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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있는 호주 11: 돈은 주셔야지요 사장님

워홀러들은 배고프고 서럽습니다

by 찰리한

4주간 현장에서 열심히 일했다. 졸리 커팅하다 타일 나르고 접착제를 비비다 보니 그 까칠한 기술자가 어느 날 날 불렀다.

“야! 이리 와 봐!”

'얘는 도대체 언제 내 이름 외울 거니?' 하며 뭔가 문제가 생겼나 하고 가봤다.


"잘 봐. 이게 그라인더야. 꽉 잡고 잘라야 해! 안 그러면 그라인더 힘에 못 이겨 손이 그냥 위로 들려서 잘못하면 그라인더 날에 머리 작살난다”


의외의 인간미를 지난 기술자가 나한테 그라인더를 주고 자르는 연습을 시켰다.

'허허 이 녀석이 웬일이래!!' 하면서 잡아봤다. 생각보다 그라인더는 무거웠기에 '에이 이게 뭐가 들린다고' 하며 타일에 갖다 댔다가 기겁했다. 청룡열차가 올라가듯이 순식간에 손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거봐 꽉 잡으라고 이%^$%야”


무서웠다. 졸리 커팅 기계는 그래도 크기도 클뿐더러 집중만 하면 안전한데 이건 작은데도 불구하고 초집중력과 반드시 손에 힘을 줘야 하는 상시 긴장감을 놓지 않게 하는 복합적인 것들을 요구했다

다시 그라인더를 꽉 잡고 손에 힘을 주고 잘랐다. 아주 엉망은 아녔는지 기술자가 자른 타일 갖고 가면서

"여기 이거 다 잘라!" 이러고 다른 방으로 타일을 붙이러 떠났다.


그렇게 그 위험한 그라인더를 들고 처음에는 신나서 자르다가 순간순간 손에 힘이 빠져서 또 청룡열차 올라가듯 손이 위로 올라가고 위험한 순간들이 계속 발생하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건 생각보다 위험하다. 근데 난 지난 4주간 받은 돈이 고작 400달러밖에 없었다. 숙소비 내고 식비 내면 남는 돈도 없었다. 지금까지 2000달러를 받아야 하는데 고작 400달러만 받고 일하자니 화가 났다. 아니 이런 위험한 것들 시키고 안전에 대한 보장을 해줄 한국인 고용주 인가? 해외에서 이럴게 일하는 게 말이나 되는 것인가?


그날 저녁 퇴근한 후 숙소에서 Dr.kim 사장님께 전화를 했다.

밀린 월급을 좀 달라고 했더니 다짜고짜 화를 내셨다. 돈 없어서 못주는 거 알면서 왜 그러냐고 하자 나도 할 말이 터져 나왔다.

"아니 그럼 기술자들은 있는 돈 다 주면서 데모도 하는 애들은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힘든데 더 신경 써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 숙소비, 식비 겨우 내며 버티는데 이렇게 고된 노동에 위험한 장비들 주면서 안전에 대한 대비는 있나요? 다치면 병원이나 보내줄 건가요?"


그간 쌓였던 것들이 폭발했다. 그러나 수화기 넘어의 Dr.kim은 대답이 없었다.


"이대로는 못합니다. 1,2주는 그렇다 쳐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이렇게 돈 안주는 건 납득이 안됩니다."


그때서야 말을 하셨다.

"찰리 너 돈 받으려고 전화했냐?"

"그럼 돈 받으려고 전화하지 뭐 때문에 전화했겠어요?"


라고 말을 하자 전화를 끊으셨다. 다시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갑자기 서러웠다. 힘든 것도 서럽고 항상 위험이 도사리는 공사현장에서 숙소로 오니 긴장이 풀렸더니 더 서러웠다. 그리고 돈마저도 없는데 받아야 마땅한 돈마저도 못 받으니 배는 고프고 날씨마저 추우니 홀로 된 느낌에 너무 서러웠다.

인종차별 때는 안 나가면 마음이 편하기라도 했는데 이젠 마음마저도 불편해져 버렸다.


다음날 새벽 5시에 쿨한 동생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공사장을 찾아가 돈을 달라고 따져야 했는데 가서 내가 뭔 소리로 요청한들 케쉬 잡이라 어떠한 근거도 없었다. 법적인 조치를 할 수도 없었고 조치를 한다 한들 내가 이길 확률은 제로였다. 이래서 케쉬잡하는 워홀러들이 왜 그리 힘들고 위험에 노출되는 일들을 할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워홀러들의 이런 고충을 알기나 할까?

그 뒤로 더 이상 타일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골드코스트에서는 일을 구하기는 쉽지 않아서 생각한 건 좀 더 대도시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같은 숙소에 있었던 다른 고용주 밑에서 일했던 타일 데모도 형은 타일 데모도들이 돈 못 받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자기도 타일 그만두고 adelaide에 있는 고기공장으로 간다고 같이 가자고 했다. 하지만 내 목표는 돈보다는 문화체험과 나를 발견하기 위한 마음이 더 컸기에 나중에 정 일을 못 구하면 연락한다고 하고 그 형과 작별했다. 언제나 모여서 유쾌하게 지냈던 34층 멤버들과도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RSL클럽에 갔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도 작별인사를 건넸다. 시드니로 가야겠다고. 거기서 일을 구해야겠다고. 그간 많은 도움을 줘서 감사하다고 했다. 모두들 내 결정을 존중해주었고 여기서의 좋은 추억을 잘 간직하라고 했다.


아.. 왜 이리 그날 눈물이 나던지. 기쁘게 단체사진을 찍었고 드웨인 존슨 같은 가드 2명에게 이젠 여기 안 온다고 작별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흘러나오는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오늘만 울자!! 오늘만은 쫌 서럽게 실컷 울자!!'


익숙한 곳에서 다시 낯선 곳으로 가야 한다는 약간의 두려운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RSL클럽 간판은 여전히 밝게 빛난다. 내 눈도 그렇게 하염없이 빛났던 잊을 수 없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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