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그 액체에 기대어

by 돛이 없는 돛단배

술을 반강제로 끊은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처음엔 눈에 다래끼가 생겨 항생제를 먹게 되면서 못 마시게 됐고,

다래끼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엔 왼쪽 엄지손가락을 크게 다쳤다.

그렇게 치료가 이어지면서 4주째 술을 입에 대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내 삶의 일부가 또 하나 비워졌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해야 할 일을 하긴 하지만

손가락이 불편하니 일상 자체가 만만치 않다.

자잘한 일 하나에도 괜히 짜증이 밀려오고,

그걸 꾹 참고 넘기다 보면 하루가 끝날 즈음엔 온몸이 녹초가 된다.

거기에 술 한 잔조차 없는 요즘은 더더욱 버겁다.


출근한 날에는 일부러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에 머문다.

덜 붐비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열 시가 훌쩍 넘은 밤, 마지막 불을 끄고 잠긴 문을 확인하며 퇴근길에 나선다.

인덕원역에 도착하면 열한 시 반.

습관처럼 발길이 향하는 곳은 어김없이 그 국밥집이다.

늘 앉던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고 내장탕과 소주 한 병을 주문한다.

입을 데일 듯 뜨거운 국밥, 목을 조이는 소주 한 잔.

주변은 웃고 떠드는 사람들로 시끄럽지만, 나는 폰을 보며 혼자 술을 마셨다.


혼자인 게 외롭긴 했지만,

이런 시간이라도 없으면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하루 중 유일하게 ‘나’로 있을 수 있는 순간이었으니까.


나는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학 시절, 낯선 무리 속 어색함이 싫어 술자리는 애써 피했다.

특히 여자 동기들이 많은 자리엔 괜히 더 움츠러들었다.

어쩌다 술자리가 끝나고 막차가 끊긴 밤, 친한 친구 몇 명이 술병을 들고

내 좁은 자취방에서 자기 위해 찾아왔을 때, 그때 나눈 술잔이 전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혼자 서울에 올라와, 어렵게 작은 회사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동료들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었고,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싶었다.

그래서 웬만한 술자리는 빠지지 않고 함께했다.

사실 나는 먼저 “술 한잔하자”고 건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와 술을 마시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늘 그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주길 기다렸고, “같이 가자”는 말에 묵묵히 따라갔다.


그런데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꼬박 술을 마셨던 것 같다.

3차, 4차로 이어지는 날도 있었지만,

혹여나 나 때문에 클럽 같은데를 못가는 게 아닐까 싶어

분위기를 살피며 중간에 힘들다, 피곤하다 등의 핑계를 대며 일부러 빠져주기도 했다.

중학생 때부터 피워오던 담배는

술과 함께 어느새 습관이 되어 있었고, 나도 모르게 꼴초가 되어 있었다.


20대 중반부터 30대 후반까지, 내 삶은 야근과 술자리로 이어졌다.

자정 넘도록 일하고, 동료 둘셋과 새벽 네 시까지 마시고,

아침 8시에 겨우 눈을 떠 출근했다.

고되긴 했지만, 그렇게라도 사람들과 엮여 있어야 덜 외로웠다.


대부분은 일 얘기였다.

갑을 관계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일들,

당연하다는 듯 내려오는 요구들,

쌓여만 가는 일들에 대한 하소연과 불만.

그렇게 쏟아내고 나면,

서로 한숨 쉬며 또 한 잔씩 넘겼다.

때로는 동료들의 사적인 고민을 들어주며 편들어주고 조언해주고...

나는 늘 듣는 쪽이었다.

내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나를 그저 ‘같이 일하는 사람’ 정도로 여겼겠지만,

나는 그들 사이에 섞이고 싶어서

야근을 자처했고, 그들의 일을 돕고, 뒤처리를 도맡았다.

술자리에 나를 부르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때까지, 애써 노력했다.

티 안 나게, 조용히...


술은 단순히 취하게 만드는 액체가 아니었다.

그건 세상과 단절되지 않기 위한, 거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발음이 어눌하고 말수가 적은 나를 어색하지 않게 해주는 방패였고,

세상 안에 나도 속해 있다는 착각이라도 들게 해주는 마법 같은 액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평생 따라다닌 쓸쓸함과 외로움을 아주 잠시나마 마비시켜주는,

지독하게도 잘 듣는 마취제였다.


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사람들은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누군가는 연애를 시작했고, 누군가는 결혼을 했고,

누군가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잦았던 회식은 점점 희미해졌고, 결국 나는 혼자가 되었다.


이제 혼자 마시는 술은 너무나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혼자 밥 먹는 국밥집, 혼자 마시는 소주, 혼자 듣는 웅성거림.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건 이제 나와 술뿐이다.


모두가 멀어져도

술은 한 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말로 좋아한 적도 없다.

하지만 지금, 내 곁에 남아 있는 건

그 술밖에 없다.


그런데 요즘은 그 술조차 마실 수 없다.

버텨내기 위해 마시던 몇 잔이 사라지자,

하루하루가 더 버겁고 고단하게 느껴진다.

외로움은 이전보다 더 선명해지고,

그동안 내가 술에 얼마나 많이 기대 있었는지

이제야 실감이 난다.


사실 나는 술을 아무리 들이켜도

몸은 많이 휘청이지만, 정신은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는다.

근데 이상하게, 그 쓴 걸 삼키는 그 순간만큼은

뭔가 견디는 느낌이 든다.

그냥, 그 짓이라도 하고 있어야 덜 외로웠다...

지금은 그마저도 못한다.


술이 미칠 듯이 고프다...



from 쏘주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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