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토리 Sep 20. 2023

6. 비정상인의 희열

'자율신경실조증' 병명을 찾았다 찾았어. 

코흘리개 시절 서울랜드에서 엄마 아빠를 잃어버린 적이 있다. 다행히 오빠가 내 곁에 있었다. 나는 오빠 손만 잡고 따라다녔다. 한참을 여기저기 헤매다가 오빠는 우리 차가 주차한 위치를 찾아내어 차 앞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달이 뜰 때까지 엄마 아빠는 우릴 찾아다니다가 주차장으로 왔는데 거기서 우릴 만나게 되었다. 안내방송을 수차례 내보내도 못 찾았는데 포기할 즈음 만나게 되어 모두가 기쁨의 포옹을 나누며 눈물을 흘렸다. 


그날의 전체적인 기억은 흐릿하지만 부모님을 찾아 기쁘고 다행이라 느끼던 어린 내 감정들은 여전히 선명하다. 잃어버린 엄마를 찾은 것 마냥 뇌신경센터에서 기쁨의 희열을 느껴본 그날의 마음도 선연하게 남아있다.  




뇌신경센터에 가는 날 남편도 함께 내원했다. 만나본 의사 중에 가장 자신감이 넘치는 여자 의사였다. 병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 아픈 사람들이 많다. 각자 어떤 증상과 사연으로 이 병원을 찾았을지. 대화는 나누지 않았지만 왠지 그들과 동병상련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했다.  


"소량의 음식을 소화도 못 시키고 숨도 쉬어지지 않고, 잠도 잘 못 자요. 먹질 못하니 우울증도 심해졌어요."


"검사 몇 가지 해보고 다시 얘기합시다. 그리고 제 진료를 보러 들어오면 무조건 핸드폰 녹음 켜세요."


자신 있는 의사 모습에 왠지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몇 가지 기본검사와 자율신경검사, 전정신경계검사를 했다. 자율신경검사는 상의를 속옷까지 탈의하고 민망함 속에서 만세를 하고 사진을 찍는다. 전정신경계검사는 안경 같은 장비를 쓰고 안구의 움직임을 확인하며 검사하는 것이다. 


결과는 잠시 후 바로 알려주니 너무 좋았다. 환우 입장에서는 기다리는 것이 익숙하면서도 참 힘든 일이다.  


"체했다고 느낀 다음날 병원에 왔으면 이렇게 심해지지 않았을 텐데... 우선 오늘 당장 입원치료 합시다. 자율신경실조증이에요. 자율신경 검사 사진을 보면 그동안 혈액 자체가 위장으로 가질 않고 있었다고 보면 돼요. 그러니 소화가 될 리가 없었겠죠. 본인 편두통도 심한데 그건 알고 있었어요? 


이 병은 뭐 하나 해서 금방 좋아지는 병이 아니에요. 절대 그럴 수가 없어요. 자율신경실조증이라는 약도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에요. 개인 증상별로 약을 처방받아먹어야 하고요. 우선 입원치료 할 거고 횡격막도 많이 불편하니 호흡에 대한 재활치료도 할 거예요. 약은 신경계약을 쓸 겁니다. 정신의학과 약을 비롯해서 기존에 먹던 약 모두 중지하세요." 


"근데 서.. 선생님, 저 우울증이 좀 심한 편인데 정신과 약을 끊어도 정말 괜찮은 건가요?"


"몸이 아파서 우울한 거지, 몸이 안 아프면 안 우울해질 거잖아요?" 


와... 카리스마에 압도되는 동시에 한줄기 빛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병명을 찾은 것인가!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끊으면 잠을 못 잘까 봐 그리고 서서히 단약 하지 않고 급작스레 끊었을 때 오는 부작용은 없을까 두려웠지만 의사를 믿고 과감히 끊어보기로 했다. 잠 잘잘 수 있는 약을 준다기에 안심했다. 


의사는 내가 왜 이렇게 까지 아프게 되었는지 내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서 말해주었다. 밤낮이 바뀌는 걸 못 버티는 신경인데 한 동안 에너지를 너무 쓴 거라고. 가장 최근에는 육아하며 에너지를 모두 써버리면서 만성화가 된 것이고 그로 인해 자율신경 밸런스가 깨져 위장과 수면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너무 속 시원한 답을 듣고 약간의 희열을 느꼈다. 방향을 찾았다는 것도 기쁜데 내가 왜 이렇게 까지 아프게 된 건지 이유도 상세히 설명해 주니 앞으로 어떻게 회복을 할지에 대한 가이드를 받은 것 같아 설레기까지 했다. 


자율신경계는 본인이 의식하고 조절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 작동하는 체내 신경계를 말한다.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균형을 유지해야 호흡이나 호르몬 분비, 체온 조절, 소화, 배설 등 인체의 많은 세포와 기관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자율신경실조증은 가슴통증, 호흡곤란, 빈맥(가슴 두근거림), 식욕부진, 수족냉증, 입마름, 두통 어지럼증, 잦은 흥분 또는 우울감, 불면, 만성피로, 상열감(얼굴에 열이 몰리는 증상) 등 증상이 다양하고 개인마다 나타나는 형태도 제각각인 매우 지랄 맞은 질병임. 




