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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선 May 31. 2023

내 모든 아픔을 나의 제일 큰 강점으로 만드는 법

"나한테만"이 아닌 "나를 위해" 일어나는 일들

상처되는 경험들의 가장 파괴적인 영향은 우리 자신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며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점차적으로 잊게 되고, 자신을 점점 비하하게 되어요. 

더 가혹한건 외상의 경험에서 끝나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마치 비슷한 상황이 되풀이되는 것 같고, 시도 때도 없이 끔찍했던 감정들이 상기됩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걸 막고, 아픈 과거에 갇혀 살게 돼요.


이 굴레에서 나오는 방법은 나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상처와 그것의 흔적들을 나의 약점으로,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로 쓰는 것을 그만두는 것입니다. 세상에게 억눌리고 부정당한 내 모습을 나까지 비난하기를 관두고 내가 내 편에 서주기 시작하는 것은 모든 것의 터닝 포인트가 됩니다. 우리가 이미 겪은 트라우마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경험들이 우리에게 득이 되도록 바꿀 수 있어요. 아니,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모습들은 대부분 내 트라우마에서 비롯됐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내편이 돼줄 수 있어요


개인적인 예시로 더 깊이 설명하겠습니다.


0. 

난 뼈가 고통스럽게 부드러워지고 구부러지는 희귀 질환을 가지고 태어났다. 6살이 되던 해 심각했던 다리기형을 고치려 온다리에 못을 박고 1년간 걷지 못하는 대수술을 했다. 다리 전체를 두른 깊은 상처와 함께 - 일평생 발걸음을 딛는 매 순간순간이 고문이었다.


어렸을 때 그 때문에 놀이터에서 괴물이라고 놀림받은 적이 많다. 징그럽다고, 프랑켄슈타인이냐고, 아이들은 손가락질했다. 동생은 달콤한 비타민 젤리를 받을 때, 난 헛구역질을 하며 쓴 약들로 배를 채웠다. 통증 때문에 학교 계단을 뛰어내려가질 못해, 나를 스치고 먼저 간 친구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계단 옆에 쪼그리고 숨어 혼자 운 적은 수도 없이 많다. 고통이 특히 심했던 어느 날 절뚝거릴 때 "너 발 절어서 같이 다니기 창피해"란 친구말에 입술을 피가 날 때까지 깨물으며 똑바로 걸으려 노력했다. 체육시간엔 더 이상 조롱거리가 되기 싫어서 뼈가 구부러지는 아픔에도 억지로 뛰었고, 희귀 질환이기에, 건강한 또래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 조차 어떤 통증을 겪는 건지 이해 못 했다. 선생님이 그만 유난 떨라며 꾀병이란 걸 암시할 땐 정말 씁쓸하더라.


난 내 몸을 원망했다. 저주받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내 아픔은 미친 듯이 고독했다. 신체적/심리적인 고통은 나 말곤 아무도 그 깊이를 본인처럼 이해하지 못하기에 참 외롭다.


하지만 난 날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서 이 경험들이 일궈낸 선물들을 열기 시작한다.


난 오래 아파왔어서 내 몸상태에 귀기울이는게 익숙하다. 평생 약을 먹었기에, 현재 어른이 된 난 온갖 영양제를 챙기며 날 돌볼 줄 안다. 나 자신을 향한 원망을 멈추니 알겠더라 - 내 다리가 아파오면 십중팔구 내 건강을 도외시할 때란 걸. 엉망인 식습관과 활동부족을 지속하면 내 뼈는 늘어난 체중을 못 견뎌 구부려지며 아파오기에 반강제로(?) 나 자신을 챙기게 한다. 


난 내가 아팠기 때문에 남들의 아픔을 이해할 줄 안다.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약한 사람을 먼저 챙기려고 노력하는 어른으로 자랐다. 어린 내가 받았으면 했던 배려와 이해를 베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된 것에 난 진심으로 내가 자랑스럽고 또 내 아픔에 감사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나를 미워한 끝에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니까, 불행했던 과거와 대비되는 현재 가벼운 내 마음이, 내가 내 몸뚱이에 가지고 있는 애정이 얼마나 귀한지 똑똑히 안다. 


