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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토리 Sep 28. 2023

10. '글'이 약이 될 때

부정적 감정 다스리기

"신경은 유전적인 영향이 커요. 본인은 작은 일에도 쉽게 놀라고 긴장하는 신경시스템을 부모님한테 물려받았다는 말이에요. 혹시 부모님도 본인처럼 아팠던 적 있지 않아요?"

"엄마는 전혀요. (아빠는 가출을 하는 바람에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


한 동안 1주일에 한 번씩 뇌신경센터 외래진료를 보러 가서 뇌혈류를 좋아지게 하는 수액을 맞고 신경계약을 타러다녔다. 그러던 어느 진료 날 의사로부터 자율신경실조증이 유전적인 영향이라는 말을 들었다.




내 엄마 복실 씨는 아주 기특하고 훌륭한 여성이다. 공예품 사업을 했던 남편의 무리한 돈 욕심 때문에 사업 확장의 여파로 결국 온 집안이 빨간딱지로 뒤덮이더니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남편이란 놈은 같이 사업을 하던 여자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 것도 모자라 몸이 아픈 자기 엄마까지(복실 씨 시어머니) 집구석에 버리고 나갔다. 가슴을 후벼 파는 배신감에도 눈물방울 떨어뜨릴 겨를도 없이 홀로 소처럼 일해서 빚을 혼자 다 갚았다. 아이 둘을 키우고 시어머니 장례까지 결국 홀로 치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복실 씨가 만약 나같이 스트레스에 취약한 신경 시스템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라면 이미 스트레스로 온갖 질병에 시달리며 진작에 이 세상을 떴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빚도 안 갚아도 되고 혼자 고생 안 해도 되었을 테지. 나처럼 과민한 신경시스템을 갖고 태어나지 않아서인가. 복실 씨는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본인 몸을 잘 챙기는 것이 오히려 더 현명한 것이라는 지혜를 깨친 여성이다. 반찬이 있으나 없으나 세끼 밥은 꼬박꼬박 잘 챙겨 드셨다. 고된 인생에도 병원신세를 진적이 별로 없다. 복실 씨의 정신과 신경은 강인한 편이다.


"지 아빠랑 어쩜 이렇게 똑같이 생겼어?"


정말 싫어했던 말이다. 안 닮았는데 닮았다고 해서 싫은 게 아니라 내가 봐도 징그러울 만큼 똑같아서 싫었다. 의사가 말한 유전이라 하면 아무래도 집을 나간 그 사람을 닮은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주변 어른들이 판박이라고 부를 정도면 아무래도 신경시스템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자율신경실조증은 평생 완치되는 그런 거 아니에요."

"......"


이날 의사로부터 평생 완치는 되지 않을 거라는 다소 불행한 이야기도 함께 들었다.


내 몸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기 위해서 안에서는 치열한 움직임이 일어난다. 내장기관을 조절해 주는 자율신경은 교감신경이랑 부교감신경이라는 두 친구에게 번갈아가며 일을 시키는데 이 두 친구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상대방의 단점을 보완해 주어야 둘의 균형이 맞아지면서 몸이 제기능을 하며 정상 작동할 수 있게 된다.  


자율신경이 망가져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약을 먹고 있는 나는 감정이 격해지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교감신경이 펄쩍펄쩍 들고 날 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몰랐던 거다.) 그럼 부교감신경 친구가 얼른 와서 다독여줘서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게 잘 안된다. 그럼 가슴이 쿵쾅거리고, 입은 바짝바짝 마르고, 어금니와 어깨에는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있다. 의사가 나는 '지나가는 개미를 보고도 벼락 맞은 것 같이 놀라는 신경을 갖고 있다'라고 했다. 부정적인 감정이 훅 올라올 땐 그 여파가 꽤 오래 지속된다.

 

신경이 유전이라는 말과 평생 완치는 되지 않을 거라는 말은 즉 내 아이도 나의 이 거지 같은 신경시스템을 닮았을 테고, 평생 완치가 안된 체 힘들게 살 수 있다는 말로도 들렸다. 그동안 내 아들은 나와 판박이라 사랑스럽기만 했는데 처음으로 나를 쏙 빼닮은 것이 몸서리 쳐질 만큼 싫어지려 했다.    


