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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지 않았지만, 머물렀던...

by 돛이 없는 돛단배

나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었다.
곁에 없었고, 목소리 한 번 들은 적 없었지만,
그 존재만으로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던 시간을,
나조차 스스로를 놓아버릴 것 같던 그 시절을
겨우 붙잡고 견디게 해주는 무언가가 되어주었다.

편지만 주고받은 사이였지만,
처음엔 단순한 호감이었지만,
어느새 그 존재는 내 안의 조용한 버팀목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편지를 기다리는 일에 하루가 매달렸고,
그 문장을 읽는 순간마다
텅 비어 있던 마음에 잠시나마 무언가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단어 하나, 줄 간격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렸고,
그녀의 말투와 호흡, 웃음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하는 일은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내 마음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피난처 같았다.

우리의 인연은 중학교 3학년,
잡지에 펜팔을 구한다는 짧은 글을 올리면서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그녀의 첫 편지.
수많은 편지들 중 유일하게 사진이 들어 있었고,
그 사진 속엔
단번에 눈에 띌 만큼 아주 예쁜 여학생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사진과 함께 도착한 편지는
낯선 주소, 경쾌한 문장,
그리고 또박또박 눌러 쓴 글씨로 가득했다.
처음부터 거리낌 없이 다가오는 그 편지에는
어딘지 모르게 낯설고 따뜻한 온기가 묻어 있었다.

나는 답장을 보냈고, 그 안에 내가 장애인이라는 사실도 담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거리낌 없다는 듯, 상관없다고 답해왔다.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우리는 매주, 어김없이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와의 갈등,
좋아하는 음악과 책, 가족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아무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했던 마음속의 말들.
서로의 삶은 달랐지만, 마음은 자주 겹쳤다.

나는 그녀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답장을 쓸 때면 마치 하루를 통째로 건네는 마음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골랐다.

한 번도 곁에 있었던 적은 없었다.
서로를 직접 마주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고,
목소리조차 들어본 적 없었지만
그녀는 내 일상 깊은 곳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나의 그녀에 대한 마음을
흔히 말하는 짝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떠올리는 순간만큼은
괜히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서로의 편지는 점점 뜸해졌고,
어느새 긴 침묵이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대학 시절,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는 결혼했다는 소식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날 이후 우리는
다시는 제대로 연결되지 못했다.

이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 중 하나였을 것이다.
시간 속에 아린 감정은 묻혀갔지만,
그녀에 대한 감정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해졌으면 더해졌지, 흐려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한 번은 언젠가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이제는 누군가의 아내이고,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을지라도,
어쩌면 삶의 어느 모퉁이에서 단 한 번쯤은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바람이 있었다.
어쩌면 질긴 미련에 가까운 젊은 집착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그녀의 삶이 궁금했고,
그저 평범하게 잘 살고 있는지, 낯선 도시의 어디쯤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그저 그 정도의 안부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그 젊은 날의 한쪽 마음은 내 안에서 오랫동안, 끈질기게 머물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열심히 살았다.
힘들고 고달플 때마다 그녀를 떠올렸고,
그 마음 하나를 버팀목 삼아 하루하루를 견뎠다.

가진 것 하나 없이 차가운 세상에 올라와,
처절하게 젊은 피를 불태우며 일했고,
이제 겨우 내 삶을 스스로 일궈낸 지금의 나.
그 모든 고된 시간들의 밑바닥에는
끝내 꺼내지 못했던, 젊은 날의 그 마음 하나가 여전히 내 안 깊은 곳에 자리한 채, 조용히 나를 지탱하고 있다.

그 마음이 유부녀를 향한 것이라면 죄가 될지 모르지만, 나는 그저 혼자 품고 있었을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오래된 감정 하나. 억지로 떼어낼 생각은 없었다. 그건 나만 알고 있는, 지워지지 않는 비밀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녀는 내 젊은 날을 함께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혼자 품은 마음 하나로, 조용히 이어졌다고 믿고 싶었던 인연이었다.
표현조차 하지 못한, 젊은 날의 고백은 마음속에만 머물렀고, 어쩌면 외사랑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시절 쉽게 꺼내지 못했던 감정 덕분에 나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 겨우,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쓰러지지 않기 위해,
젊은 날의 끝자락에 남겨진 조용한 감정 하나를 끝내 놓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가 내 젊은 시절의 고단했던 삶을 알지 못했다고 해도 괜찮다.
그 젊은 날의 서툰 마음을 끝내 전하지 못했어도, 이제는 괜찮다.

중요한 건,
그녀와 닿지 않았던 그 긴 시간 속에서도
나는 그 젊은 날의 뜨거운 마음 하나로, 악착같이 버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젊은 날의 서툰 사랑이,
지금까지 나를 어떻게든, 간신히 살아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 마음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조용히 내 안에서 이어지고 있다.


- 2007년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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