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중반에 다시 학생이 되었다. 그것도 유학생. 낯선 나라의 새로운 삶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이래저래 마음의 부침을 겪었다. 쏟아지는 영어의 홍수에 휩쓸려 내가 사라질 것만 같았던 세 학기를 보내고서야 다다른 논문 학기. 서두를 것 없이 논문에만 몰입할 수 있는 지금이 좋다. 짧은 영어로 인한 소통의 어려움, 어려움을 용기로 뚫고 나가지 못하는 나에 대한 실망, 그로 인한 움츠림에서 조금씩 벗어나도 되는 시간에 다다랐으니까.
까마득한 그 시절, 쫓기는 내 마음을 잠시나마 쉬게 해 준 것이 산책이다. 길고 혹독한 겨울을 뚫은 잎망울들이 터지기 시작하는 초봄, 생동하는 그 기운에 걷지 않을 수 없었다. 기숙사 뒤편 축구장을 지나 울레발 병원으로 가는 길, 나지막한 집들과 양로원이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나무 아래 테이블에 앉아 담소를 나눈다. 병원 앞 잔디밭을 가로질러 도롯가를 따라 걸으면 어느새 도서관.
오늘은 더 많은 흙길을 찾아 새로운 루트를 탐험해 봐야지. GPS를 켠 체, 집과 학교 사이 비포장 루트를 찾아 나선다. 소소하고 즐거운 모험이다. 기숙사 앞 지상철 역 너머의 마을로 가본다. 아기자기한 집들이 이웃하고 있는 주택가, 초록의 언덕길, 아담한 다리를 건너 이름 모를 초등학교 뒤편의 숲길로 접어든다. 촉촉한 스펀지 케익마냥 폭신하게 흙이 밟힌다. 짧은 숲길의 끝에 유치원이 있다. 눈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야외복을 입은 체 흙장난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재잘거리며 노는 소리가 귀엽다.
기숙사에서 도서관까지, 한 시간의 산책으로 에너지가 올라온다. 이제 도서관 내 자리에 앉는다. 할당받은 구석자리가 편하다. 이방인에게 허락된 안전한 공간. 고개를 돌리면 통창 유리가 밖을 훤히 비추고 있다. 풍성한 하늘과 초록의 나무, 계절과 시간의 흐름이 선물로 펼쳐진다. 옅은 바람에 흔들리는 연둣빛 잎사귀들이 햇빛에 반짝인다. 평안과 위로는 덤이다. 다시 전등빛 아래 내 책상. 기꺼이 하루치의 논문을 시작한다.
긴긴 겨울에서 벗어나 봄을 맞이하는 오슬로는 나를 절로 걷게 했다. 흙길을 발견하기 위해 새로운 루트를 탐험했던 그때, 경로를 벗어나는 두근거림, 천천히 보고 느낄 수 있었던 길 위의 아름다움들, 수채 물감을 풀어놓은 듯 파랗게 붉었던 해 질 녘 빛깔들, 환한 밤을 거닐며 맡았던 꽃내음, 움츠린 마음들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햇빛 가득한 날이면 풀밭에 누웠다. 누워서 보는 하늘에는 하늘만 있었다. 그래서 좋았다. 하늘과 나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느낌. 지저귀는 새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마저 듣기 좋은 화음이 된다. 이것이 평안의 맛인가? 무엇이 나를 그리도 걷게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