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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토리 Sep 14. 2023

4. 비정상인이 되는 행운

몸이 아플 때 병명을 빨리 찾는 건 행운이자 축복이다.




대한민국 성인 평균보다 조금 큰 키인 나는 몸무게가 30kg 중반을 향해가고 있었다. 엉덩이에 뾰족하게 드러난 내 뼈들이 남은 나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무리였기에 병원 갈 때도 늘 방석을 들고 다녔다. 체력이 너무 힘든 날엔 가까운 병원을 찾아 수액을 맞으며 버텼다. 갓 두 돌 넘은 아이를 아파트 옆동 어린이집 등하원 시키는 것이 버거워지자 친정엄마가 주중에 오셔서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대신해 주셨다. 한평생 고생만 한 엄마에게 효도는 못할 망정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 너무 죄스러웠지만 그래도 엄마가 있어서 너무 다행이고 감사했다.


월경이 끊겼다. 의사는 30대 중반인 나에게 조심스레 조기 폐경 경고를 내렸다. 병원에서 호르몬 주사 치료를 서둘러 하자는 권고에 나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나왔다. 월경의 중단 원인이 호르몬 문제가 아닌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임을 알았기에.  


오랜 시간 잘 먹지 못해서 생기는 식욕이 무서웠다. 예전에 장난스럽게 '배고파서 눈 돌아갈 지경이야'라고 했던 말이 무엇인지 수십 번 체험했다. 눈이 돌아가면 일단 음식을 입안에 욱여넣고 본다. 그러나 이내 느낄 통증과 숨쉬기 어려운 고통이 무서워 맛만 보고 뱉어버리기도 수십 번. 시간이 지나면서 음식에 대한 공포심이 늘어나 먹고 싶은 욕구와 이를 거부하는 내 몸이 상충하며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불안증이 생겼다. 


최선을 다해야 하는 하루가 아닌, 온 힘을 다해 버텨야 하는 연속된 하루에 지쳐갔다.




미미하지만 약간의 효과를 보았던 최면치료를 더 해볼까도 고민해 보았지만 몸과 마음이 예민해져 있어서 그런지 최면에 온전히 빠지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비용 또한 만만찮았다. 가족들에게 최면치료 결과를 어느 정도 설명을 했음에도 크게 신뢰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다른 해결책을 시도해야겠다고 생각은 들지만 한편으로는 막막했다. 이제 누구를 찾아가야 할지, 어떤 치료를 시도해야 할지 무기력해져 가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먹고 소화시킬 생각을 해야지! 침이라도 계속 맞던가"


남편은 내가 회복되기 위해 단 하루라도 빼놓지 않고, 부단히 또 무언가를 하길 바랐다. 나 대신 엄마 노릇까지 수고해 주는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지만, 내 상황을 아무리 설명해도 이런 말 한마디에 서운한 감정이 불쑥 올라온다.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는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면서 이해하기는커녕 한심하게만 보는 것만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친정엄마 역시 불안감이 점점 커져 더욱 예민해지셨다. 각각 거실과 방에 있으면서 매일 소화에 도움 되는 운동, 약 등 관련 정보와 영상을 메신저로 수시로 보내면서 최선을 다해 이행하라고 독촉했다. 그 모든 것들이 처음에는 고마움이었지만 점차 부담으로 다가왔고, 무시하고 싶어지기까지 했다.




소화기 내과는 더 이상 안 간다는 나의 고집이 가족들을 더욱 힘들게 만든 건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위산제와 소화제는 먹지 않는 나의 모습에 남편은 실망했고 불안한 모습이 역력했다. 다행인 건 소화제와 위산제는 거부했어도 우울증 약과 수면제는 삼켰다.  


"우리나라 최고 대학병원인데 어떻게 해서든 고쳐 놓겠지."


무기력한 내 모습을 보고 엄마와 남편이 상의 끝에 나눈 말이다. 우리나라 최고라 자부하는 대학병원에서 필요한 모든 검사를 해보기로 가족들이 결정했다. 나는 소화불량이 더 이상 음식과 내 위장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검사받는 것조차 거부하다가는 가족들이 스트레스받아 나로 인해 더 큰 병이 생길 것 같아 대학병원에 가기로 했다.


이번에 내가 대학병원에 가는 목적은 하나였다. 검사상 아무 이상이 없는 정상의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가족들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아울러 더 이상은 소화제 위산제 주는 병원을 가라고 재촉하지 말아 달라는 나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그렇게 대학병원에서 여러 검사가 진행되었다. 가족들이 진료를 원한 곳은 소화기 내과였기에 해당 과에서 진료와 검사를 했다. 또다시 내시경과 CT검사 등 기본적 검사와 '핵의학 위배출 영상검사'를 했다.   

