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프롤로그 / 나의 과거 이야기
2022년 '의미 있는 삶' 프로젝트를 시작하기에 앞서, 나의 과거에는 어떤 일이 있었고, 내가 어떻게 이렇게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내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이라, 의미 있는 삶 프로젝트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하지만 꽁꽁 숨겨두고 아직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터놓지 못한 내용까지 이곳에 적기로 결정했다. 내가 특별하거나 대단한 사람이 아니고, 또 평소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 정말 힘든 시기를 거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이런 나 같은 사람도 변할 수 있었고, 누구나 도전하고 변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싶어서이다.
우선, 간략한 버전으로 설명하자면 나는 한국에서 캐나다로 혼자 넘어와 생활하고 있는 30대 중반 3년 차 해외 거주 유랑자이다. 2018년 12월 캐나다로 취업비자로 넘어와 2020년 12월 캐나다 영주권을 취득했다. 이 기간 동안 코로나, 가족들의 죽음, 우울증, 불안장애 등으로 고생하고 있었던 나는 2021년 1월부터 작은 희망을 가지고 시작한 '마음 프로젝트'(다음 포스팅 참조)를 통해 인생의 많은 부분의 변화를 겪었고, 2022년 새롭게 '의미 있는 삶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이곳 브런치에 나의 도전 과정을 공유하기로 결정하였다.
나의 과거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캐나다 이민과 영주권 취득에 관한 내용이 조금 섞여있을 수밖에 없는데, 들려드리고 싶은 내용의 핵심은 내가 어떻게 인생의 힘든 순간을 겪었고, 쓰러졌으며,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바란다.
~2017년 - 한국, 예상에 없던 난관 -
2013년-2015년 20대 중반, 워킹홀리데이로 캐나다에서 1년 반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제일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시간이 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캐나다에 사는 남자 친구와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됐다. 캐나다를 떠나면서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꿈을 가졌다. 한국에 들어와 한국에서 뷰티 관련 제품을 제조 수출하는 중소기업 해외영업부에 들어가서 영어권 국가 담당 영업사원이었지만, 운 좋게도 곧 영어권 영업 매니저로 진급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약 3년간 근무를 했다.
근무를 하면서도 언젠가 캐나다로 돌아간다는 계획은 그대로였지만, 그 기간 동안 캐나다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서 자리를 잡은 남자 친구는 미래에 대한 부담을 토로하며 나에게 이별을 선고하였다. 갑자기 계획이 틀어져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게 됐다. 이 시기에 내가 한국에 계속 남아 남은 인생을 보낼 것인가, 과연 나는 그 삶에 행복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제일 컸던 것 같다.
2018년 -캐나다 이민을 가기로 결정하다.-
수많은 고민을 뒤로하고, 30대에 들어선 이 시기에 나는 인생을 바꿀 엄청 큰 결심을 했다. 내 힘으로 캐나다 이민에 도전해보겠다고 결심했다. 다니던 직장도, 좋아하던 일이었던 해외영업직도 포기해야 했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새로운 나라에, 홀몸으로 넘어가 정착을 한다는 게 조금 무섭기도 했다. 그럼에도 캐나다 이민을 결정한 이유는 정말 많았다.
그중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아름다운 자연
2. 여유 있고 평화로운 사람들
3. 내 삶이 있는 근무환경
4. '다름'을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다문화
5. 무상 의료비와 같은 복지 등...
최종적으로 추려보자면 '행복한 삶',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아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삶'을 꿈꿨기 때문이고 캐나다가 내가 원하는 그런 곳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사 퇴사 후 캐나다로 가기 위한 구직 활동과 취업비자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고 12월에 캐나다로 들어오게 됐다. 유학 후 이민을 준비하기에는 내 저금액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취업비자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고 찾아보던 중 운 좋게도 과거 아르바이트로 근무했던 레스토랑에서 나를 매니저로 채용해주었다. 그렇게 12월에 캐나다 땅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2019년 - 파라다이스의 현실은 혹독한 정글이었다. -
워킹홀리데이로 온 캐나다는 말 그대로 '파라다이스'였다. 매일매일 친구들과 여기저기 놀러 다니기 바빴고 열심히 하던 아르바이트도 즐기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로 온 캐나다는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갔음에도 내 예상과 너무 달랐다. 다채로운 색깔의 환상적인 파라다이스가 무채색의 혹독한 정글로 변했다.
