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일이 잘 기억나지 않아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 때문이라고 한다. 그 해부터 나는 많은 일을 잊고 복사꽃을 좋아하는 것만 기억했다.
<동사서독> 영화감독 왕가위
최근에 자료를 찾다가 예전에 썼던 글을 발견했다. 깜짝 놀랐다. 시부모님에게서 들은 폭언과 냉소적인 말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고부 갈등이 절정일 때 들은 이야기들이었다.
완곡하게 요약하면 ‘네가 맘에 안 들었지만 아들이 좋아해서 어쩔 수 없이 결혼시켰다.’라는 메시지였다.
비수가 꽂힐 말들이 열거되어 있었는데 나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났다. 그러나 어떤 마음으로 그 글을 적었는지 상황은 기억이 났다.
사람이 모진 말을 들으면 자꾸 되새기려고 한다. 나 역시 그날 밤이 그랬다. 좋지도 않은 말들을 기억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누워있는 내내 힘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일어나 컴퓨터에 앉아서 그 날 있었던 일을 적었다.
글로 쏟아 놓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글로 적어 놓은 이상 내가 기억하지 않아도 되었다.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지금 그 글을 바라보는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인 마냥 신기했다. 그 힘든 시기를 현명하게 보낸 것 같아 기특도 했다.
그런 모진 말을 듣고도 시부모님에 대한 미움이 없다. 어쩌면 바보같이 속도 참 없다 할 수 있겠다. 나의 관점도 바뀌었고 시부모님에 대한 이해도 달라졌다. 지금은 시부모님도 ‘우리 며느리처럼 한결같은 며느리 없다’고 인정해 주시고 있다. 나도 시부모님의 서툰 표현을 인정하고 전하려고 하는 마음만 보려고 한다.
직장 생활에서도 왜 이런 일이 없었겠는가?
나를 힘들게 했던 직장 상사, 동료들
반대로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직장 상사, 동료들...
시간에 따라 그 관계도 때론 바뀌더라.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더 힘들다. 차라리 그 에너지를 감사한 사람에게 두고두고 쓰는 게 낫다. 물론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힘들어도 기뻐도 글을 쓴다. 나쁜 감정은 글을 통해 잊고, 좋은 감정은 글을 통해 기억하려고 애쓴다.
내가 지금 해맑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