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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토리 Sep 11. 2023

3. 어쩌다 최면치료

각자의 시련은 어떤 말로 정의 내릴 수 있을까? 


금요일 저녁, 주말 내내 친정에 아이를 맡기기 위해 수원 엄마네로 갔다. 아이 짐을 주섬주섬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서 TV를 잠시 보았다. 한 예능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재밌는 장면에서 가족 모두가 깔깔 웃었다. 나도 분명 재밌는 장면을 함께 보고 있었는데... 억지로라도 웃어보려 했지만 웃음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나에게 이번 시련은 이런 것과 비슷했다. 모두가 웃을 때 혼자만 웃지 못하는 내 상황을 마주하는 것. 그리고 이것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 마치 지구에 떨어진 외계인이 지구인 말을 혼자만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그런 상황과 같다.   




소화불량이라는 키워드가 보이기만 하면 뭐든 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최면치료'를 알게 되었다. 소화불량을 극복했다는 단 한 개의 온라인 후기만을 보고 당장 연락해서 치료를 해보기로 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미국 심리학회가 인정한 최면 심리상담센터라고 하는 말에 더욱 현혹되었다.  


최면은 무의식 기억 탐색을 통해 몸의 증상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을 파악할 수 있는 치료기법이라고 설명을 들었다. '근본 원인'을 알 수 있다는 말에 기대감이 생기기도 했다. 심리상담 박사님과 초기 상담하면서 다소 어렵게도 느껴졌지만 '최면이라는 몰입을 통해 내가 인지하지 못한 과거의 상황과 감정을 세밀하게 들여다 봄으로써 현재 갖고 있는 몸의 불편함(증상)을 소거하는 것' 정도로 이해했다. 상담 후에는 낯선 치료방법에 두려움과 기대를 동시에 느꼈다. 


최면치료는 10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매 회마다 1시간 반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상담실 의자에 편안히 앉아 숫자를 세며 서서히 최면에 빠지는 작업을 했다. 어릴 적 한동안 최면이 등장하는 TV 프로그램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다. '레드썬'하며 최면에 빠지는 연예인들을 브라운관으로 자주 보았는데 참으로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걸 내가 해본다니 이상한 기분도 들었다. 


현실 최면치료에서는 '레드썬'하면 바로 최면에 빠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쉽사리 최면에 들지 못한 적도 많았다. 한 시간 반 가량 열심히 노력하시는데도 최면에 들지 않는 날엔 마음 깊은 속에서부터 떠오르는 생각과 단어 정도 말하는 것으로 치료가 종료된 적도 있었다. 생경한 상황들의 연속이었다. 현실에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과 감정을 마주하기도 했다. 마지막 치료는 엄마의 자궁 속 깊은 곳까지 여행을 갔다 온 것 같은데 글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느 날은 마음속 무대를 만들고 가장 미워하고 싫은 사람을 그 무대 위로 초대하는 일을 했다. 누군가를 굉장히 싫어하거나 미워하며 산적은 없었는데 무대 위에 앉힐 사람을 고르느라 한참이나 시간을 썼다. 비교적 무난한 인간관계를 살아온 나로서는 싫어하는 상대는 가정을 버린 아빠밖에 없겠다는 이상한 논리를 펼치고 있었다. 


이미 아빠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20대 때에 떨쳐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운 마음도 솔직히 이제는 들지 않았다. 굳이 감정상태를 표현하자면 무(無) 감정이랄까. 정해진 시간 내에 진행되는 치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결국 아빠를 소환하고 말았다. 그 외 다른 사람은 떠오르지 않았다.   


박사님은 커다란 쿠션을 내 옆에 끼고,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한 다음 미움의 무게만큼 주먹으로 쿠션을 있는 힘껏 치라고 지시했다. 내가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먹으로 쿠션을 내리칠 때 느껴지는 마음의 크기를 숫자로 이야기했고, 시간이 지나고 쏟아내는 내 감정에 따라 그 숫자는 점차 작아졌다. 주먹이 얼얼했다. 끝나고 보니 한바탕 울어재낀 사람처럼 기진맥진해 있었다. 박사님이 휴지를 건네주셔서 보니 눈물범벅이 되어있었다. 어떤 사람을 떠올리며 이야기할 때 여전히 눈물이 난다는 것은 미처리된 잔여 감정이라고 누군가 내게 말해준 기억이 떠올랐다.      


최면치료를 하는 기간에는 한동안 잊고 살았던 나의 어린 모습이 무시로 떠오르곤 했다. 좋았던 기억은 떠오르지 않고 왜 이렇게 불안하고 외로웠던 순간들만 떠오르는 건지. 홀로인 것만 같은 쓸쓸한 기분, 머리카락을 심하게 뽑아 탈모를 걱정할 만큼의 설명 불가한 어지러운 마음. 늘 나를 부정하고 포장하며 살아내는 억울한 감정들만이 불쑥 찾아와 상담 후 집에 오는 길엔 눈물이 차오르는 날이 많았다. 내 감정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추후에 알게 되었다. 