원래 일하던 레스토랑이 아닌 다른 지점으로 발령이 났고 내가 예전에 일하던 곳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게다가 갑자기 취업 스폰서를 받고 들어왔기 때문에, 이를 원하지 않던 동료 매니저들과 아르바이트생들과의 관계에서 텃세 등의 문제가 있었다. 원래 이곳은 내가 들어가기 전에 여러 명이 퇴사한 곳이었다고 한다. (추후 나를 채용했던 보스에게 물어보니 나는 목표가 뚜렷해서 절대 관두지 않을 것 같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하루 평균 10-12시간 근무를 해야 했으며, 간혹 한 달에 한 번은 재고조사를 위해 아침 10시에 출근하여 다음날 저녁 1시에 퇴근하는 날도 있었다.
시간이 가면서 타지에서의 외로움, 일을 하면서 받는 체력적, 동료들로부터 오는 정신적인 압박감, 한국에서의 직장과 가족을 포기하고 온 곳에서 느껴진 박탈감, 그리고 이에 따른 실패감 등등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레스토랑은 25개 테이블 정도의 중규모로 하루 평균 만보~만 오천보를 걸으면서 레스토랑의 홀과 주방, 호스트를 돌아다녔다.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해 한국을 떠날 때와 비교해 제일 심했을 때는 몸무게가 10kg까지 빠진 적이 있다. 집에 오면 녹초가 돼, 일하고 집에서 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목표를 세우고 다양한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던 Dreamer, 예전의 꿈꾸는 나는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꿈꾸던 나의 인생을 만들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어졌다. 그저 영주권 취득만을 바라보면서 온갖 에너지를 끌어모아 열심히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유일한 희망은 1년 후에 생기는 휴가로 한국에 가서 가족들과 만나는 것뿐이었고 그것만 생각하며 계속 열심히 일을 해나갔다.
2020년 상반기 - 끝이 보이지 않는 내리막길 -
그렇게 드디어 휴가를 받아 1년 4개월 만에 한국에 휴가를 갈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캐나다에서 영주권 초청장도 나와 영주권도 신청할 수 있게 됐다. 나의 모든 고생이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족과 친구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너무 설레었다. 하지만 한국에 도착한 지 3일 차, 한국에서 신천지 발 코로나가 터졌고 확진자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해야 했고 2주 받은 휴가를 10일로 줄여 급하게 캐나다로 돌아와야 했다. 내 휴가 중 남은 3일은 레스토랑을 위해 자가격리를 하고 복귀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는 아직 자가격리 지침도 나와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 즈음부터 우울증, 무기력증, 불안증, 공황발작 등의 증세가 서서히 심해지기 시작했다. 술 등 몸에 안 좋은 것들에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원래부터 애주가이긴 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퇴근하면 무조건 술을 마시기 시작해 주 6일 정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퇴근 후 하는 일은 집 근처 리큐어 스토어로 가서 8팩짜리 캔 맥주, 와인, 소주 등을 사들고 들어오는 것뿐이었다. 집 냉장고에 술이 없으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애주가였지만 본격적으로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그나마 가끔씩 지인 또는 친구들과 마시는 술 모임이 이때 당시 삶의 유일한 낙이었다. 정말로 그 시간을 진심으로 즐겁게 보내지도 않았던 것 같다. 친구들과 만나 어울리는 것보다 술을 같이 마실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 지금도 좋은 관계로 지내는 지인들과 친구들이지만, 원래부터 남에게 마음을 털어놓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잘 못하는 성격인 나는 더더욱 그들에게 나의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놓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디즈니 영화인 '미녀와 야수'를 보면, 주인공 '벨'이 '야수'를 떠났을 때, '벨'로 인해 잠시 활기가 넘치고 따듯해졌던 야수의 성은 적막만 가득하고 어둡고, 고요해진다. 캐나다로 넘어가기 전 후의 내 일상생활이 그렇게 변해버렸다. 내가 꿈꾸며 오랫동안 준비해온 캐나다 이민이라는 꿈을 안고 캐나다에 왔는데, 되려 더 힘든 삶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코로나가 전 세계적으로 제일 심각했던 이 시기, 영주권 심사는 정부 직원들이 모두 긴급한 다른 업무에 투입돼서 통상 걸리는 시간인 4~6개월을 지나 언제 승인이 날지 불투명해졌다. 레스토랑은 실내 영업이 금지됐고, 매니저들만으로 레스토랑 영업을 강행하여 주방 조리까지 떠맏으며 근무시간 및 업무 강도는 더 심해졌다. 이 시기에 그나마 작은 즐거움이었던 친구들도 볼 수 없게 됐고 혼자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나의 정신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1리터의 눈물이라는 책 제목이 생각난다. 캐나다에 와서 흘린 눈물은 분명 그 이상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한 달에 적어도 4권은 꼬박꼬박 챙겨 읽는 그 좋아하던 독서도 멈추고, 집에서건, 버스에서건, 음악도 한번 들어본 적이 없으며, 좋아하던 사진 찍기도 이 시기에는 찍은 사진이 없다. 이 때는 내가 우울증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지만 나중에 이때 쓴 일기나 메모를 보면서 내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고, 모든 의욕을 상실했고, 그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020년 하반기 - 내리막길의 끝에서 무언가와 충돌하다. -