모든 걸 겪지 않았으면 절대 몰랐을 깊이. 


물론 처음부터 날 돌본거 아니다. 난 아주 오래 나 자신을 버려왔다. 온갖 몸에 안 좋은 건 다했다 - 자기혐오에 어차피 망한 몸인데 뭐, 이런 생각으로 나를 내팽개쳐 살았다. 우리 가슴의 멍울이 정말 우리를 갉아먹기 시작하는 건, 거기에 굴복하여 나까지 나를 포기할 때부터다. 


날 저주하는 것에 지칠 때즈음 나는 내 다리를 주먹으로 때리며 울었던 날들만큼, 내 몸을 쓰다듬으며 고마워하는 날들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손가락으로 상처 하나하나를 어루만졌다. 지금까지 책망했던 내 몸에게 처음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그 가혹한 수술과 약을 견뎌준 것에, 매일매일 걸을 수 있는 것에, 내가 내 몸을 학대했을 때 무너지지 않은 것에. 사람들의 못됨을, 무지를, 내 탓으로 돌려버려 미안하다고 꾸준히 말하고 어루만지고 되뇌었다. 처음 내 몸에 감사를 전한 그날이 아직도 선명하다 - 몇 시간 동안 멈추지 않던 눈물과 처음 느껴보는 깊숙한 안도감.


통증이 시작되면 과거엔 화와 비참함에 낙담했다면 이젠 이 고통은 내 몸이 날 사랑해서 보내는 신호라고 생각하며 (처음엔 뭐 하는 거지 싶지만) 대화를 시도했다. 

아 - 요즘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 보네. 

요즘 이런저런 핑계 대면서 음식도 엉망으로 먹고 약도 잘 안 챙겨 먹었다 그렇지? 

미안해. 나 아직 우리를 챙기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 

그럴 때마다 나에게 단도직입적인 사인을 보내줘서 고마워. 

그리고 그 말대로 날 챙겼다. 놀랍게도 점점 내 상태는 호전되어 갔다. 내가 제일 견디기 힘든 건 고통 그 자체보단 나조차 날 버렸다는 비애 아니었을까?


자기 사랑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이유는, 정말 모든 것의 중심을 바꾸기 때문이다.


1.

위의 예시는 모두가 공감하긴 힘드니 이번엔 감정적인 아픔을 볼게요.


내가 14살 땐가, 저녁식탁에서 아버지의 말에 반대하는 의견을 말했었다. 아빠는 "넌 네가 뭐라도 되는 거 같지? 넌 _도 아니야"라고, 화내시고 비웃으셨다. 이런 상황은 내 어린 시절 꾸준히 반복되며 나의 자존감을 뭉갰다. 성인이 됐을 땐 심각한 대인 공포증만이 남았다. 남들 앞에선 말을 못 했다. 나의 생각은 모두 틀렸고, 말할 가치나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기에. 모두가 날 비웃을 거라 생각했기에. 


내 생각을 말 못 해 아무도 진실된 나를 몰랐고, 매일 "아, 나도 말할걸.." 안타까워하며 후회를 하루 몇십 번씩 하며 많이 외로워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런 후회를 더 이상 거듭하기 싫단 걸 자각하고 나서야 이 특정 외상과 그것에서 일궈진 내 안의 패턴을 자각하고 인정할 수 있었다. 쉽지 않았다. 내 생각을 얘기하는 건 또다시 모욕과 창피당할 거란 깊은 두려움을 상기시켰고, 말하기 전에 어조부터 목소리 톤까지 모조리 계획하고 떨면서 한마디를 겨우 내뱉는 걸로 시작했다. 나 역시 목소리를 내고 의견을 (남을 해하지 않는 한) 낼 자격이 있는 사람이란 걸 오랜 시간 되풀이하고 다짐하고 연습했다.


수치스럽고 슬픈 시간이었지만 내가 말없이 찌그러져있던(?) 시간은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여러 말들을 들으며 내 머릿속에서 내가 어떤 의견에 제일 동조하고 어떤 것에 제일 거부감을 느끼는지 (남들의 공격을 덜 받으며) 나를 알아갈 시간을 주었고, 나는 내 의견을 부정당했기에 나만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정반대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됐다고 생각한다. 말이 줄 수 있는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알기에,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는 노력을 하게 됐다.


