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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돛이 없는 돛단배 May 31. 2024

고등학교

어릴 적부터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나는 중학교 시절을 그다지 눈에 띄지 않게 보냈다. 

학업 성적에서는 완전 꼴찌였지만, 그림에서는 종종 상을 받으며 작은 성취를 이뤄내곤 했다.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들과는 졸업 후 성적에 따라 갈라서게 되었고, 

이로 인해 내 마음 한편에 쓸쓸함이 자리 잡았다. 친구들과의 이별은 마치 익숙했던 세계와의 작별인사 같았다. 

그들은 나에게 소중한 추억의 조각들이었고, 그들과의 헤어짐은 나의 어린 마음을 깊이 흔들어 놓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나의 진로는 다른 학생들과는 달랐다.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은 나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고, 일반 고등학교에서의 삶은 나를 더욱 힘들게 하고 놀림의 대상이 될까 두려웠다. 

긴 고민 끝에 나는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로의 진학을 결심했다. 

이때는 이것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길인줄 알았다.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장애인 특수학교로 진학한 것은 나에게 새로운 시작이었다. 

학교에는 기숙사가 있었고, 나는 새로운 환경에서의 도전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동료 장애인 학생들과의 생활이 서툴고 어색했다. 

비록 나도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장애인들과 깊이 교류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처음에는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 명이 한 방을 함께 쓰며 생활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어려움 없이 익숙해졌다. 

나의 방은 다른 학생들과의 유대감이 싹트는 곳이 되었고,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마음을 열어갔다.


기숙사 생활에서 힘든 점도 많았다. 특히 공용 목욕탕에서의 경험은 내게 매우 불편했다. 

모든 이가 벗은 채로 함께 목욕하는 것은 나에게 큰 부담이었다. 

또한, 매일 아침저녁으로 정해진 시간에 청소를 하고 점호에 참여하는 것도 큰 스트레스였다. 

어릴 적부터 대부분 혼자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살아온 나로서는 이러한 규칙적인 생활이 갑갑하고 답답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나로서는 이러한 제약들이 때때로 참기 어려웠다.


결국, 나는 한 학기를 채우지 못하고 학교를 중퇴하기로 결정했다. 

거의 도망치듯이 학교를 떠나 고향인 합천으로 내려갔다. 

집에서 6개월 동안 혼자 공부도 좀 하면서 휴식을 취한 후, 버스로 20분 거리의 작은 일반 고등학교에 다시 1학년으로 입학하며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다. 

이 새로운 환경에서 나는 장애를 가진 한 개인으로서 어떻게 견딜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내 삶을 보다 의미 있게 만들 수 있을지 깊이 고민했다. 

새로운 출발은 늘 나에게 새로운 걱정과 공포와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일반 고등학교에서의 생활은 걱정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선배들이 후배들을 무섭게 다루는 거 빼고는 괜찮았다. 

다행히도 한 학년 위에 중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가 있었고, 그는 선도부였다. 

그 친구 덕분에 선배들로부터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물론, 공부는 여전히 내 관심 밖이었다. 

중학교 때처럼 수업시간에는 교과서나 공책에 낙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때로는 친구들에게 아주 야한 그림을 그려주면서 쉽게 가까워지려고 했던 것 같다. 

특별히 짓궂거나 나쁜 친구는 없었고, 우리는 함께 웃고 즐기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2학년 때였다. 학교의 퀸카 중 한 명이 나에게 크리스마스 편지를 건네준 것이다. 

그 순간, 내 심장은 두근거렸고, 나는 무척 놀랐다. 

하지만 별 내용은 없겠지 라고 생각하며 친구들 안 볼 때 열어서 읽어보니, 그 안에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과 함께 크리스마스 인사가 담겨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펜팔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고민을 나누며 점점 더 가까워졌다. 

주소를 어떻게 주고받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덕분에 우리의 비밀스러운 편지는 졸업 때까지 계속 이어졌고, 복도에서 친구들과 같이 마주칠 때는 서로 모르는양 지나치다가 이따금씩 둘이 눈이 마주칠 때면 나한테 눈웃음을 살짝 쳐주곤 했었다.


사실, 그때 나는 이미 1년 전부터 두 명의 펜팔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시절은 공부보다는 매일 편지 쓰느라 바빴었다. 

매일 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나는 혼자 방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하나씩 그려서, 평소 써두었던 어두운 내용의 편지를 예쁜 편지지에 함께 넣고 풀칠로 봉투를 봉한 다음, 다음 날 아침 일찍 마을회관 우체통에 넣고는 빨리 답장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등교했다.


편지 쓰기는 나에게 유일한 낙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나는 곧바로 엎드려 누워서 편지를 썼다. 

학교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들과 사춘기 때의 복잡한 감정들, 나만의 비밀스러운 감정을 담아 보냈다. 

그녀들과의 펜팔은 나에게 특별한 추억이었고 사춘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큰 위안이었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서로의 일상과 고민을 나누었고, 이는 나에게 있어 중요한 감정의 해방구였다.


그림을 통해 내 감정을 표현하고, 그 편지를 통해 내 이야기를 전하는 과정은 나의 사춘기를 풍부하고 의미 있게 만들어 주었다. 

때로는 고민이 가득한 날에도, 펜팔 친구들에게서 온 답장을 읽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의 따뜻한 말과 격려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매일 밤, 편지를 쓰는 시간은 나만의 소중한 시간이었고, 그 시간 동안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성장할 수 있었다. 그녀들과 나눈 편지들은 단순한 종이 조각 이상이었다. 

그것은 나의 감정과 생각이 담긴 작은 세계였고, 그 안에서 나는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이러한 경험들은 나에게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비록 공부는 소홀히 했지만, 펜팔을 통해 얻은 소중한 인연과 그 속에서 배운 감정의 교류는 나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날들은 이렇게 흘러갔다. 나는 여전히 그림을 그렸고, 편지를 쓰며 나만의 세상에서 행복을 찾았다. 그림 그리기는 내게 안식과 표현의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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