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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투영

by 돛이 없는 돛단배

상담 선생님은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늘 비장애인들 사이에만 있다 보니, 그 속에서 혼자 애쓰는 게 더 힘든 건 아닐까요? 같은 상황을 겪는 친구를 사귀어 보는 건 어떨까요?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 말은 의심할 여지 없이 따뜻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온기가 채 닿기도 전에, 내 마음은 차갑고 무거운 쇠뭉치처럼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이 내 삶의 지도를 펼쳐놓고 조심스럽게 가리킨 그 길이, 내가 평생을 피해 도망쳐 온 길이었기 때문이다. 내 삶의 여정은 선생님의 선한 상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져 왔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내 세상은 비장애인 친구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선택의 결과라기보다, 주어진 환경 그 자체였다. 내 주변에 장애를 가진 이는 거의 없었고, 어쩌다 마주쳐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일찍부터 생존의 기술을 터득해야만 했다. 남들과 ‘달라 보이지 않는 법’, 나의 다름을 최대한 감추고 그들의 보폭과 속도에 나를 맞추는 법을 익혔다. 그렇게 나는 거대한 퍼즐의 한 조각인 척, 비장애인이라는 무리 속에 스스로를 끼워 넣으며 살아왔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자, 세상을 버텨내는 유일한 방식이 되었다. 그러니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발상 자체가 내게는 여전히 내 몸에 맞지 않는 낯선 옷처럼 어색하고 불편하다.
실제로 그런 모임이나 자리에 나간 적은 손에 꼽는다. 아니, 나는 그런 자리를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애써 피해왔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누군가 그런 만남을 제안하면, 나는 결코 대놓고 거부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아, 좋죠.” 하며 긍정하는 듯 말끝을 흐린다. 그리고는 다른 급한 일이나 약속을 핑계 대며 슬그머니 몸을 뺀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모른다. 아마 내가 그저 숫기가 없거나, 새로운 만남을 어색해하는 소극적인 성격쯤으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내면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끈적하고 묵직한 불편함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무엇보다 나는 시선이 두렵다. 혼자 길을 걸을 때조차 나를 향해 꽂히는 무수한 시선의 파편들을 온몸으로 느낀다. 그 시선들은 때로 호기심이고, 때로 동정이며, 때로는 무심하지만, 내게는 모두 날카로운 칼날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만약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여러 명 모여 있다면, 그 시선은 얼마나 더 거대하고 강력한 집합체가 되어 우리를 꿰뚫을까. 흩어져 있던 렌즈들이 하나의 거대한 돋보기가 되어 우리를 태워버릴 것만 같다. 실제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내가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언제나 누군가가 나를 주시하고, 내 걸음걸이를 재고, 내 존재를 멋대로 판단하고 있다는 감각. 그 생각만으로도 온몸의 근육이 돌처럼 굳고, 마음은 한없이 위축된다. 그래서 나는 함께하지 않으려 한다. 흩어져 있으면 그저 개인의 불편함이지만, 모이는 순간 우리는 ‘구경거리’라는 이름의 집단이 될 테니까.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섬뜩한 상상도 도사리고 있다. 만약 우리, 장애를 가진 사람들끼리만 모여 있다가 어떤 난관에 부딪혔다고 상상해보자. 길 한복판의 높은 턱,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물건, 혹은 세상의 무례함 같은 것들. 그런데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는 장면. 각자의 눈동자에서 속수무책의 무력감만이 끝없이 번져가는 그 침묵의 순간. 그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골에 소름이 돋는다. 사방이 막막함으로 가득 찬 그 자리에,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함께 서 있는 모습. 그것은 내가 평생 외면해 온 나의 한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확인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또 하나의 두려움이 있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있는 내 모습을 머릿속에 그릴 때면, 내가 아주 오랫동안 두꺼운 외투 속에 감춰왔던 것들이 갑자기 선명하게 드러나는 느낌이 든다.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나의 불완전함, 지우고 싶었던 상처의 흔적들. 타인의 모습에 비친 내 그림자를 똑바로 마주하는 순간, 나는 결국 가장 피하고 싶었던 나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그들의 불편함 속에서 나의 불편함을 보고, 그들의 아픔 속에서 나의 아픔을 확인하게 되는 그 과정이, 나에게는 무엇보다 고통스럽다.
이 모든 비겁한 이유들을 알면서도, 나는 내 태도가 얼마나 깊은 모순에 빠져 있는지 직시한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멀리하는 것은 곧 내 자신을 밀어내는 행위이며, 그들을 향한 나의 불편함은 결국 나를 향한 자기혐오의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피한다. 그것이 뒤틀렸을지언정, 내가 이 낯선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터득한 나름의 방어기제이고, 동시에 가장 비열한 형태의 자기 부정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혐오한다. 아주 이기적이고 나쁜 놈 같다. 같은 무게의 짐을 짊어진 사람들의 어깨를 외면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나는 그들과 달라. 나는 어쩔 수 없어.”라는 변명으로 위태로운 자존심을 감싼다. 나는 그저 살아남으려, 상처받지 않으려 발버둥 쳐 왔을 뿐인데, 그 발버둥의 끝에서 마주한 내 얼굴은 이토록 추악하고 비겁하다.
결국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다른 장애인들이 싫은 게 아니다. 그들과 함께할 때 더 선명해질 세상의 시선, 그리고 그 시선 앞에서 속절없이 흔들리는 내 자존심이 싫은 것이다. 어릴 적부터 비장애인의 무리 속에서 ‘정상성’을 연기하며 살아온 나의 오랜 습관과, 내면 깊숙이 자리한 오래된 두려움이 뒤엉켜, 나는 오늘도 그들에게서 끝내 거리를 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중얼거린다.
“나는 나쁜 놈이다. 나는 비열하다. 나는 내가 가장 혐오하는 그 시선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존재다.”
아마 그래서 이 나이가 되도록, 마음을 터놓고 술 한잔 기울일 친구 하나 없는 건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세상으로부터도, 그들로부터도,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도 완벽히 고립되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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