좋은 감정은 '보상 회로'를 통해서 저장되고, 나쁜 감정은 '공포 회로'를 통해서 기록된다는 것을. 뇌는 '생존지향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에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장기기억을 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는데 이는 '감정'과 매우 연관이 높다고 한다. 감정이 강하게 실리는 정보는 중요한 정보로 인식 처리해서 오래 저장해야 하는 위치로 가게 된다고. 불행한 기억이 행복한 기억보다 오래 남는 것은 결국 '생존'하기 위해서이다. (by 심리상담가 박상미 교수)


부정적 감정이 이토록 오래 기억되고 무의식에서 조차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유는 내가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존을 위해 좋지 않은 기억을 굳이 오래 품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뇌라니 조금 씁쓸할 따름이다.   


최면치료를 하면서 그간 묻어두었던 생각과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감정과 마주하니 일방적인 구타를 당한 느낌마저 들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건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기질과 성격도 큰 몫을 했다는 생각도 스쳤다. 


그렇다면 나는 불행한 현실을 왜 표현하지 않고 살았을까. 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뭐든 쿨하게 괜찮은 척해야 마음이 더 편했을까. 아마도 그건 내가 불행해지지 않으려고 애써 만든 '나를 지키는 방법'인 듯했다.  




박사님은 상담하며 어릴 적 가정환경이 지금 내 건강을 위협하는 분명한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살을 뚫고 혈관까지 침투할 정도로 그 중요성이 아프게 전해지는 듯했다. 취업을 할 때 썼던 수많은 자소서에는 가정환경을 묻는 항목이 늘 맨 위에 등장했다. 그래도 엄마 덕분에 꽤 괜찮은 어른으로 자랐다고 자부하던 나는 '취업하는데 뭘 이런 걸 물어' 하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대충 끄적여댔다. 그 속엔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어른처럼 보이게끔 꾸며 썼던 가짜 내 인생이 들어있었다.  


이미 알 것 다 아는 나에게 당신의 내연녀를 소개하고, 나를 자기 딸이라고 당당히 소개하는 그에게 이게 무슨 짓이냐고 미친년처럼 소리라도 좀 질러볼걸 하는 생각이 든다. 어른들 눈치 보며 제 소리도 내지 못했던 내가 마음속 감정을 '단어'로는 뱉지 못해도 '소리'로라도 표현을 했더라면 켜켜이 쌓였던 불편한 마음은 한결 덜했을까. 입 밖으로 불편한 말을 꺼내면 더 큰 불행이 닥칠까 봐 무서웠다. 내 감정 나만 무시해 버리면 더 큰 갈등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불안한 하루를 살아내는 것 자체가 아홉 살 아이에게는 이미 큰 갈등이었으니까. 


행복한 가정에서 자기감정을 잘 표현하며 성장한 사람이 있다면 분명 행운을 거머쥔 사람일 것이다. 이런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반면 멀리서 보기에는 부러우리만큼 행운을 거머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막상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속사정과 시련들로 인해 깊은 감정은 꽁꽁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힘든 감정을 표현하는 순간 그것이 페널티가 되어 인생의 마이너스 점수를 받을 것만 같고, 마치 독화살이 되어 또 다른 시련으로 되돌려 받을 것 같은 불쾌한 느낌에 꽁꽁 감추는걸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과거의 나처럼.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인 이제는 알게 되었다. 묵혀둔 부정적인 감정은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선연한 색으로 살아난다는 것을. 오래 숙성시킬수록 그 감정은 더욱 불쾌해져 결국 몸 안에서 어떻게 해서든 부패한다는 것을.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부패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함정일 뿐. 

 



최면치료를 통해 극심한 온갖 통증과 소화불량이 개선되었다는 긍정적인 결론을 쓰고 싶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았기에 마무리가 해피엔딩은 아니다. 이번에도 좋아질 수 있는 희망을 품고 시작을 했지만 궁극적인 도움은 받지 못했다. 중간중간 속이 좀 편했다는 것 정도에 그쳤다. 속이 좀 편해짐을 느낄 때에는 신이 나서 남편과 아들과 외식을 바로 시도하기도 했다. 이 음식들이 내 안에서 소화되면 '나는 원래부터 외계인이 아니었노라'라고 태연하게 주장하며 함께 어울려 박장대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얻은 것이 있다면 첫째, 내 안에 어릴 적 아빠에 대해 미처 다 풀지 못한 감정의 실타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고, 둘째, 내 지독한 소화불량이 결코 음식과 위장의 문제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서게 된 것이다. 내가 소화시키지 못하는 음식들은 어쩌면 과거에 소화하지 못한 감정의 응어리들은 아닐까. 이제라도 발견한 실타래를 제대로 풀어야 내 증상이 개선이 될 것 같은 느낌이라 오히려 숙제가 생겨버린 기분이었다. 


<3편 끝.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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