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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토리 Sep 07. 2023

2. 엄마도 아플 수 있어

남편은 꽤나 가정적인 사람이다. 회식이 잡혀있지 않으면 곧장 귀가해 나와 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주말에도 다른 무엇보다 가족과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따뜻한 사람이다. 스마트한 언변은 없지만 성실함과 책임감을 무기 삼아 진중하게 본인 삶을 잘 꾸려가고 있는 그런 남자다.   


우리는 몇 달 전, 걸음마를 이제 막 뗀 아들 써니와 함께 서울 N타워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연인들이나 해봄직한 자물쇠 이벤트를 하고 싶은 마음에 그 순간 떠오른 말을 함께 적고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우리 지금처럼 행복하게 해 주세요." 


집에 돌아와 저녁밥을 먹으며 남편은 내가 적은 말에 조금은 놀랐다고 이야기를 했다. 


"더 큰 행복을 바라지 않고 지금처럼 행복하게 해달라고 적는 것 보고 좀 놀랐어."

"그래? 우리 지금 별 탈 없이 행복하잖아."


진심이었다. 별 탈 없이 아이 낳고 도란도란 사는 내 모습에 만족했고, 그저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소박한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행복의 충만감 속에서 '극심한 소화불량'이 불러온 시련으로 몸과 영혼이 하루하루 야위어 가며 더는 현재의 행복을 느끼기가 어려워졌다.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몇몇 주변 사람들은 특별한 문제없어 보이는 우리 가정에 우환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소화가 안되고 힘들일이 없다고. 우환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우환으로 인해 내가 아픈 것이 아니라, 내가 아프면서 우환이 생겨났을 뿐이다. 




나는 불안도가 높은 사람이다. 불안을 떨칠 방어기제로 성실, 모범 따위의 것들을 자주 내세우기 때문에 꽤나 성실한 편이다. 어디서든 나의 몫은 해내야 속이 편한 그런 사람. 행복한 순간은 찾기 어려웠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을 쏟아보기로 했다. 몸속 내장들도 성실하게 훈련을 시켜본다.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절대 끼니도 거르지 않았다. 한 끼라도 거르는 순간 내 위장이 일하는 법을 전부 잊어버릴 까봐 어떻게 해서든 소량의 음식은 챙겨 먹었다. 


여러 소화기 내과에서 처방받은 소화제와 위산억제제는 2주 이상 먹어도 효과가 없었다. 위를 움직여 소화에 도움을 준다는 '기능성 소화불량' 환자를 위한 약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음식문제인가 싶어 유기농 식자재들로 구성한 식단을 짜서 하루 세끼를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먹어보았다. 인터넷을 뒤져 위장에 좋은 세상의 모든 것을 먹어서라도 소화를 시켜보고자 했다. 자몽씨 추출물, 베르베린, 바이오필름 분해제, 글루타민, 감초, 소화효소제 등 생전 처음 들어보는 건강보조제를 챙겨 먹었다. 보조제를 먹을 때 함께 마시는 물조차 소화가 어려웠다.  


한 동안 건강일지를 쓰며 증상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 저산증(소화에 필요한 위산이 결핍된 상태)을 의심하며 식초, 위산보조제를 먹어보기도 하고, 음식이 몸속에서 소화될 때 염분 부족으로 소화가 안될 수 있다는 말에 값 비싼 죽염도 사서 씹어먹고 죽염수를 마시기도 했다. 한의원 가서 소화기관 치료를 위한 침도 맞았다. 두 달을 매일 맞고 한약도 먹어보길 여러 차례. 몸은 반응하지 않았다. 


