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의 조건, 극장장의 조건

2023 삼일로창고극장 창고포럼 진행 후기

by 서유


크고 알록달록한 레고블럭, 그나마도 1인당 10피스 내외만 사용해야 한다. 누군가 이미 만든 극장도 안 된다. 20명의 참여자들을 위한 5개의 테이블에, 먼저 도착한 이들이 드문드문 앉아 블럭을 매만지고 있다.


포럼에 입장한 참여자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속사포 같은 진행 안내를 듣는다. 본인 보드 챙겨서 작성해주시면 돼요, 블럭으로 좋아하는 극장을 만들어주세요, 한국에 있는 소극장 한정이고요, 어떤 극장 만들지 결정하시면 제가 다시 확인하러 올게요.


오늘의 참여자들은 다양하다. 스스로 명명하길, 극장을 떠도는 기획자, 걸어다니는 극장이라고 주장하는 공연자, 모처에서 극장을 운영하는 극장장, 언젠가 극장 하나 만들어 운영하고 싶은 제작프로듀서, 극장의 객석과 무대를 오래 바라보고 싶은 안무가, 무대 위에 서는 배우, 극장의 암전과 먼지가 반짝이는 순간을 좋아하는 기획자,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문화예술연구원, 극장을 좋아하는 관객, 극장이 직장인 사람, 극장 운영과 기술 담당자, 연극연출가 등, 정말이지 다양했는데, 이들의 공통점 하나는 확실하다. 바로, 극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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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하는 얼굴의 극장


20명이라는 숫자는,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숫자다. 삼일로 스튜디오처럼 아늑한 공간에서, 깊이 있는 논의를 전개하고자 하는 포럼의 참여 인원으로는 마침맞은 숫자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들의 신청을 미리 받았다. 어떤 극장을 좋아하는지, 극장장이 된다면 극장 운영의 우선순위는 무엇인지, 포럼에서 무엇을 기대하는지도 물었다. 한분 한분의 응답 모두, 환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스튜디오에 입장하자마자 어서 오세요, 하고 반겨주는 인사 다음으로 눈에 띄는 건, 본인의 이름이 적힌 클립보드다. “어머, 이걸 하나하나 다 준비해주셨네.” 네, 맞아요.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삼일로 창고포럼에 오신 걸 환영해요.


내가 생각하는 극장의 정의는 뭔지, 나에게 필요한 극장은 어떤 극장인지, 내가 원하는 극장은 어떤 극장인지, 미리 적어보시라 안내한다. 보드 작성과 극장만들기가 끝나고 나면, 테이블마다 마주 앉은 이들끼리 서로 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공연을 좋아하는 관객이자 기획자인 서유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극장은 삼일로창고극장인데요, …”


4명씩 앉은 테이블에 서로 소개가 끝나면, 자리를 섞는다. 다시 4명씩 자리를 잡으면, 오늘 이 자리에서는 처음 마주하는 얼굴들이다. 또 소개를 시작한다. 이렇게 두 번을 더 소개한 후에야, 본격적인 진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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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은 어떤 곳일까, 어떤 곳이면 좋을까


극장이란 뭘까요? 창작과 상연의 공간이기도 하고, 공연예술이나 예술단체를 지칭하기도 하고, 커뮤니티 공간이 되거나 플랫폼으로 기능하기도 하죠. 여러분이 생각하는 극장의 정의에 대해 적으셨나요? 서로 이야기 나눠볼까요?”


만나는 곳(!). 많고 다양한 사람이 오가며 경험과 시간이 제각각 쌓이는 공간. 연약한 무언가를 밖으로 꺼내놓을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공간. 자원과 노동이 필요한 현실적인 운영의 공간. 사람들이 직접 모여 얼굴을 마주하고 숨을 나누는 공간. 그 안에서 사유와 감각이 흐르고 연결되고 충돌하는 공간. 무대와 객석이 존재하고 관객과 공연자가 자유롭게 자신들의 의도에 따라 행위를 표현하고 능동적인 참여와 수동적인 참여의 무게감이 존재하는 공간. 동시대의 필요에 변화하는 공간. 물리적 공간을 넘어 창작자와 작품, 관객이 존재하는 곳. 밖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은신처 같은 곳. 직장이자 천국,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홀려버린 공간. 이야기가 모이는 아고라. 예술가, 관객, 이웃이 마을(마이크로 커뮤니티)을 이루는 공간. 창작의 실험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극장에 처음 오는 이들이 예술의 친구가 되도록 돕는 자리.


극장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쏟아진다. 뜨겁고 진지하고 애정이 넘친다.