그러던 와중, 9월에 한국으로부터 외삼촌이 심장마비 사인으로 고독사 하셨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외삼촌은 부모님의 이혼 문제로 어린 시절 유치원부터 초등학교까지 6년 동안 나를 아빠처럼 키워주셨던 분이다. 코로나가 정말 심각했고 직장 때문에도 한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 소식을 알릴 수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출근해서 일을 해야 했고, 이 시기, 평소 말버릇이 험한 동료 매니저가 매장을 도와주러 일찍 출근한 날, 나를 앞에 두고 '인간은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때 모든 게 터져버린 것 같다. 그날 퇴근하고 술을 마시며 가족, 친구, 지인들에게 쓰는 5장짜리 유서를 적었다. 그 후로 계속 술을 마시며 술에 취해 울다 잠들거나, 자해의 초기 증상까지 보이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정말 비정상적인, 위험한 상태였다. 그러다 술에 취해있던 어느 날 밤, 죽으려고 시도하고 있는 나를 내가 보게 됐다. 그 행동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내가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만, 끝도 없는 우울감의 싶은 호수 속으로 빠져 계속 아래로, 아래로, 하강하다가 갑자기 바닥과 충돌하고 정신이 번쩍 든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이건 내가 아닌데..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와 같은 의문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떤 책에서 본 정보에 의하면 사람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는 본능적으로 어딘가에 숨겨져 있던 초인적인 힘이 솟아오른다는데, (예를 들면, 멧돼지에게 쫓길 때 더 빨리 달릴 수 있다거나) 이 날을 계기로 내 몸안에서, 나의 무의식 어딘가에서 '이대로는 위험하다. 내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았던 걸까. 열지 말라는 상자를 열어서 그 안의 온갖 재앙과 고통이 끝도 없이 흘러나왔고, 그 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한 가지, 작은 희망이 보이게 된 것 같다. 그것을 잡아보기로 했다.
2020년 하반기 - 작은 변화의 시작-
물론 그런 생각만으로 쉽게 내가 바로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 날의 깨우침을 통해, 정신이 들고, 변화하고 싶다는 내면의 마음이 풀린 것 같았다. 캐나다에 온 후 처음으로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구매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순간에 항상 옆에 있어줬던 것은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분명 책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정말 예전부터 관심은 있었지만 마음이 안가 시도해본 적이 없었던 명상과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우울증에 명상이 큰 도움이 된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없는 책이지만 영어 원서명이 'JUST SIT'. 그냥 앉아라.라는 직설적인 제목의 책으로, 명상을 소개하는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었다.
이 책을 시작으로 다른 많은 변화가 내 인생을 바꿔주었다. 이 책이 특별히 좋았던 건 아니다. 재고가 많이 남은 책들을 할인해서 판매하는 온라인 서점에서 구매한 책이었고, 한국에도 명상을 소개하는 좋은 책은 아주 많이 있다. 책이 주는 메시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명확했다. 그냥 앉아서 명상하라. 책에서 말하는 명상의 효과들을 읽으며 이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단지 하루에 10분만 앉아있으면 되는 일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명상을 시작해볼 기분이 들었다.
아직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지배되고 있는 나였어도 시작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앉아서 숨을 쉰다. 숨에 집중한다. 그게 전부였다. 1분, 3분, 5분 그리고 10분으로 시간을 늘렸다. 이때부터 시작한 명상은 내 삶을 천천히, 조금씩, 하지만 놀랄 정도로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다.
그렇게 하루 10분-30분 정도의 명상 시간을 가지며 생활한 3개월 정도의 시간 동안, 내 삶에 조금씩 작은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작은 변화들]
- 집 근처 도보 10분 거리에 좋은 공원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쉬는 날에 담요와 책 한 권을 들고 공원으로 가 책을 읽거나 명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 1년 넘게 안 가던 미용실을 가서 길고 지저분한 머리를 단발로 잘랐다.
-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 독서를 시작했고 읽고 싶은 책이 점점 생기기 시작했다.
- 집에서 음악을 틀어놓거나 출퇴근 시간에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 친구들을 좀 더 자주 만나고 소리 내어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됐다.
- 하루 10분 요가를 시작했다.