이날 뇌신경센터 외래 진료 보면서 두 번의 큰 어퍼컷을 맞고 마음이 좀 힘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감정이 격해지고 마음 한편이 시큰거렸다. 외모, 체질, 식성, 재능 대부분이 닮았다면 집 나간 그 사람도 신경 문제로 나처럼 크게 아팠봤던 경험이 있을까. 만약 있었다면 내가 그 비슷한 경험담을 한 번이라도 들었더라면... 하는 생각. 고생하며 돌고 돌아 이 병을 찾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까 하는 생각들이 일었다.


어린아이를 내 손으로 돌보지 못하며 아프고 고통스럽지는 않았을까.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불쑥 찾아왔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온갖 억울함 투성이었던 지난 나의 몇 가지 일들이 떠올랐다. 늘 피해왔던 마음들, 이번엔 피하지 않고 그 기억과 내 감정과 마주해 보기로 했다.




어릴 때부터 말싸움 잘하는 사람이 부러웠다. 마음속으로는 예행연습까지 해보는데도 실전에서는 입만 뻥긋하려 해도 눈물부터 앞서는 바람에 늘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물러나야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안에 있는 진짜 내 말을 꺼내려고 하면 눈물부터 나올까'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그 사람이 정식(?)으로 집을 나가기 전에 복실 씨가 잠시 내 곁을 떠난 적이 있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집구석에 온전한 마음으로 있을 수 있었겠나 싶다. 그렇게 한 동안 복실 씨가 따로 마련한 단칸방 집에서 주말 만남을 이어가면서 나는 '주말바라기'가 되었다. 복실 씨를 만나러 가려면 지하철을 타고 갔어야 했는데 그 길이 너무 설레고 기대되고 기뻤다. 그렇게 1박 2일 즐거운 만남을 하고 돌아올 때면 마음이 많이 아렸다. 오는 길엔 늘 혼자 훌쩍이며 눈물이 고여 지하철 자리가 있어도 앉지 못했다. 울고 있는 아이를 어떤 사람이 다독여줄까 봐. 그럼 눈물이 왈칵 쏟아질까 봐 지하철 창 밖만 응시하며 오던 그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다. 토요일은 온 우주를 얻었고, 일요일 저녁엔 우주가 녹아 사라지는 듯했다.   


몇 달 후 복실 씨는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하며 책임을 졌다. 나는 꽤나 성숙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좋게 말해 그렇지 애어른 같이 군다는 말이었겠지. 혼자 온갖 고생 하며 가장이 된 복실 씨에게 투정 부릴 내 자리는 없었다. 초등학교에서 왜인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반장 부반장을 꽤 여러 번 했다. 그때는 학급임원이 선생님 소풍 도시락과 간식은 챙겨야 했는데 한 번도 가져가 본 기억이 없다. 다른 행사도 한 번도 참여를 못하셨다. 복실 씨는 그럴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대부분 혼자서 식사와 시간을 해결해야 했다. 혼자 하는 외로움이 당연하고 익숙한 사람이 되어갔다. 복실 씨는 매일 현실을 살아내기에도 벅차보였다. 집에 돌아오면 이미 정신과 체력이 소진되어 나의 소소한 말들을 들어줄 기력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니 나는 말을 더욱 아끼게 되었다.  


어느 날은 깜깜한 밤에 골목을 지나 가는데 나만한 남학생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느낌이 싸하다 싶었는데 뒤에서 내 교복 치마를 들추더니 변태짓을 하는 것 아닌가! 소리를 지르니 옆골목으로 도망을 갔다. 화가 나서 그놈을 잡으려고 뛰어가니 벽 뒤에 숨어있었는지 한 손으로 벽을 잡고 고개를 뒤로 쓱 내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어두워서 확실하진 않지만 비아냥거리는 웃음도 희미하게 보였다. 그 순간 무서움을 느껴 더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 너무 화가 나고 무서워서 덜덜 떨면서 왔다. 집에 엄마가 있었는데도 나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나만 괜찮으면 되지. 괜찮아 별거 아니야. 그냥 똥 밟은 거야... 괜찮아.' 하면서 감정을 삼키느라 바빴다.


고등학교 2학년 기말고사 때는 담임 선생님이 공지를 하나 했다. "이번 기말고사 1~5등까지는 방학 때 개설되는 우등반에 들어갈 수 있으니 잘 봐라." 공짜로 국영수를 공부시켜 준다니... 공부의욕이 샘솟았다. 최선을 다했다. 당당히 등수에 들었다. '아, 열심히 하면 되는구나' 하는 기특한 생각을 할 찰나에 담임선생님은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이번 우등반에 너는 못 들어가게 됐다."


