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자의 집착 시리즈 01 : 이름표
"본명도 좋고 별명도 좋아요. 오늘 불리고 싶은 호칭으로 적어주세요."
각 잡고 만들어둔 목걸이 이름표를 참 싫어한다.
물론 가끔 참여자 중에 악필이신 분들이 손으로 직접 이름표 써붙이는 걸 싫어하는 것도 안다.
하지만 '불리고 싶은 호칭'을 '스스로' 적는 것은, 웬만하면 포기하기 어렵다.
현재 집필 중인 책의 서두에 이 세 줄을 써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호칭과 이름표만으로도 하고 싶은 말이 참 많구나, 싶었다.
나는 내 본명을 그닥 좋아하진 않는다. 내 또래에선 흔한 이름이라, 십대 땐 성만 다른 동명이인이 반에 꼭 한 명 이상 있었다.
소속된 커뮤니티에 따라 다르겠으나, 요즘엔 닉네임도 많이 쓰니까.
혹은 그냥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 중에 마음에 드는 것. 뭐든.
내가 아닌 남이, 지어주고 불러주는, 이름이란 것을,
내가 선택해보는 것.
"오늘 불리고 싶은 호칭으로 적어주세요."라는 말의 뒤에는,
"당신이 어떻게 불리고 싶은지는, 당신이 정할 수 있어요. 여기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이에요." 라는 메시지를 담고 싶은 거다.
참여자로 하여금, 이 자리에, 능동적으로 임하면 좋겠다는 암묵적 제안도 포개서.
덧붙여, '오늘 당신의 기분'이 어떤지 살펴보고 싶다는, 일종의 관심도 담아.
과장을 좀 곁들이면, 이름표를 적는 태도만 봐도, 캐릭터성이 꽤 보이기도 한다.
평소에 조심성이 얼마나 있는 사람인지,
이 자리에 어떤 기분으로 왔고, 어떻게 머물고자 하는지 등.
나는, 다양한 모든 손님들이 궁금하고 반갑다. 심지어 부정적인 태도로 삐딱하게 앉아있더라도. (자의든 타의든 시간을 내어 거기까지 와서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 않은가!?)
목걸이 이름표는 좋게 말하면 포멀한 거고, 솔직히 말하면 거리감과 경직성을 만든다.
기업에서 하는 비즈니스 미팅이나 큰 규모의 행사라면 격식 있게 목걸이 차는 게 어울리겠으나,
내가 주로 하는 소규모 오프라인 만남에서는
손맛 나는 라벨지를 선호한다. 손글씨는 그 자체로 사람 냄새가 담긴다.
숫제 이름을 빼버리고(!) 진행을 시도한 적도 많다.
2019년 쯤, 월간난장이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할 때였다. 달마다 네트워킹 파티를 했더랬다.
아이스브레이킹이라는 개념도 별로 없을 때, 그냥 혼자 이리저리 짱구를 굴리다가 개발한, 일종의 놀이였다.
"라벨지에 나를 표현하는 키워드를 적어주세요. 본명, 나이, 직업 표현, 성별 표현 제외.
취향, 관심사, 가치관 등 당신에 대해 알 수 있는 키워드로 적어주세요."
건강한 인스턴트, 성난 뼉다구, 작심삼초 다이어터, 선택적 비건, 탐닉을 갈망하는 자, 입에 모터 단 수다쟁이, 저질체력, 10%의 이야기, 그럼 됐어, 스스로 서있는 나, 오지탐험, 촉매자, 철부지, 의심과 확신, 허술한 부지런함, 최근 이별, e.올비, 물고기, 음악과 춤, ...
얘술가, 기획자, 혹은 그냥 예술을 좋아하는 이 누구든 - 올 수 있었던 이 모임에서는
각양각색의 라벨지들이 매달 등장했다. (그때만 해도 지금보다 더 기록에 취약했던 내게 사진이 얼마 없는 게 한이다)
나는 이 라벨지들을 한 데 모아놓고, 어쩐지 끌리는 라벨지를 하나씩 가져가게 했다.
그리고 내 라벨지를 가져간 사람을 찾아가시라고 한다. 내향인 많은 예술계 인사들. 쭈뼛거리며 기웃기웃 돌아다닌다. 쑥쓰럽지만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대충 매칭이 된다. 어떤 고리는 3-4명까지 연결되기도 한다. 상관없다. 대충 스탭도 투입해서 일대일로 대화 가능하게 짝을 맞춘 후, 이렇게 말한다.
"자, 라벨지를 고르신 분이, 라벨의 주인에게 물어보세요. '이거, 왜 쓰셨어요?' "
초면인데도 한순간에 깊은 이야기들이 풀려나온다. (어쩌면 낯선 존재기 때문에 나를 더 편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거겠지) 라벨지를 가져간 사람과 라벨의 주인이 매칭이 덜 된 케이스들이 종종 있다. 어떻게든 만나게 한다. 신기하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대충 코드가 맞는 사람들이 매칭이 되는 편이라, 대화가 술술 잘도 진행된다.
가끔 분위기가 과히 좋을 땐 대화 시간을 넉넉히 풀었다. 20-30분까지 얘기한 적도 있다.
3시간짜리 네트워킹파티가 다 끝나고 나서, "진행자님, 아까 무슨무슨 라벨, 그분 성함이 뭐예요? 연락처 물어보려고 했는데 깜빡했어요. 벌써 가셨나봐!" 라고 부산을 떠는 참여자도 왕왕 있을 정도였으니.
본인들이 술술 얘기하구선 나에게 묻는다. "아니 어떻게 했길래 내가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이런 얘기까지 다 하게 만드셨죠..?"
서로 이름도 묻지 않은 채 30분씩 대화를 한다. 그것도 나의 내밀한 면들을 드러내면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서로 환대하는 분위기에서.
물론 월간난장은 '안전함'을 위해 내가 레이어를 복합적으로 설계한 측면도 있다. 어쨌든, 요는, 내가 진행하는 자리에서는 '안전함'이 절대적으로 중요시된다는 거. 그렇게 설계했고, 참여자들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이해한다는 거, 그런 태도로 임하게 된다는 거. 그 전제가 깔린 상태로, 취향이나 가치 지향을 드러낼 수 있다니, 당연히 신나게 대화가 가능하겠지요?
모임에 참여했던 어느 셰프가 별명을 붙여줬다. 페르소나라벨링은 궁극의 아이스브레이킹이라고. ㅎㅎㅎ 극찬에 감사..!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다듬어진 설계와 진행을 전문적으로 한다.
하지만 여전히 가끔, 나를 정말 신나게 했던 그 만남들이 종종 생각난다.
진행만 한 게 아니라, 나 역시 그 일원이기도 했고.
진행자로서 나의 욕망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한다. 나는 왜 '안전함'에 집착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쉬웠다. 내가 안전하게 대화하고 싶어서.
#진행자의집착 #아이스멜팅 #아이스브레이킹 #페르소나라벨링 #월간난장
진행에 대한 설계 팁은 다음 글로도 이어집니다. :)
<나는 왜 의자간격에 집착하는가> - 진행자의 집착 시리즈 02 :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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