 

<핵의학 위배출 영상검사>

99 mTc이 표지 된 고형식(solid food)이나 유동식(liquid)을 먹고, 식도괄약근을 거쳐 위 내에 들어온 음식물의 위 배출 시간을 측정하는 검사이며, 당뇨병성 위 무력증이나 위 절제술 후 위의 연동운동 장애가 있는 경우 질환의 진단 및 치료 효과 추적에 도움이 됨.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쉽게 말해 방사능 성분이 소량 담긴 계란 샌드위치와 물을 먹고 일정시간마다 복부를 촬영하여 샌드위치의 이동경로를 살피며 소화되는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다. 검사를 위해 먹는 방사능 샌드위치가 너무 맛있어서 아껴먹고 싶을 정도였다.


약 3주에 걸쳐 각종 검사를 진행하고 최종 결과를 들으러 간 날 역시 예상대로 나는 수치상 큰 문제없는 '정상인'이었다. 다만 핵의학 위배출 검사에서 40% 정도 위무력증이 보인다고. 그렇다고 특별히 해줄 수 있는 건 없다고 했다. 기능성 소화불량에 먹는 위운동 촉진제, 소화제와 위산제 등 내가 이미 알고 먹어보았던 약들을 대량으로 처방해 주는 것뿐이었다. 


가족들은 결과를 듣고 적잖게 놀랐다. 놀란 이유 첫 번째는 의사의 무성의한 답변 때문이다. 의사와 3분 카레 같은 식의 짧은 대면과 결과를 상세히 설명해주지도 않는 불친절한 모습에 실망한 기색이 보였다. 병원을 꽤 다녀본 나는 본디 대학병원은 위중한 질병의 환자를 위한 곳이기 때문에 의사와 길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도, 양방 병원이기에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 곳도 아닌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 실망하진 않았다.


두 번째는 '왜 멀쩡하지?' 문제가 없다는 말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고쳐 줄 것이라는 가족들의 희망이 날아가 버린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최고 대학병원에서도 해결책을 찾지 못했으므로 절망에 빠진 듯 보였다. 또 다른 병원을 찾아야 한다는 것에 막막함을 느낀 듯 보였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정상인'이 되었다. 어차피 먹지도 않을 터라 약도 타오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지만 또 한 번 가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약을 한 아름 타서 집에 돌아왔다. 멀리 대학병원을 다니고 운동량이 많아진 탓에 몸무게는 더욱 줄었다. '이제 가족들이 소화기 내과를 가서 약을 타오라는 말은 하지 않겠지' 하는 작은 안도감이 들었다.




결과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 K의 이야기가 문득 생각났다. K는 어느 날 갑자기 허벅지 안쪽 살이 푹 파이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했다. 다리에 힘도 빠지고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둘 정도로 일상에 큰 지장을 받고 있었다. 무슨 병인가 싶어 여러 병원을 전전긍긍하면서 자궁문제다 신경전달물질 문제다 등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온갖 약을 먹어댔다. 약 부작용이 걱정될 만큼 오랜 기간 방황하며 힘든 시기를 보내며 마음고생을 했었다.


'무슨 병인지 빨리 알게 되는 건 진짜 행운인 것 같아.'


K가 말한 행운의 의미를 크게 느끼면서 반응은 해주지 못했다. 그저 이런저런 고생을 하고 있구나 정도 상황을 알아주는 것만 해줄 수 있을 뿐이었다. K는 종국에 행운을 얻었다. 철분을 한 동안 먹고서는 나았다는 이야기. 결론이 맹숭맹숭하거나 알고 보니 앞에서 펼쳐진 이야기가 현실이 아닌 꿈이었다느니 하는 허무한 인기드라마 보다도 더 힘 빠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나름의 행운을 얻은 K는 힘차보였다. 결국 수술을 해야 한다거나 더 센 약을 먹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다시 일상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건 행운이 맞았다.


정확한 병명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나도 나만의 행운을 간절히 바란다. 어쩌면 행운을 넘어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축복을 아플 때 병명 찾는 데 쓰기엔 조금 아깝고 억울할 수도 있겠다만 나는 감히 축복이라 이야기하고 싶다. 치료시기를 놓치지 않고 악화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으면. 사람답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야말로 축복이지 않은가.


그 축복은 어디 있을까. 있긴 있는 걸까. 닿고 있는 걸까. 나도 종국엔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 상태가 정상이지 않은 '비정상'인이 꼭 되고 싶다.

 

<4편 끝.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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