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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너무 많은 날들

by 돛이 없는 돛단배

차라리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멍청한 바보였다면,
이 모든 불행을 모르고 살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감정은 삶을 풍요롭게도 하지만,
동시에 참기 힘든 짐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 감정의 무게는 종종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다.
마치 내 안에 타오르는 불길 같아서,
기쁨은 금세 사그라지고
슬픔은 오래도록 잿더미를 남긴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세상은 나에게 따뜻한 곳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바라기도 전에 포기해야 했고,
말하지 않아도 나를 낯설어하는 시선이 먼저 다가왔다.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를 입고,
사소한 일에도 깊은 슬픔이 밀려왔다.
장애로 인해 겪는 차별과 외면은 어린 마음에 날카로운 흔적을 남겼고,
그 흔적은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삶을 대충 살아오지 않았다.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무언가를 소홀히 한 적은 없다.
학교도, 직장도, 나름의 책임감으로 묵묵히 감당해왔다.
남들보다 느리고 버거워도,
주어진 일들 앞에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성실함이 나를 더 지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몸의 피로와 함께 쌓여가는 감정의 무게는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기쁨을 의심하게 됐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진짜일까?
아니면 그저 고통 사이에 끼어든 잠깐의 착각일 뿐일까.
모든 감정이 지나치게 예민하게 다가왔고,
그래서 더 쉽게 상처받았다.
나는 감정을 제어하기보단,
그저 버텨내는 데 급급했다.

무엇보다 괴로운 건,
세상의 아픔을 너무 선명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울리는 비명,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마디,
거리에서 스쳐가는 눈빛 하나에도
내 마음은 가라앉고 만다.
외면하고 싶어도,
그 아픔이 너무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때때로 바란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세상의 고통 따위는 몰라도 될 텐데.

감정 없는 삶은 아마 무미건조할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평온할 수도 있다.
나는 그 경계에서 흔들리며 살아간다.
너무 많은 것을 느끼고,
그 모든 것을 참아가며 버티고 있는 중이다.
피로하다.
그리고 때때로는,
이 모든 것을 모른 채 살아가는 누군가가 부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감정 속에 있다.
슬픔에 휘청이고,
어느 날은 사랑에 기대고,
또 어떤 날은 무력감에 짓눌리면서도,
끝내 살아간다.
감정이 나를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결국 그것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또 하루를 버틴다.
지쳐도, 아파도,
결국엔 살아내기 위해.
하지만 정말 가끔은—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바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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