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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Oct 08. 2021

그날, 내 인생을 바꾼 건 반딧불이었다

기대도 않던 1박 2일의 휴가가 주어졌다. 48시간을 오롯이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찐' 휴가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느라 지친 당신에게 어느 날 갑자기 1박 2일의 휴가가 주어지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주저 없이 여행을 택했다. 지구라는  여행하려고 태어난 사람이니까. 여행할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니까. 이번 기회에 지난 몇 달간 새로 알게 된, 그러나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해보자!


지난 1년간 날 괴롭혀온 질문인 '초등학교 선생님을 계속할 수 있을까? 그만둔다면 뭐해먹고살까? 내 꿈대로 여행사를 차려도 될까? 내 뜻대로 잘 안 풀리면 어떻게 할까? 그땐 가족들을 무슨 낯으로 보지? 플랜 b도 마련하자. 플랜 b는 뭐로 할까? 그래, 마술사! 이건 자신 있지. 그런데 요즘 코로나 때문에 공연할 기회가 없잖아? 에휴, 그냥 초등학교 선생님 계속해야 하나? 그런데 인생 한 번이잖아? 지금 아니면 언제? 죽기 전에 분명 그 때 다른 길 가볼 걸, 후회할 날이 올 거 같은데? 그래도 초등학교 선생님은 어떻게든 버티면 돈은 들어오잖아? 에휴, 넌 돈 벌려고 사냐? 행복하게 살려고 돈 버는거지... 그 말도 맞는데 새로운 도전을 하기엔 나이가... 집에서 나만 바라보는 내 가족들이... 다 좋아. 그런데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로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를 오늘은 끊어내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길을 나섰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올라오는 사진이 바뀌면 가끔 사람들이 묻는다.  이런 곳은 도대체 어떻게 알고 가는 거냐고. 나는 대답한다. 이런 곳만 찾으러 다닌다고.


나에게는 분명 모험 DNA가 있는 듯하다. 남들이 갔던 길은 따라가기 싫다. 제 아무리 멋진 곳일지라도 사람들이 많이 가면 가고 싶지가 않다. 황우지 해안, 엉또 폭포, 물개 바위 등 처음 만났을 땐 날 설레게 했던 장소들도 사람들이 많이 찾게 된 후론 일부러라도 찾아가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 없는 곳에 가만히 앉아 새소리나 바닷소리를 BGM 삼아 사색하는 시간이 가장 좋다. 돈에 치여 타인에 치여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들, 이젠 삶에 치이다못해 제 분노를 쏟아낼 곳만 찾아다니는 사람들 틈바구니를 떠나 적어도 나는 세상과는 다른 흐름, 다른 결로 흐르고 있다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이 느낌이 너무 좋다. 아쉽게도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찾지 않는 숨은 비경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으나 여전히 나의 '숨은 제주를 발견하는 재주' 리스트에는 수십여 곳이 남아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여행지만 찾아다니며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느끼는 황홀감을 전달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바로 이것이 내가 여행사를 만들고픈 이유다.

하여 내가 만들 여행사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남들이 (몰라서) 가지 않는 곳을 갑니다.

남들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만 갑니다.


그중 몇 군데를 돌러보며 여행 코스와 최적의 동선을 짜보는 게 오늘 여행의 목적이었다.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맥주 한 캔 들고 찾던 '그곳'을 최종 목적지로 하여 길을 나섰다. 최소한 거기서는 내 진로에 대한 고민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으리라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그곳이 어딘지는 마지막에 공개하겠다. 내가 여행사를 만든다면 마지막 코스는 무조건 여기다)


그렇게 제리트비체(제주+플리트비체. 처음 만난 순간 플리트비체 국립 공원이 떠올라서 내가 지은 이름이다)도 가보고.

사진보다 실제로 봤을 때 가장 예쁜 곳이다. 나의 1픽

비올 때만 흐른다는 '제2의 엉또폭포'도 가보고.

비온 다음 날 찍은 사진(실제로 보면 꽤 높아서 높이는 10미터쯤 된다)
비가 많이 오면 이런 모습으로 바뀐다.(이번 태풍 때 모습)

가는 길이 험하기에 최소 몇십 년 동안은 유명해지지 않을 '세토닌 폭포'도 가보고,

이런 경치를 보며 도시락 먹으면 뭔들 맛있지 않으리오.

