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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토리 Sep 18. 2023

5. '자살' 생각하고 있으신 거예요?

글을 쓰다 보면 글뭉터기를 지울 일은 허다하다. 다시 읽어볼 속셈으로 마우스 커서를 앞에 가져와 놓고서는 마음에 들지 않아 delete를 누르며 내용을 수정하곤 한다. 버튼을 연달아 꾹 누르면 쉽게 지워질 것을. 그날도 짜증스러운 마음을 표현하듯 타다다닥 분노의 delete를 치다가 그만 바로 옆에 있는 전원버튼을 눌러버렸다. 내가 사용하는 노트북은 delete와 전원버튼이 나란히 붙어있다. 오만상을 지으며 '악' 소리를 지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땐 밤마다 아이크림으로 다림질해 놓은 주름들 마저 한숨 쉬는 기분이랄까.   


'아 저장 안 했는데...'


먼저 저장강박이 생기는 미생시절 회사에서 여러 문서 날려본 화려한 경력 때문인지 모니터가 까매진 걸 보면 식은땀부터 난다. 아니 안전하게 누르라고 backspace 버튼 길게 만들어 놓았잖아!! 자책하며 떨리는 손으로 다시 전원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저장강박 덕분에 중간 저장을 착실히 해놓아서 쓴 글 전부 잃지는 않았다.


내 인생에도 삶의 전원버튼이 잘못 눌려 모든 것이 잠시 깜깜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어느 날 종교도 없는 나는 신에게 원망의 말이라도 쏟아낼 속셈으로 무작정 집 근처 성당을 찾아갔다. 성당으로 간 이유는 집 바로 앞이라 가까웠고, 친한 친구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성당 이야기를 자주 들어 나름 친숙하다고 느낀 공간이기 때문이다.


평일이라 조용한 예배당을 생각했는데 찾아간 예배당은 마침 미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검정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뒤쪽에 조용히 앉았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사람들이 나가서 줄을 서길래 아무 생각 없이 따라나섰다. 신에게 따지려고 왔으면서 미사 절차는 왜 그리 성실히 따라가고 있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갔던 그날. 당당히 줄을 섰던 나에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저기... 신자... 아니시지요?"

"네...... 신자가 아니면 미사 참여할 수 없나요?"

"미사는 드릴 수 있지만 영성체는 모실 수 없어요."

"아 네... 죄송합니다."


당연히 영성체가 뭔지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성당에서는 매일 미사를 드리면서 하느님의 몸을 모시는 영성체라는 걸 한다. 동그란 모양으로 생긴 밀떡을 두 손 모아 받아서 경건히 먹는 것으로 매우 신성한 종교적 의미를 담은 행위이다. 천주교는 교리 공부를 한 후 신부님 세례를 받아야 신자가 될 수 있고, 신자가 된 후 비로소 영성체를 모실 수가 있는 것이다.


신성한 미사시간에 이방인이 들어와 망치려고 했다는 미안함이 밀려오면서 미사가 끝난 후 오래 앉아있지 못하고 자리를 일어났다.


제발 살게 해 주세요. 살 수만 있게...

원망은커녕 짧은 기도만 하고 돌아왔다.

 



사람답지 못하게 사는 것이 원래 내 인생계획에 있는 일이었을까. 내 시련들은 미리 누군가 정해놓은 것일까. 10년 주기로 몸이 크게 아팠던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먹지 못하고 숨을 잘 못 쉬는 인간에겐 1분 1초가 지옥 같은 느낌이다. 그나마 숨을 유지하기 위해 먹는 극소량의 음식 앞에서 공포감이 밀려와 몸이 떨려오는 불안증이 심해지며 음식이 나를 집어삼킬 것 만 같은 두려움이 내 몸 곳곳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 모든 감각은 전력을 다해 삶의 반대편을 향하고 있었다.


'코로나에 걸려 죽으면(당시만 해도 나는 코로나가 큰 죽음의 공포로 다가왔기에) 내 가족들에게는 합법적인 죽음으로 기억되겠지?......' 하는 기발한 생각부터 '어디에서 죽으면 최대한 덜 피해를 주고 죽을 수 있을까?......' 하는 기특한 생각들이 끊임없이 내 안에서 부글거렸다.


핸드백을 하나 장만해야지 마음먹은 사람 눈엔 한동안 지나가는 여자들 핸드백만 눈에 들어온다. 삶을 이어나갈 용기가 바닥난 사람의 눈엔 모두 삶을 마무리하는 장소와 도구로만 느껴진다. 어디에서 뛰어내리기가 좋을지 장소를 탐색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우울증이 깊어졌고, 깊은 우울증은 위험한 생각이 자꾸만 떠오르게 만들었다.  




살자! 살자! 살아야지!

위야, 심장아 우리 살자.

아파봤자 통증이다.

어떻게 해서든 웃어보자.

나를 위해 가족을 위해 살아야지.

새집 이사 갈 때까지 만이라도 버텨보자.

좋은 날이 반드시 생길 거야.


나의 투병 일기장에는 긍정의 말들이 넘쳐났지만 어째 몸과 생각은 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 계획이란 걸 세우게 되었다.

2020년 8월 어느 주말, 아들과 남편이 서산 시댁에 가는 날, 새벽녘에 아파트 복도 난간에서 미련 없이 떨어지는 거야. 우리 집이 17층이니 19층 정도가 좋겠네. 중간에 어디 턱 하고 걸리진 않을까? 19층에 올라가 보니 난간이 좀 높았는데 발을 딛고 올라갈 만한 화분이 하나 보였다. 다행이다.