나에게 필요한 극장은 뭔지, 내가 원하는 극장은 뭔지, 비슷한 듯 다른 답들이 펼쳐진다. 필요한 극장에 대한 답은 아무래도 창작환경에 대한 욕구가 많이 반영되는 듯하다. 대화할 수 있는 동료들이 있는 극장.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예술과 관객들을 지지하는 극장. 다양한 창작적 실험에 오픈된 곳. 실험과 안전이 서로 앞서가려고 하지 않는 곳. 좋은 만남이 꾸준히 이뤄지는 곳. 손에 익은 극장. 관객에게 열린, 나를 불러주는 극장. 기획과 창작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극장. 중요한 문제를 함께 결정할 수 있는 극장. 창작자를 쇼핑하지 않는 극장. 대화할 수 있는 동료들이 있는 극장.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예술과 관객들을 지지하는 극장. 성장하고 변화하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있는 극장. 피드백이 있는 극장. 공동체와의 커뮤니티가 원활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일의 형태에 따라 거점 역할을 할 수 있는 극장. 새로운 창작의 동료들을, 신선한 피드백커들을 늘 만날 수 있는 극장.


원하는 극장은 좀 더 바람이나 상상이 더해진다. 좋은 만남을 돕는 극장. 성장하는 극장. 친구들이랑 언제든지 놀러가도 부담이 없는. 라운지가 커서 오랫동안 머물러도 괜찮은. 희곡서점과 카페,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실험과 대중성을 고루 가진 극장. 관객에게 열린 극장. 깨끗한 극장. 몸도 마음도 건강한 극장. 쉬는날이 없는 극장. 유행 안 타고 꾸준한 극장. 민간의 역량으로 길게 운영될 수 있는 극장. 유행보다는 미션을 갖고 꾸준히 기획하는 극장. 작품만큼이나 극장을 믿고 일단 가볼 수 있는 극장.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극장. 함께 요리하고 밥을 먹을 수 있는 극장. 릴렉스드 공연이 가능한 극장. 큐레이팅 하는 극장. 규칙이 있지만 늘 그것이 유효한지 다시 묻는 극장. 낮에도 극장. 예술계와 대화하는 극장. 스태프들이 행복한 극장. 필요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에 두려움 없는 극장. 시의성 있는 극장. 사랑방 같은 극장. 모든 공연과 전시의 형태를 수용할 수 있는 극장. 지역 주민이나 관내에서의 예술커뮤니티를 활성화하고, 규모에 상관없이 페스티벌을 주최하고 진행할 수 있는 극장. 언제나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변화할 수 있는 극장. 시간이 켜켜이 쌓여 모든 세대가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극장.



사분면 위에 극장을 펼쳐보자


극장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대화를 나눠보니, 손에 든 각자의 극장이 더 선명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극장의 지형도를 그려볼 차례.


스튜디오 바닥에는 이미 좌표가 그려져 있다. 다만 무엇을 축으로 삼을지 정해지지 않았다. 축을 정하는 것부터가 지형도 그리기의 시작이다.


극장의 특성으로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제작 극장? 기획 프로그램? 단순 대관? 공공성? 영리 추구? 프로시니엄 구조? 가변형 무대? 연극, 무용, 클래식, 오페라, 장르 특성별 구성?


이승엽 교수의 『극장에 대하여』라는 책을 소개하며, 극장의 특성에 대해 10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간략히 훑기로 한다. 미션, 재정, 운영형태, 공간형태, 규모, 제작방식, 용도, 물리적조건, 이해당사자, 내외부환경과 여건 등. 시간관계상 세부 설명은 일부 키워드에만 덧붙인다.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각 테이블의 참여자마다 관심의 정도가 다를 테니까.


10개 키워드 중 한두 개 키워드를 선정해서 대화를 나눠보시라 요청한다. 진행자가 제시한 교과서적인 단어 외에, ‘오지랖’의 많고 적음이라던지, ‘말랑성과 경직성’처럼 공간의 물리적·정서적 느낌이라던지, 혜화냐 비非혜화냐(!)와 같은 논의라던지, 극장을 구분하는 지표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아이디어들이 나온다. 기획과 제작에 대해 대화하다가, 공공은 뭐고 민간은 뭐지, 하며 논의가 산으로 가기도 한다. 누군가 극장의 역할이 뭔지 묻기도 한다. 어떤 이야기든 괜찮다. 오늘은 대화 자체가 목표기 때문에.


이런저런 논의 끝에 축을 결정한다. 기획과 대관, 공공운영과 민간운영으로. 기획은 괄호치고 ‘극장의 방향은 내가/우리가 정하지’, 대관은 ‘공간만 잘 쓰고 돌려주십시오’라고 부연해본다.