지금은 꽤나 유명해진 속괴도 가보고,

속괴

속괴의 적송이 자연산 대형 화분에 꽂혀있는 듯 보이는 사진도 찍어보고,

(딱 저 각도에서만 이렇게 보인다)


작년까지는 한적해서 참 좋았던 진수내도 가보고,

(주변에 유명한 커피숍이 생겨서 이젠 자주 안 가게 될 듯하다.)


내게 히피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샤크(상어 아님. 샤이 크랩의 줄임말. 나 보면 바로 집으로 숨는 샤이한 게가 산다. 그 게는 내가 무섭겠지ㅠ) 포인트도 가봤다.


마지막으로 일몰 시간에 맞춰 찾은 그곳. 군산오름. 이젠 인터넷에서 일몰 맛집으로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은 안 간다고 해놓고 군산오름을 왜 갔냐고? 사람들은 해가 지면 다들 내려간다. 볼 거 다 봤다면서.


이제 군산오름 정상에는 나 혼자 남는다. 사람들은 모르니까 내려가는 거다. 지금부터 지상 최대의 쇼가 눈 앞에 펼쳐진다는 걸... 이기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다. 그렇다고 내려가는 분들께 '지금부터가 진짜입니다. 내려가지 마세요' 하며 붙잡을 수는 없지 않나?


이런 장관은 사진으로 담아봐야 별 의미가 없다. 캠핑의자 하나 펼쳐놓고 앉아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 장관을, 해가 제 집으로 돌아가며 마지막으로 토해내는 짙은 여운을, 우주라는 화가가 햇빛이라는 물감을 묻혀 하늘이라는 팔레트에 그리는 그림을 눈에 담기만 하면 된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오직 '감탄'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지?

살아있는 동안 가능한 많이 감탄하라!

아직 내겐 감탄할 것이 많이 남아있어서 난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 건지도..


지금 이 순간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BGM이다. 들을 때마다 내 감정선을 하늘로 날려 보내주는 검정치마의 'hollywood' 전주가 울려퍼지는 순간, 기분이 캠핑의자에 앉은 채로 하늘로 붕붕 날아오르려는 찰나, 배터리가, 배터리가...


BGM은 없었지만 풀벌레 소리 좋았다. 멋진 풍경을 봤으니 이젠 사유에 잠길 시간 - 내 투어의 마지막 프로그램은 '달밤에 사치'다. 달밤에 '사유+치유=사치' 하라고. 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BGM도 이미 선정이 끝났다. Sam smith의 Fix you.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만 같다 - 다시 뫼비우스의 띠를 돈다. 빛이 제 집을 찾아간 사이 어둠이 나를 감쌌다.



바로 그때였다! 반딧불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내 주위를 빙빙 돌았다. 움직이면 날아갈까 봐 가만히 있었다. 한 마리는 어느새 두 마리, 세 마리 늘어나더니 수십 마리가 됐다.



내가 알기로는 지금은 반딧불이 날아다니는 시기가 아? 예전에 반딧불이 보고싶어서  12시 넘어 반딧불 보러  적이 있었는데 그 많던 반딧불도 여름이 시작되면 자취를 감췄었다. 그런데 9월인 지금 반딧불이, 이렇게나 많이?? (나중에 찾아보니 늦반디라고 늦게 오는 반딧불들이 있단다)


예뻤다. 참 예뻤다. 그저 황홀했다. 초록 불빛의 무질서한 움직임들이 마치 날 위해 몇달간 준비한 플랜카드 응원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난 결정해버리고 만 것이다. 지금의 감정을 더 자주 느끼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해주기 위해서라도 여행사를 차려야겠다고. 드디어 마음을 결정한 오늘을 기억하자. 날짜를 보니 2021년 9월 11일. 공교롭게도 9.11 테러 20주기여서 기억하기도 쉬웠다.


내 인생, 어떻게 흘러갈지 나도 모르겠다. 다만 언젠가 내가 만든 여행사가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날이 온다면 그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날, 2021년 9월 11일,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꾼 건 반딧불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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