등산, 필라테스 운동도 몇 달 꾸준히 했다. 소화불량에 '자바라 운동(Javara처럼 팔을 하늘 향해 위로 들고 역기운동하듯 하는 운동)'을 추천하는 몇몇 사람들의 글을 보고 열심히 따라 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 수

록, 운동을 하면 할수록 나에게는 독이 되었다. 살이 점점 빠져 운동할 때 입는 레깅스마저 헐렁하게 되었다. 필라테스 강사로부터 더 이상 운동 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고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아는 언니의 친정엄마도 소화불량이 심하셨는데 정신의학과에서 약을 드시고 좋아지셨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안 그래도 우울증과 불면증이 생긴 터라 약의 도움이 필요했다. 증상의 정도를 다섯 가지로 표시하는 설문형식의 문진을 작성하고 의사와 상담이 시작되었다. 


"소화가 안되시는군요. 현재 남편과 아이 가족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어린 시절 가정환경과 가족과의 관계는 어땠나요?"


'음... 가족상담을 하러 온 것은 아닌데'하는 물음표를 머금었지만, 정신의학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구나 싶어 묻는 질문에 꼬박 대답을 이어갔다. 


"남편과의 관계는 제가 아프기 전까지는 좋았어요. 성실한 남편이고 부부싸움도 자주 하지 않고 평화로운 편이고요. 아프고 난 뒤로는 그리 나쁘지도 좋지도 않습니다. 어린 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 사업이 부도난 뒤 아빠와는 함께 살지 않았고요. 결국 고등학교 때 서류상 이혼하셨습니다. 엄마가 힘든 상황에서 저와 오빠를 키워주셨어요. 어릴 때 가족들과 행복했던 추억 같은 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의사는 스스로 소화불량으로 찾아오는 환자들 대부분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다는 식의 결론을 갖고 상담을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불안한 환경에서 자라온 내가 이런 극심한 소화불량으로 힘든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듯했다. 약을 먹고 도움을 받으면 좋아질 수 있지만 시간은 걸릴 거라고 다독여주었다. 우울증과 불면증에 먹는 약 처방과 함께 희망을 품고 돌아왔다. 


약 부작용 같은 건 평생 모르고 살아왔던 나인데. 정신의학과 약은 어찌 잘 맞지 않았다. 여러 차례 약을 변경했음에도 어지러움과 울렁거림이 심했다. 의사가 내 마음에 꽂아준 작은 희망과 더불어 지인의 어머니처럼 우울증 약으로 소화불량을 치료한 사례가 있어 내심 기대도 했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결국 몇 군데 정신의학과를 바꿔가며 약도 변경해 보았지만 항우울제가 나의 해결책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약 덕분에 잠은 잘 수 있었기에 이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겨야 했다. 

 



살다 보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어떠한 일들은 마땅한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내상황이 딱 그러했다. 극심한 소화불량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해결책을 찾아 시도해보고 있지만 딱히 해결책이 눈앞에 잡히지 않는다. 걱정보다는 계획을 세우고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는데 불쑥 튀어나오는 불안과 걱정은 어쩔 도리가 없다. 


"엄마는 아프면 안 돼. 엄마가 크게 아프면 가정이 무너져."


가까운 주변인에게 들은 이 한마디는 내 가슴속에 아로새겨져 여전히 남아있다. 나는 이미 아프고 가정이 힘들어지고 있으니 저 말은 사실이나 다름없다. 너무 맞는 말이라서, 내 가정이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나에게 힘내라는 위로의 말을 해주려는 의도는 잘 알겠으나, 결코 위로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엄마인 나도 사람이다. 어느 누구도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다소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 애써 받아들이기로 했다. "엄마도 사람인데 아플 수 있어! 아픈 상황을 잘 극복해 가면 무너진 가정도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거야."라고 말이다. 건강위기는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스며들며 티 안 나게 곁에 나타날 수도 있지만, 행복한 순간 불쑥 태풍처럼 찾아오기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나저나 나는 이제 무얼 해야 할까? 


베프친구가 엄마인 나를 대신해 공원에서 내 아들과 함께 해주는 고마운 장면_정말 고마웠어! 


 <2편 끝.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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