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나를 지금의 내가
Time is not linear.
시간은 비선형적이라 어떤 이들은 말한다. 과거, 현재와 미래가 일직선으로 놓여있다는 개념은 궁극적 사실이 아닌 그저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정리해 놓은 개념이고 과거, 현재와 미래는 모두 동시간에 일어나고 있다는 머리 아픈 컨셉이다.
우린 과거가 현재의 나를 만들고, 현재의 내가 미래를 바꿀 순 있어도 반대로 미래의 내가 지금을,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아무 영향력을 끼칠 순 없다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
자라며 의심할 여지없이 믿던 게 있다. 나는 일찍 죽을 거라 -내 주변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도록- 아무도 날 깊이 사랑하지 않도록 하늘이 정해놨다는 것.
가족도, 친구도, 모두가
아주 조금 슬퍼하고 금방 괜찮아지도록,
딱 그 정도의 사랑이 내가 받을 수 있는 최대치라고 믿었다.
16살 때 해선 안될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방 안에서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장롱에 기대 울다 책상 위 문서용 칼을 집어 들었다.
머릿속에서 뛰는 듯 들려오는 일정한 맥박소리는 나를 영합하듯 점점 커져왔고, 그 칼을 손에 들고 있다는 게, 지금 하는 생각들이 너무 무시무시한 듯 혹해서 점점 멍해졌었다. 손목에 선명한 파란 핏줄과 섬뜩한 날을 번갈아보다 문뜩 장롱문짝에 붙어있던 거울에 시선이 스쳤다. 그 순간 거울에 비친 나는 내가 아니었다. 아니, 분명 나지만 옷이 달랐고, 머리가 짧았고, 스치는 눈길에도 너무나 평온해 보이는 표정을 한 내가 있었다. 너무 놀라 다시 거울을 보니 그냥 당시 내 모습이였고 그 순간 정신이 들어 칼을 내려놓았다. 너무 당황해서 점점 잠식되던 암울에서 거의 튕겨 나오듯 정신 차렸었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본모습이지만 그 표정이 잊히질 않았다. 말로 형용 못하는 확신에 가득 찬 표정. 그 표정을 지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나를 치유하고 감정을 소화해 내려 고군분투 중이던 어느 날이었다. 16살의 기묘한 경험은 그냥 잘못 본 거라 잊힌 지 오래. 이맘쯤 난 (앞으로 소개될 방법들로) 나 자신을 돌보기 시작한 지 1년쯤 됐었다.
그날은 처음으로 내가 살아있음에, 내가 나인 것에 감사하다고 느낀 밤 바로 다음아침이었다. 살면서 처음 경험한 평온함에 행복에 겨워 펑펑 운 다음날.
명상을 하며 전날 밤 느낀 자기 사랑과 확신을 잊지 않도록 되새기다 문뜩 16살의 기억이 떠올랐다. 장롱에 기대 우는 생생한 그날의 욱신거림에 아파하는 내 안의 16살 아이를 다독이며 안아주는 상상을 하며 간절히 듣고 싶었던 말들을 해주었다.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아주 오래 머릿속을 장악한 -난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 언제나 누구에게나 짐이라는 생각들이- 얼마나 틀렸는지 몇 번이고 얘기해 줬다.
내 안에 그대로 얼어있던 16살 아이가, 내가, 얼마나 그 말들을 들으며 안도하는지 느껴졌다. 제발 누군가가 해줬으면 했던 그 말들 - 드디어 들었다.
한참을 위로하고 위로받은 후, 씻으러 화장실 거울을 봤을 때 그대로 얼 수밖에 없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다름 아닌 과거 스치듯 본 바로 그 얼굴이었다. 어깨에 못 미치는 단발머리, 눈물에 얼룩져 늘어진 티셔츠, 팅팅 붓고 빨간 코와 눈이지만 제일 예쁜 표정. 꼭 짓고 싶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나. 나를 살린 그 얼굴.
과거의 나를 다독임으로써 과거에 닿았다. 과거의 나를 안아주는 게, 사랑해 주는 게 현재 나뿐이 아닌 그때의 나까지 보듬었다. 시간이 정말 선형적이지 않다면, 방금 내 말들이, 내 다독임이 정말 16살의 나를 위로한 거 아닐까? 살아가도록 그녀를 안아준 거 아닐까?
이 경험은 아무리 불공평하고 힘들고 벗어나기 힘든 상처가 있었을지라도 그것들의 그늘이 평생 나를 따라다니지 않게끔 할 수 있다는 걸 가르쳐줬다. 나의 결핍들이 점점 목을 옥죄어오는 듯했지만, 그 특별한 결핍들을 채우며 숨이 쉬어졌다. 나의 생각을 제약하고 나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지배하는, 자꾸 내가 내가 아닌듯한 행동과 상황에 이르게 하는 모든 상처들을 보듬으며, 그것들 전의 나와 재회하게 도와준 모든 방법들을 우리 모두가, 그리고 가끔 내가 날 또다시 잃어버렸을 때, "나"에게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록해 놓았다. 우리 모두 아픔에 우리 자신을 잃은 채로 있기엔, 우리가 너무 사랑스러우니까.
"Linear time is a western invention. Time is not linear, it is a marvellous entanglement, where at any moment, points can be chosen and solutions invented, without beginning or end."
선형적 시간은 서구의 산물이다. 시간은 비선형적인 것으로, 시작도 끝도 없이 언제 어디서든 지점을 짚어 해답을 찾아낼 수 있는 경이로운 뒤엉킴과도 같다.
건축가 리나 보 바르디 (Lina Bo Bar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