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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 Jan 18. 2019

나는 정희주, 이수진, 고유라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남성 캐릭터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이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리뷰

(※글의 특성상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양한 소재가 드라마에서 쓰이고 있는 최근, 가장 독특하고 신선한 소재를 사용하는 작가로는 송재정 작가가 있다. 그가 <나인 : 아홉 번의 시간 여행> <W>,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 보여준 내용은 다들 범상치 않았다. 향을 통해서 과거로 간다거나, 주인공이 웹툰으로 빨려 들어간다거나, AR 게임이 현실로 이뤄진다거나. 반복적으로 쓰여온 소재들을 사골처럼 우려먹다른 드라마들과 달리 신선한 소재를 과감하게 사용한다는 점에서 송재정 작가의 드라마는 대부분 사랑받았다. (<나인 : 아홉 번의 시간 여행>의 경우에는 기욤 뮈소의 소설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당시 제작사 측에서는 소설의 모티브만 따왔다고 했지만, 설정과 전개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표절을 의심받고 있다.)

  하지만 그가 써 온 드라마에서는 명확한 단점들이 보인다. 판타지적인 소재를 사용하다 보니 내용의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점, 그리고 내용이 너무 느리게 진행된다는 점 등. 그러나 내가 생각했을 때 가장 큰 문제점은 여성 캐릭터의 활용이다. 이는 현재 방영되고 있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공식 포스터 일부분. (출처 : tvN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공식 홈페이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 비중이 있는 여성 캐릭터는 3명이다. 박신혜가 맡은 정희주, 이시원이 맡은 이수진, 한보름이 맡은 고유라. 이 세 캐릭터 모두 남성 캐릭터의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 쓰일 뿐, 캐릭터 자체의 이야기를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도 박신혜가 맡은 정희주는 주연급의 역할이기 때문에 좀 나은 편이지만 이수진과 고유라는 정말 최악으로 다뤄지는 인물들이다.

  우선 이수진을 살펴보자. 이수진은 현빈이 맡은 유진우와 박훈이 맡은 차형석의 갈등에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는 유진우의 아내였지만 차형석과 불륜을 저지른 후 유진우와 이혼, 차형석과 결혼했다. 그러나 차형석이 이수진과 불륜을 저지른 이유가 진정한 사랑이었는지, 혹은 유진우에게 회사를 빼앗긴 것에 대한 복수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이수진의 감정은? 당연히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다. 그는 그저 유진우와 차형석의 질투심, 복수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인물일 뿐이니까. 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장면이 아래의 두 장면이다.

https://tv.naver.com/v/4974100/list/295450

아버지로부터 선택받지 못한 차형석이 분노하며 이수진에게 청혼을 하는 장면. (출처 : 네이버 TV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홈페이지)

https://tv.naver.com/v/4974142

유진우에게 이수진과 결혼할 것이라 밝히는 차형석, 이런 행동에 반응하는 이수진. (출처 : 네이버 TV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홈페이지)

  이 장면들에서 이수진의 감정은 하나도 고려되지 않는다. 생각할 시간을 갖자는 말도, 유진우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하지만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차형석과 이수진이 결혼했다는 것이다. 이수진은 대체 왜 차형석과 결혼한 것일까. '내용 전개상 유진우의 복수심을 키우기 위해서' 말고는 딱 생각나는 게 없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고유라. (출처 : tvN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공식 홈페이지)

  다음은 고유라. 고유라야말로 이 드라마에서 '극혐'인 존재인데, 유진우의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유진우의 두 번째 아내이자 현재 이혼소송 중인 고유라는 거짓말과 막말을 일삼고, 술에 찌들어있으며, 매니저와의 불륜을 저지르고 있고, 유진우를 통해 더 많은 돈을 받으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행동을 하는 자세한 이유가 없다. 그저 허영기가 가득하고, 충동적인 성격이라는 것 외에는.

  작가가 이수진과 고유라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는 그를 대하는 다른 캐릭터들의 말에서 드러난다. 차형석의 아버지인 차병준과 고유라의 매니저인 노영준은 각각 이수진과 고유라에게 막말하며 하대하고, 자신 혹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잘못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들만 탓한다.

https://tv.naver.com/v/4974167

차병준과 이수진의 대화 장면. 차병준은 이수진에게 '너는 창녀'라며 폭언한다. (출처 : 네이버 TV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홈페이지)

https://tv.naver.com/v/5041063

상황이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자 노영준이 고유라에게 화를 내는 장면.(출처 : 네이버 TV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홈페이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 등장하는 정희주. (출처 : tvN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공식 홈페이지)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정희주에게 걸어볼 만 하다. 주연이고, 드라마 내용 안에서도 꽤 비중이 있는 편이므로. 극 중에서도 점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정희주의 이야기도 빈약한 것은 마찬가지다. 정희주는 유진우가 동생의 게임을 갖기 위해 사실상 자신을 속여 호스텔을 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고, 1 년간 동생의 생사에 관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확인했으며, 그가 거짓말을 해야 했던 이유도 정확히 모르지만, 헌신적으로 그를 돕고 믿는다. 왜 이러는지, 그리고 이후에 왜 사랑하게 되는지도 설득력이 있을 만큼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그를 돕는 것도 굳이 정희주가 아니어도 될 정도라, 인물 소개에 두 번째에 위치한 인물이지만 없어도 그만인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나마 내용이 진행되면서 퀘스트를 풀 수 있는 힌트를 유진우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다른 사람들이 혹은 유진우 스스로가 알아낼 수 있을 만한 힌트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일이었다.

  송재정 작가의 기발함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는 단언컨대, 소재에 있어서 앞서나가는 작가다. 그러나 그가 여성 캐릭터를 구현하고 활용하는 방식은 최근 기존의 고정된 캐릭터 양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흐름에 비해 굉장히 뒤떨어져 있다. 내가 2019년에, 한국 드라마에서 자신의 며느리에게 '창녀'라고 얘기하는 시아버지를 보다니.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장면이었다.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으므로. 송재정 작가는 이제 바뀌어야 한다. 소재만 앞서나간다고 박수받을 수 없는 세상이 왔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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