫째 이름을 수없이 불렀다. 잠을 깨우는 성공률을 그래도 40% 조차도 안됐지만.
첫째님은 배고프다는 감각, 아니 그런 인지조차도 좀 무디다 보니 1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 배고프다고 우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끼니를 제때 안 챙긴다면 아마도 굶어 죽을 때까지 울지도, 표현도 안 할 것이다. 늦은 밤이면 분유를 먹이는데 그거 마시고선 또 새벽에 잠들어서 깨우지 않는다면 6시간도 잔다.
기본적인 생활, 규칙적으로 먹고, 자고, 싸고 하는 것들이 우리 첫째님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항상 이 부분이 나에겐 가장 어려운 과제였었다.
집에 도착하면 거의 다 뱉어버리는 이유식을 휘리릭 먹인 후 복지관에서 내준 숙제를 시작한다.
미션 No.3: 숙제는 미리미리!
오늘의 숙제는 바로 우리 아이에게 맞는 촉감놀이였다. 그놈의 야채, 흐믈흐믈 액체 주르륵 나오는 그 야채들이다. '산산조각 난 최고의 아빠'편에서 봤듯 난 경험이 한번 있었지만 여전히 힘들다.
야채를 잽싸게 낚아채고선 마구 주무르고 입에 들어간다.
'좀 들어가도 죽지 않아'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리고 눈을 떴다. 첫째님은 또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나는 또 눈을 감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외친다.
'inner peace~! inner peace~! 나는 저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샛별, 내 마음은 호수요 고요한 산속의 새들이 속삭임 같이 평온 하....'
마인드 컨트롤을 하면서 조금씩 아이의 모습을 이해하고 있었다.
"삐삐 삑! 엄마 왔다"
아내는 칼퇴한 후 즐거운 마음으로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아니, 내 생각에는 칼퇴보다는 여전히 육아 탈출에 대한 기쁨인 것 같았다. 그래서 본인의 목소리 조차 컨트롤하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아앙~!!!"
우리 첫째가 힘차게, 아주 우렁차게 울었다.
'inner pea... p... p... what the...'
평온은 이미 다 깨졌고, 우는 아이를 달래야 했다.
“엄마가 화내는 거 아냐. 기뻐서 그러는 거야.”
우리는 첫째님에게 혼내는 게 아니라고, 엄마는 화난 게 아니라는 무한반복 설명을 했다. 겨우 눈물을 그친 아이는 다시 웃는다. 하지만 아내는 이상한 해석을 했다.
"이건 엄마가 없어서 애가 서운해서, 엄마를 본 나머지 너무 기뻐서 우는 거라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네가 소리치니까 우는 거지. 혼나는 줄 알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허물 벗듯이 옷을 벗고 침대로 뿅~ 하고 들어가 버리는 아내를 보면서
"야! 옷 안 집어넣을래? 어??"
앗.. 젠장... 첫째가 또 운다.
“야!! 너 때문에... 아.. 미안해 아빠 화내는 거 아냐!!”
내적 평화는 없었다. 그냥 육아는... 아니 내 편은... 아니다, 그냥 나와 함께하는 것은 ‘혼란’과 ‘전쟁’이지, 평화 따위는 결국 얻을 수 없는, 그냥 ‘적’이었다. 내 적은 '평화' 였던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