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폰 안의 세상

by 돛이 없는 돛단배

삶이 고달프다는 말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묵직한 납덩이 같은 피로가 어깨를 짓누르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예전에는 하룻밤 자고 나면 털어낼 수 있었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이제는 혈관 속에 침전되어, 흐르지 못한 채 고여 있는 기분이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혹은 버텨온 시간의 무게 탓인지 애써 외면해왔던 나의 한계가 썰물이 빠져나간 갯벌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약하고, 생각보다 쉽게 부서질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들을 자주 마주한다.
불안은 예고 없이 찾아와 나를 잠식한다.

구체적인 대상이 있는 공포가 아니라, 형체 없이 번져오는 안개 같은 감정이다.

숨을 쉬고 있는데도 숨통이 조여 오는 기분.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렵고, 그렇다고 오늘을 온전히 살아낼 자신도 없는 시간 속에서 나는 자주 질식할 것만 같았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잠시라도 이 지독한 현실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상구가 필요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여행’이나 ‘운동’이라는 그럴듯한 탈출구가 있다. 배낭 하나 메고 훌쩍 떠나 낯선 풍경에 자신을 던지거나, 심장이 터질 듯 달리며 땀과 함께 내면의 독소를 쏟아낸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나에게는 그런 평범한 해소법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마음은 이미 수평선 너머를 달리고 있는데, 불편한 몸은 나를 방이라는 좁은 공간에, 그리고 침대라는 더 좁은 구역에 붙잡아 둔다.

육체의 제약은 곧 정신의 감옥이 되었고, 움직일 수 없다는 무력감은 스트레스를 풀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짙게 쌓아 올렸다.
그래서 나는 결단을 내렸다. 남들이 보기엔 과하다 싶을 만큼 큰 비용을 치르고 하이엔드 헤드폰과 앰프를 들였다. 누군가는 사치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이것은 사치가 아니라, 버티기 위한 선택이었고, 나를 이 하루 안에 붙잡아 두는 최소한의 장치였다.
육중한 앰프의 전원 스위치를 올린다. 진공관이 은은한 붉은빛을 내며 예열되는 짧은 시간은, 마치 이륙을 앞둔 우주선의 대기 시간처럼 경건하다.

방문을 잠그고 커튼을 친다. 세상의 소음과 빛을 차단한 채, 묵직한 헤드폰을 머리에 쓴다. 귀를 완전히 덮는 압력과 함께 적막이 내려앉는다. 이 순간부터 이곳은 더 이상 좁은 방구석이 아니다.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을 찾아서 전체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데이비드 길모어의 기타가 허공을 가르며 공간을 열고, 닉 메이슨의 드럼은 심장 박동처럼 둔중하게 울린다. 리처드 라이트의 건반이 몽환적인 안개를 피워 올리면, 방의 벽은 서서히 허물어지고 그 너머로 끝을 알 수 없는 공간이 펼쳐진다. 그들의 음악은 단순히 ‘듣는’ 소리가 아니다. 머릿속에서 시각을 자극하는, 거의 환각에 가까운 체험이다.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정교한 사운드는 내 뇌리에 프리즘 같은 빛을 흩뿌리고, The Wall의 절규는 내가 미처 꺼내지 못한 불안을 대신 토해낸다. 현실에서는 한 발짝 떼는 일조차 버거운 몸이지만, 소리의 파도 위에서만큼은 나는 자유롭게 부유한다. 음악이 만들어낸 상상의 대지 위를 달리고, 심해를 유영하고, 성층권을 뚫고 올라간다.
비록 이것이 잠시뿐인 도피라 해도 상관없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이 방, 헤드폰이 만들어낸 또다른 세상 안에서 나는 비로소 육체라는 감옥을 잊는다. 고달픈 삶도, 드러난 한계도, 끈적이던 불안도 이곳에서는 잠시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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