빠르게 입원수속을 마치고 10일간의 입원에 들어갔다. 호흡재활을 하고 의사 진료를 보느라 건물을 오가고, 때맞춰 나오는 밥 먹으랴 식후 제자리걸음 운동 미션을 받아 운동하랴 아주 바쁘게 하루를 보냈다. 


의사가 굳이 녹음까지 시키는 이유는 내 몸상태와 신경에 대해 공부하라는 의미였다. 이때부터 자율신경에 관해 나름 공부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좌뇌형 인간인지라 의사에게 내 병에 관한 '왜'를 자주 물었더니 제발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 좀 쳐내라 다그쳤다. 뇌신경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니 멍 때리는 시간 늘리라고. 많이 멍 때려야 이 병 빨리 낫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자율신경실조증 환자에게는 기본적으로 온도와 습도가 중요하다. 몸의 신경은 날씨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자율신경 균형이 깨진 사람들은 이것을 잘 맞춰주어야 신경들도 비교적 편안해진다. 온도 24도, 습도 45% 정도를 유지하려고 했다. 음식은 가릴 필요 없다고도 했다. 




그동안 정신과 약을 먹지 않으면 몇 날밤을 꼬박 새울 수 있을 정도로 잠을 못 잤는데, 의사가 준 신경계약을 먹으니 잠도 어느 정도 잤다. 의사는 내가 그동안 세게 먹었던 정신과 약보다 훨씬 약한 약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입원하자마자 뇌혈류를 좋게 해 주는 수액을 매일 맞았다. 보험 적용이 안되어서 한번 맞을 때마다 10만 원씩 하는 고약하게 비싼 약이다. 근데 신기하다. 이 주사를 맞고 있으니 소화가 좀 된다. 입맛이 없어서 안 먹은 게 아니라 먹고 싶어 죽겠는데 몸이 받아주지 않아서 몇 달을 굶주리다시피 한 나는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붙은 사람처럼 계속 먹을 생각만 했다. 


병원에서 주는 밥 외에 다른 음식은 먹지 말라고 했지만, 몰래 편의점에 가서 온갖 초코 맛의 쿠키와 도넛들을 사 왔다. 한꺼번에 사 오기는 힘들어서 여러 번 몰래 가서 사 왔다. 간식 못 먹게 하는 엄마 밑에 자라는 아이의 마음이 이런 걸까. 과자를 고르고 결제를 하는데 맛있게 먹을 생각에 들떠있기까지 했다. 공포감이 밀려오기도 했지만 뇌혈류 수액을 맞고 있고 신경계약이 있으니 천군마마를 등에 업은 든든한 느낌이었다. 몇 달 동안 소화가 잘 된다는 음식만 먹어도 그렇게 소화가 안되었는데 이렇게 초콜릿 쿠키를 먹어도 된다니... 결코 음식 문제가 아니었다. 


남편한테 병원에서의 일탈 이야기를 꺼냈더니 강남의 쌀빵 맛집을 찾아 빵을 한 아름 사 왔다. 나름 소화 잘 되라고 쌀빵으로 사 온 기특하고 고마운 마음. 며칠 만에 본 남편 얼굴도 한층 밝아있었다. 남편은 병상 커튼을 쳐주고 나는 빵을 먹어치웠다. 손발이 잘 맞았다. 자려고 누우면 캐비닛에 넣어둔 남은 빵이 생각나서 비닐을 뽀시락거리며 한입 두 입 먹었다. 


퇴원하고 나올 때 나는 2kg 정도 살이 쪄서 나왔다. 




그동안 식후에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이 단순 공황장애 증상인 줄만 알았다. 나도 공황장애까지 왔구나 하고 넘겼다. 자율신경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이내 알게 되었다. 나는 공황장애가 아니었다는 것을. 


공황장애는 일상 중 갑자기 극단적인 불안증상이 나타나는 질환이다. 단순한 불안감 정도가 아니라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끼거나 죽음이 다가온 것 같은 공포심을 유발하는 것이 특징이다. 알고 보니 공황장애는 한번 증상이 발현되면 10분 이내에 증상이 최고조에 다다르고 보통 30분가량 지속된다고 한다. 그러나 자율신경 불균형으로 인해 호흡 문제가 있는 사람은 증상이 극심하지는 않으나 지속적으로 자주 발생한다는 점이다. 




자율신경실조증이란 병명을 얻어 드디어 '비정상'인이 되는 행운을 얻었다. 



<6편 끝.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물 한 모금도 소화가 되지 않았던 근거를 찾은 날!!  예쁜 핑크가 전혀 보이지 않는 나는 비정상인이다. 아~ 너무 기쁘다. 


이전 05화 5. '자살' 생각하고 있으신 거예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