- 일일 습관 정리표를 만들어 위와 같은 행동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혹독한 겨울 날씨에 메마르고 차갑게 굳은 내 마음의 땅에 따듯한 봄의 기운이 서서히 올라오면서 희망이라는 새싹이 조금씩 다시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2020년 하반기 - 또 다른 시련, 다른 반응 -
그렇게 모든 게 순조롭게 조금씩 변해가던 어느 날, 11월 늦자락에 친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친아빠에 대한 내 기억은 어린 시절밖에 없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아빠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었고 그래서 아직도 그 어린 시절의 아빠와 관련된 기억이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하지만 아빠는 정신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는 분이었다. 집착, 폭력, 분노조절 등으로 엄마와 나의 형제들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결국 엄마와 아빠는 이혼을 하셨고, 그랬기에 나는 갑자기 영문도 모르고 떨어져 살게 된 아빠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을 항상 가지고 살고 있었다. 친아빠는 엄마나 외가 가족들 앞에서 터부시 되는 단어가 됐다. 그렇게 친아빠는 나에게 큰 상처로, 트라우마적인 존재로 남게 됐었다.
그런 친아빠의 소식이 들렸고... 아주 오랜 시간 볼 수는 없었어도, 마지막으로 나의 유일한 아빠가 세상을 떠나시는 그 마지막 순간만큼은 꼭 함께하고 싶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봤다. 하지만 캐나다 영주권 초청을 받아 승인 대기 중인 상태인 데다 취업비자 만료일이 얼마 남지 않아 캐나다를 떠나면 직장을 포기해야 했고, 캐나다 재입국도 불가능한 비자 상태여서, 캐나다 이민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하나뿐인 친아빠의 장례식을 참석할 수 없었다. 외삼촌이 돌아가신 지도 얼마 안 됐을 때, 이런 소식을 겪게 되어 다시 절망이 찾아왔다. 나는 다시 한번 혼자 슬픔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2021년을 앞두고 - 또 다른 시련, 다른 결과 -
아빠의 소식은 출근하던 중 듣게 되었다. 출근길에 눈물이 도저히 멈추지 않았고, 그럼에도 출근하려 한 나를 레스토랑에서 처음으로 집에 돌려보내 주었다. 물론 그다음 날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출근을 해야 했지만. 어찌 됐건 첫째 날은 다음날 출근 시간 전까지 심적으로 너무 힘든 시간이 됐다. 결국 장례식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지도 못했고.
하지만 몇 개월 전 삼촌이 돌아가셨을 때의 나와 이 시점의 나는 비슷한 상황을 좀 더 다르게 받아들였다. 첫째 날은 아빠를 생각하고 생각하며 술을 몇 잔 기울였지만, 지난번처럼 술에 빠지지 않았다. 명상을 하거나 동네를 산책하며 마음을 추스르려 노력했다. 다음날 다행히 무사히 일을 할 수 있었다. 물론 너무 큰 슬픔은 계속 마음속에 있었지만, 이 슬픔을 받아들여야 할 나의 정신이 예전보다 건강해져 있음을 느꼈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시작된 내 안의 작은 변화들이,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을 준 것 같았다. 삼촌이 돌아가셨을 때보다 나는 좀 더 지혜롭게 상황을 바라보게 됐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정확히 1주일 후, 여느 때처럼 출근길에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중, 이민 서류 접수를 도와주시던 법무사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 축하해요. 오늘부터 캐나다인입니다. 오늘은 '캐네디언 맥주'(캐나다 맥주 브랜드 이름) 하나 사서 시원하게 들이켜세요. 고생했어요. "
그렇게 나는 캐나다 영주권자가 되었다. 일주일만 빨리 결과가 나왔더라면, 아빠를 보러 갈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나는 이것을 세상을 떠나신 아빠가 내게 주고 간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다음에 나는 다시 한번 더 함께 있을 때 지켜봐야 했던 새아빠의 죽음이라는 더 큰 일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시간을 보내며, 마지막에 느낀 그 작은 변화를 체감한 후 나는 본격적으로 다시 인생을 열심히 살아보기로 결정했다. 우선 너무 약해진 정신과 마음을 치유시키는 게 중요했고, 그렇게 나의 2021년 '마음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그 이후 지금의 나는? 내가 원했던 사람다운 삶, (마음이) 여유로운 삶을 즐겁게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본의 아니게 길어진 이 긴 이야기를 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의 한 구절로 마무리 지으려 한다.
" If you hide from the sun for years and then choose to come out of your darkness, the sun would still be shining as if you had never left. Head up and look at the sun. "
만약 당신이 수년간 태양을 피해
당신만의 그 어둠 안에 숨어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오기로 결정한대도
태양은 당신이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빛나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고개를 들고 태양을 보세요.
- The untethered soul by Michael Alan Singer (번역본 : 상처받지 않는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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