그 순간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기력하게 어영부영 '네'라고 대답하고 돌아왔다. 왜 그랬을까. 기억으로는 복실 씨에게 이 이야기는 한 것 같은데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 상황을 보며 한 동안 무력해졌던 것 같다. 분명 내가 정당하게 노력해서 얻은 결과였다. 공급보다 수요가 많았던 탓일까. 그때 우리 반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했었던 것 같다. 무기력하게 물러나야만 하는 내 성격과 상황에 위축되어만 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 '괜찮아'하고 넘겼던 일들이 사실은 하나도 괜찮은 게 없었던 것 같다. 그저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여야만 무탈히 살아질 것 같은 그런 상황들. 왜 내 이야기를 할 때 눈물부터 나는 건지. 내 마음을 들여다보니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그 감정에 이제 이름표를 붙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억울함'


슬픔, 분노, 미움, 원망도 아닌 그저 억울함이었다. 복실 씨 때문에 억울한 건 결코 아니었다. 같은 여자로서 나는 지금도 복실 씨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나 존경스럽다. 나에게 훌륭한 여성을 한 명 꼽으라고 하면 나는 주저 않고 우리 복실 씨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고 말할 것이다. 나라면 다음 생에도 다다음 생에도 못할 일들을 복실 씨는 해냈다. 어른이 될 때까지 나와 오빠를 버리지 않고 곁에서 키워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그저 그 사람 때문에 어린 내가 엄마를 몇 번을 불러도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대할 수밖에 없었던 복실 씨의 고된 일상. 일찍이 애어른이 되어버린 나. 애처럼 징징대고 투정도 부리고 억울한 일은 물고 뜯고 끝까지 내 권리는 되찾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들. 그게 억울한 마음인지도 모르고 살아온 시간 속에서 견디는 법부터 배울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억울했다. 무엇보다 이딴 신경시스템을 물려받은 억울함이 상당했다.




지난번 최면치료 후 느꼈던 잔여 실타래 감정들이 이런 것이었을까. 이제 나는 스스로를 다독여주기로 그리고 부정적 감정을 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뭉쳐진 걸 풀지 않고 피해 가면 또다시 뒤통수를 칠지 모를 일이다.


'너 그동안 참 억울했겠다 정말'  


내가 나를 위로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꽤 괜찮았다. 심플하면서도 나에게 효과 좋은 방법도 찾았다. 펜을 들고 종이에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을 적어 내려가는 것이다. 명확한 기억이나 사건이 있으면 서술하듯 적어나가면서 그때 느꼈던 감정을 가감 없이 적는다. 불쾌한 감정은 글로 배설하고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기도 했다. 누구에게 말로 하기는 싫고, 그렇다고 매번 피할 수는 없는 것들을 글로 적는다는 것은 쓰는 순간부터 주술적 치유의 힘이 작용하는 것 같았다. 


말로는 '괜찮다'라고 할지라도, 글에서는 '안 괜찮다'라고 하기로 했다. 글로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는 건 눈물부터 앞서 제대로 말을 못 하는 주책맞은 나에게 보약 같은 처방이다. 의사가 완치가 안 된다고 해서 교감신경을 억누르는 약을 평생 먹고살고 싶진 않다.


억울한 마음도 '글'이라는 도구로 많이 해소가 될 수 있구나를 느꼈지만 단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몇 차례 들여다보고 스스로와 대화를 하면서 그 과정을 기록해 보니 점차 맑아져 갔다. 누군가에게 말하기 힘든 감정과 일이 생겼을 땐 '글'은 꽤나 좋은 친구이자 약이 된다.   




불쑥 찾아오는 부정적인 감정과 스트레스는 '글'이라는 약으로 나를 달래주면 되니 좀 든든한 느낌이다. 앞으로는 조금 덜 억울한 인생을 만들어갈 수 있을 듯하다.


나는 전직 컨설턴트라는 직업을 갖고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온 경험이 있다. 그동안 카리스마 넘치는 뇌신경 센터 의사가 한 말은 모두 나를 살리는 옳은 말이었다. 그런데 '평생 완치는 안된다'라는 이 말만은 당신이 틀렸노라고 알게 해주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8편 끝.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신경과 약만큼이나 나를 살리는데 일조한 소중한 친구들_펜과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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