바닥에 그려진 가로선과 세로선 양끝에, 오늘 축으로 삼기로 한 키워드들을 큼직하게 적어 배치한다. 드디어 각자의 극장이 놓일 시간. 스튜디오 복판에 알록달록 귀여운 블럭극장들이 사분면 곳곳에 자리잡는다. 서로 아는 극장에 대해선 좀 더 기획으로 가야 하네 대관으로 가야 하네 하며 말을 얹는다. 1차 배치 완료.


진행자 가까이에 있는 극장부터 확인해본다. “이 극장은 왜 여기 두셨나요?” 공공성이 얼만큼이고, 기획을 많이 하더라. 아 그 극장은 솔직히 대관을 더 많이 하지 않나? 사실 대관도 자체기획 프로그램을 위한 전략이니 일종의 기획인 셈이다. 1년 중 대관날짜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봤을 때, 대관의 비중이 높은 것 같다. 극장 운영방향이 기획 중심과 대관 중심 중 어디쯤인지, 날짜를 센 숫자로만 구분할 수 있을까? 조금씩 배치가 재조정되기도 한다.


축은 두 개뿐인데, 극장의 특성은 다층적이니,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진다. 깔깔 웃음이 나기도 하고, 본인이 극장장인데 본인 극장을 다른 이가 제작하는 바람에 극장에 대한 발언우선권을 뺏기기도 하며 생각보다 유쾌하게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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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껏 상상하는 시간


내가 극장장이 된다면? 이처럼 짜릿하고 골치아픈 상상이 또 있을까. 참여자 중에 이미 극장장인 분(!)들에게는 극장장이 되기 전 하고 싶었던 것들을 공유해달라고 요청해본다. 아직 못해 본 거면 더 좋고.


공연 전후로 맥주 마시기, 24시간 오픈마이크, 장르간 교류회, 극장장의 흉상 만들어 세우기, 어린이를 위한 극장 만들기, 모여서 파티, 극장 연계 예술인 숙소 운영, 지원금 떨어져서 우는 단체 모집해서 ‘대로 페스타’ 열기, 내한공연(국제교류), 극장 연계 연습실 운영, 극장 자체 시상식 만들기, 3년 이상 장기 프로젝트 진행, 시즌제 연극 만들어 올리기, 시리즈 연극 제작, 자유무대 만들기, 도서 매대 만들기,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먹고 마실 수 있는 공간과 장치 마련하기, 수시로 누군가 찾아올 수 있는 공간 마련하기, 동네 핫플 만들기, 해외 아티스트가 알고 있는 극장, 남녀노소 장애인 등 모두를 위한 동네 문예회관, 창작랩+레지던시, 국내외 극장과 기획자와 예술가를 위한 교류 플랫폼(마켓 아님), 이동형(접이식)객석, 청소년과 아동 관객은 무조건 무료입장, 내마음대로 공연축제, ……


엄청난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온다. 서로의 아이디어 중 마음에 드는 포스트잇에 스티커를 붙여보기로 한다. 같이 해보고 싶으면 더 좋고.


다음 질문. 여러분 혹시, 명동 어느 언덕에, 40석 정도 규모의, 블랙박스 소극장이 하나 있는데요. 혹시 여기서 ‘우리가 극장장이 되어’ 같이 해볼만한 게, 있을까요? 하고 싶은 것뿐만 아니라 해야 하는 일들도 있을 텐데, 꼭 해야 하는 일은 뭘까요? 그 중 함께 하면 부담을 덜 수 있는 일은 뭘까요?


공기가 살짝 무거워진다. 그러나 극장을 사랑하는 사람들답게, 곧 답을 찾아간다. 앞서 펼쳐냈던 즐거운 상상들에 새로운 목록이 추가된다. 파트별로 인력 충원하기, 기획과 제작을 위한 예산 확보하기, 장비 구입과 시설 보수, 조명기와 음향 시설 최신으로 유지하기, 재정자립도 80% 도달하기, 협동조합 만들기, 약속과 규약 만들기, 운영인력 부담 줄이기, 저녁 상주예술가 관리, 이해관계자와 계속 대화하기, 까다로운 지원 조건을 거쳐 주민워크숍으로 지역극 만들기, 에어비앤비, 팝업공간, 공론장, 섬세한 큐레이션, 여러 방식의 관객 개발, …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을 넘나드는 아이디어들을 목격하며, 어쩌면 이 모든게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담긴 상상을 해본다. 멀게는 ‘언젠가, 정말로, 우리가, 함께, 명동의 그 어느 극장을’ 재미나게 운영해보는 상상. 가깝게는, 다음 포럼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들로 삼일로창고극장이 채워질까 하는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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