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
삶은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를 필요로 합니다. 관계 없이 살아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요. 그래서 어떻게 관계맺고 유지하느냐가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관계 때문에 힘들었던 경험 하나 정도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내 뜻과 상관없이 나를 휘두르지만 쉽게 떼어내지 못했던 그 사람과의 관계 말입니다. 상대방의 의도와는 별개로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요.
그렇다고 우리가 무작정 관계를 맺고 있는 건 아닙니다. 모든 관계에는 이유가 있어요. 얻을 것이 있는 겁니다.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보상이 따릅니다. 돈, 필요한 물건, 기댈 어깨, 따뜻한 마음이나 안도감 따위가 있지요. 억지로 만나는 듯한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나지 않으면 더 불편한 거예요. 그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만나는 겁니다. 물론 일일이 이유를 열거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건 어떻게 해야 그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느냐지요.
관계를 시작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일단 마음에 드는 그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어색한 인사를 건넵니다. 중요하지 않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제 아는 사이가 돼요. 함께 밥을 먹고 술도 한잔 합니다. 운동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요. 지내다 보니 서로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비슷해서인지 달라서인지 모르겠지만요. 한번 마음이 열리니 지금까지의 지루하고 긴 시간이 무색하리만큼 급속도로 가까워집니다. 자주, 주기적으로 만나면서 정말 친한 사이가 되지요. 이제 서로에 대해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엔 쉬운 일이 없습니다. 친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 있거든요.
사람들은 친하다는 것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곤 합니다. 일단은 누구보다 가깝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항상 발벗고 나서야 합니다. 상대에 대한 일은 내가 먼저 알아야 하지요. 내가 모르고 있는 그 사람의 일을 다른 사람이 먼저 아는 것도 기분 나쁘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 사람과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순서든 영향력이든 내가 우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거나,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면 섭섭한 마음이 생기는 거지요.
인간관계에서 겪게 되는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상대방과 나의 기대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가까운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상당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해도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둘 사이의 적당하지 않은 거리’
가깝다는 핑계로 상대의 삶에 너무 깊게 관여합니다. 심한 경우 상대의 일을 직접 결정하려 하지요. 물론 신경 써 주는 겁니다. 본인 생각에는요. 그래서 상대가 싫은 티를 내거나 제지하려 들면 내 마음도 몰라 준다며 화를 내거나 토라집니다. 당사자는 불편한 마음이 들면서도 왠지 호의를 내치는 것 같아 거절하지 못합니다. 암묵적인 동의로 이해한 그는 이제 더 자유롭게 간섭합니다. 전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요.
누구나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자유로이 떠돌거나 쉴 수 있는 곳 말입니다. 그곳은 물리적인 공간일 수도 있고 그보다 고차원적인 곳일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공통된 규칙이 있다면 나 이외에 누구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라는 겁니다. 방문을 원하는 사람은 노크를 해야 합니다. 나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요. 내가 싫다고 말하면 누구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나의 공간이지만 때로는 나 자신을 단속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비교적 개방적인 스타일이라면요. 누구나 들락날락할 수 있도록 열어 놓는 것은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습니다. 타인의 모든 개인사와 고민을 속속들이 아는 걸 바라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정도를 넘어서면 피곤하거든요. 성향을 바꾸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적당함은 필요합니다.
그를 위해 적정한 지점에 경계를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디서부터 나만의 공간인지 확실히 해야 합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사람들에게 그 선을 정확하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경계가 나의 그것과 다를 수 있으니까요. 관계로 인한 피로감을 줄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행동입니다.
친하거나 가깝다는 것이 ‘모든 것을 공유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하세요. 나만의 영역이 없는 사람은 삶의 주체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을 다른 사람의 손 위에 두지 마세요.
결혼을 하면 나를 보호해 주었던, 혹은 나와 함께 했던 분들로부터 떨어져야 합니다. 한집에 살고 있었든 아니든, 경제적 지원을 받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그분들을 부모님이라고 상정하고 이어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공식적으로 그분들과 다른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물론 결혼 후에도 부모님과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어요. 걱정 마세요. 그래도 할 수 있습니다. 해야만 해요.
둘만의 공간, 둘만의 시간, 둘만의 가치관을 만드세요. 둘이서 결정하고 그 사실을 부모님께 알리세요.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단호히 거절하세요. 말로 행동으로 선을 그어 주세요. 물론 어려울 겁니다. 너무 야박하잖아요. 어색할 테고요. 하지만 결혼 전과 똑같이 지낼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아내를 포함한 나의 삶을 최우선으로 지켜 나가야 합니다.
부모님 역시 노력이 필요합니다. 내 자식이라고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 아닙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그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지도 않습니다. 자식의 주체성을 해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셔야 합니다. 언젠가는 겪게 될 과정입니다. 묵묵히 지켜보는 것이 가장 큰 응원일 수 있습니다.
부모님께 예를 갖추고 지원을 하는 게 잘못은 아닙니다. 부모님의 마음 역시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늘 옳은 것은 아니지만요. 그나마 가능한 시기는 나 혼자일 때입니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감당하면 됩니까요. 하지만 아내는 다릅니다. 나쁜 의도는 없을지언정 시부모님과의 그런 관계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물론 부모님뿐만이 아닙니다. 형, 누나, 고모, 이모 누구라도 그 자리를 꿰찰 수 있습니다.
가족인데 뭘 그리 예민하게 받아들이냐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 가족에 대해 내가 느끼는 친근함과 아내가 느끼는 친근함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좁혀지지 않을 수 있어요. 설령 가까워진다고 해도 우리가 허락하지 않은 것을 마음대로 주무를 권한은 없습니다. 동의하지 않은 배려는 귀찮거나 불편할 뿐입니다.
우리는 관계에서도 일반적인 관념에 영향을 받습니다. 싫은 걸 싫다고 말하지 못하고 할 수 없는 걸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아무리 좋은 마음이어도 강자와 약자가 생길 수 있는 겁니다.
도움이 될 만한 하나의 장치가 있습니다. 연락창구를 하나로 두는 겁니다. 나의 가족은 내가 아내의 가족은 아내가 연락을 받는 겁니다. 질문도 답도 나를 통해서만 또 아내를 통해서만 하는 거지요. 그렇게 하면 어색함과 불편함을 거르고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독립하세요. 시작할 수 있는 매우 적절한 시기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