최대한 빨리 뒤처리가 될 수 있게 나임을 표시해 주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아, 너무 옛날 사진이라 안 쓰는 주민등록증이 있었지. 여기에 남편 핸드폰 번호를 적고 옷 주머니에 넣어 놓자. 비가 올 수도 있고 피에 젖으면 지워질 수 있으니 네임펜으로 두 번 정도 덧칠해야지.  


먹고 싶은 음식 배 터지게 먹어나보고 가자는 마음에 최후의 만찬으로 먹을 음식을 떠올려 보았다. 무슨 음식이 좋을까...? 그 순간 초콜릿 케이크가 떠오르며 너무 먹고 싶었다. 죽기 전 먹고 싶은 음식이 고작 케이크라니. 인간의 초라함이 느껴져 실소가 나왔다.  


남편과 아이와 인사하며 한참을 눈으로 예쁜 모습을 담으려 애썼다. 집안은 고요했다. 남편, 엄마, 오빠, 친한 친구 그리고 아직 글자를 읽지 못하는 내 아이에게도 유서라는 걸 적어 내려갔다. 초콜릿케이크를 먹고 새벽 3시, 19층으로 올라갔다. 예상대로 이 시간은 적막의 시간이었다. 다행히 나와 마주친 이는 없었다. 화분을 밟고 복도난간에 올라앉았다.


생각보다 큰 공포감에 호흡이 거칠어져 마시는 숨을 크게 마셔보려 해도 숨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엉덩이를 10 센티미터만 조만 내밀면 내 고통은 끝이 날터. 손에 힘을 주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내가 정말 이 손에 힘을 줘서 스스로를 밀어낼 수 있을까. 한참을 공포와 맞서다 결국 현실의 고통이 공포를 이기고 말았다. 이 와중에 어디선가 난간에 걸터앉은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누군가 신고하면 일이 꽤나 복잡해지겠다는 생각들이 일었다. 죽는 마당에도 참 생각 많은 인간이다.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살길을 잃어 그 반대편으로 가길 바라면서도 죽음 앞에 철저한 패배자가 되었다.


새벽 4시 반, 돌아와서 초콜릿 케이크를 마저 먹어치웠다.




현요아 작가의『나를 살리고 사랑하고』는 깊은 우울증으로 세상을 등진 동생의 일을 통해 남겨진 '자살 사별자'로서 삶을 어찌 살아가면 좋을지에 대한 가르침과 위안을 주는 책이다. 세상에 '남겨진 사람'의 감정이 어떤 건지 똑바로 줄 세워 정면으로 마주한 느낌을 받았다. 심장에 무거운 도끼를 꽂아 둔 채 스스로가 이름 모를 죄명에 갇혀 살아야 하는 시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를 겨우 애써 찾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시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자칫 남겨진 사람이 될 뻔한 내 가족들과 주변인들에게 얼마나 큰 죄를 저지를 뻔했는지 이제는 깊이 느낀다고 자백하고 싶다. 삶을 헤매고 있는 그 시간을 희미하게라도 지우고 싶은 마음에 삶의 종료버튼을 누르고 싶었던 것이라고. 그래도 '악'소리 크게 지르고 연이어 삶의 시작버튼을 다시 눌렀다고. 그리고 살아있다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고. 뻔뻔하게 핑계라도 대며 고해성사를 읊조리고 싶다.


시작버튼을 누르며 다시 삶을 이어가기로 마음먹은 후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정신이 좀 들기 시작했다. 초점 없이 흐리멍덩했던 눈꺼풀에 힘이 좀 들어갔다. 다시 해결책을 찾아 나서는 동력을 찾기 위한 대가라 생각하면 원통한 감정이 올라오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다시 살아볼 결심을 했다는 게 중요하고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두 번이나 더 난간에 앉았다. 내가 진짜 죽고 싶은 건가 한동안 물었다. 추후에 협상전문가 이종화 교수 강연을 들으며 죽음에 관해 몇 가지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자살과 죽음은 분리해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원해서 자살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상황을 끝내고 싶은 하나의 해결책으로 자살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결코 죽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은 듯했다.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자살'이라는 단어를 내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용기. 가족들과 가까운 사람도 나에게 '자살'생각할 만큼 고통스럽냐고 물어볼 용기. 모두 부재했다. 이종화 교수는 자살예방을 위해서 오히려 당사자에게 '자살'이라는 말을 끄집어내어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이야기를 해주고 마음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혹 누군가가 나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뛰어내리려고 한다거나 그런 조짐이 보인다면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꼭 물을 것이다.


"지금 고통스러워서 자살 생각하고 있으신 거예요?"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흐릿할지라도 어떤 신호를 계속 보낸다. 나 역시 한동안 사람 눈빛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걸 알아채서 마음에 담아둔 '자살'이라는 단어를 대신 꺼내어 말해주기를. 혹은 힘든 상황에 처한 가족 중에 '자살'이라는 말을 해도 그딴 소리 말라며 타박 주고 화내지 말고 자살을 생각할 만큼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알아주기를. 자살을 계획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재의 고통에서 빠져나올 하나의 해결책으로 생각하는 것뿐이라고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 

 



'조금 다른 시선으로 해결책을 찾아보자'라고 마음을 먹으면서 새로운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뇌신경센터... 나와 유사한 극심한 소화불량으로 시작된 증상들이 호전이 되었다는 사람. 전혀 효과가 없었다는 사람. 의견은 반반이었다. 호전된 사람이 있다고 하니 망설일 수 없었다. 바로 남편에게 이야기하고 당장 가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남편에게서 아주 오랜만에 기쁨과 희망이 깃든 생기 있는 표정을 보았다. 다시 살게 되었으니 어떻게든 살아내야지.


또다시 가보지 않은 길에 희망을 매달아 보기로 했다.


<5편 끝.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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