그리고 현재 대인기피증은커녕 할 말은 하는 내 당찬 성격은 이제 나의 가장 자랑스러운 일부가 되었다. 틀린 것엔 방관하지 않고 아니라고 할 줄 아는 사람이 된 것. 직장에서, 사회생활에서 함부로 취급받지 않는 것. 보호받아야 할 대상에게 반복적으로 묵살당하며 조롱당한 건 큰 상처였지만, 그 경험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온전히 나에게 달렸다. 


얼마나 마음 놓이는 카타르시스인가 - 아무 힘도, 영향력도 없는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난 - 우리는 - 모든 걸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선아,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의견들을 표현할 수 있길 바라. 우물쭈물하며 너를 침묵시키면 아무도 네가 어떤 사람인지 진심으로 알 수 없을 거야. 그리고 난 지금까지 외로웠던 네가 정말 너를 알고 이해하는, 너랑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처럼 계속해서 말을 삼키고 우리를 드러내는 걸 꺼리고, 뒤늦게 후회하다간 너와 잘 맞을 수도 있는 사람을 만나도 못 알아보고 스쳐 보낼 거 같아. 너의 의견이 묵살당하고 조롱당했던 거, 네가 느꼈던 수치심, 정말 미안해. 너의 생각이 가치 없어서도, 너의 가치가 보잘것없어서도 아니었어. 조금씩이라도, 한 마디씩이라도 좋으니까, 네가 준비되면 우리 생각을 말하는 걸 연습해 볼까?


2. 

"내 생각은, 한마디로 내 존재는, 수치스러워. 난 벌레만도 못한 존재야"에서

--> 

"나의 말과 생각은 들릴 가치가 있어. 불공평하고 잘못된 행동을 제지할 권리가 있어. 난 내가 원하는 걸 말해도 되는 사람, 내 의견을 존중받아 마땅한 남들과 평등한 사람이야"

라고 나를 설득할 때 비로소 되풀이되는 무시와 멸시에서 벗어나 나뿐이 아니라 모두에게 존중받기 시작했고,


"내 몸은 저주받았어. 아무도 날 이해하지 못할 거고 난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할 거야. 그러니까 술을 마시던 담배를 피우던 몸에 안 좋은 걸 먹던, 어쩌라고"에서 

-->

내 몸은 지금까지 날 살아있게 해 주려 하루도 쉬지 않고 날 지켜줬어. 내가 나 자신을 학대할 때도 묵묵히 내 심장을 뛰게 해 줬어. 봐, 지금도 난 걸을 수 있잖아. 이 통증은 나를 괴롭히는 목적이 아닌, 나를 사랑하는 내 몸이 지속하면 정말 큰일 날 수 있는 상황을 막아주려고 보내는 신호야" 

라고 생각하니까 비로소 나의 건강을 서서히 되찾을 수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안도감과 따듯함은 덤으로.


억지로라도 나를 무너뜨린 경험들이 남긴 장점을 쥐어짜 내야 합니다. 정신승리처럼 느껴질지라도. 그 경험이 쌓아 올린 내 안의 벽도 허물려는 노력을 해야 해요. 안 그럼 영원히 그 아픔에 갇혀 날 연민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고통스러운 굴레에 감금될 수 있습니다. 이미 충분히 아파온 나를, 차마 이 안에 갇혀있게 버릴 순 없잖아요. 


살면서 상처되는 일은 어쩔 수 없이 생기지만 세상사람 우리 모두 자신의 경험에서 지어진 세계관에 한차례 투영되어 행동한단걸 이해하고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언제나 나에 대한게 아닌 걸 깨닫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모든 걸 되돌아본다면, 나의 깊은 상처를 나의 자랑으로 바꿀 수 있을 거예요. 이 변화는 오직 나만이 만들 수 있습니다. 아무도 대신 못해주기에 꾸준히 노력하면 그만큼 안전하고 온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이 벌 내린 나의 일부를 받아들이고 위로해 주고 사랑했을 때 비로소 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보이기 시작해요.


나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로 세상이 써먹은 것들을, 나는 나를 사랑하는 이유로 써먹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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