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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Nov 01. 2021

그때 그 선택이 최선이었다 1

올해 1월, 스쿠터 정기점검을 받기 위해 제주시로 향하던 길이었다. 이 추운 날씨에 서귀포에서 제주시 스쿠터로 왕복다고? 걱정은 접어두시라. 나는 스쿠터로 하루 620km도 찍어본 의지의 한국인이다.

(잠시 그날의 썰을 풀자면, 인천-목포 구간을 국도로만 달림. 본래 계획은 '인천 출발 - 대천 1박 - 다음날 목포 도착'이었으나 첫날 저녁 8시에 대천에서 숙소를 알아보던 중 아버지께서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음. 다음날 목포항 출발하는 첫 배를 타기 위해 새벽 5시까지 달림. 내비가 없었기에 '오른쪽에 바다를 끼고 달리면 목포가 나온다'는 계산을 하고 달렸으나, 중간에 이름 모르는 섬에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한참을 헤맴. 결국 하루 동안 620km를 스쿠터로 달림)


다만 거리는 문제가 아닌데 추위는 방법이 없긴 다. 어쨌거나 나는 스쿠터를 끌고 제주시에 가야 한다. 제주에서 베스파 정기 점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그곳뿐이니까.


내가 이용한 도로는 고속화도로였다. 이틀 전까지 내린 폭설로 인해 도로 가장자리마다 채 녹지 않은 눈이 남아있었으나 도로 위에는 눈이 없었기 때문에 운행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내가 타는 베스파 스프린트. 7년째 무사고 기록이 이날 깨졌다


'폭설 후라 그런가, 오늘따라 차가 유난히 많네? 날씨는 왜 이리 춥냐?' 툴툴대며 영혼 없는 질주를 하던 그때였다. 20m 전방 도로 가장자리에 덜 녹은 눈이 보였다. 다 모아봐야 한 줌 정도나 될까 싶은 정도의 눈이었다. 그래도 피하는 나을까? 옆으로 피해보려고 했지만 나는 도로 가장자리를 달리고 있었고 내 옆으로 언제 다른 차들이 쌩-하고 지나갈지 모르는 상황. 그렇다고 급브레이크를 밟기엔 이미 늦어버린. 

이런 경우, 대부분은 속도를 유지하고 그냥 밟고 지나가면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다. 문제는 내 속도가 시속 70km 이상이었고, 하필 내가 밟은 것이 '눈'이라는 사실이었다.


'쉬시식-'

스쿠터가 좌우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을  난 이미 도로 위를 구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지 않나? 죽음의 위기가 닥치면 지난 인생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내가 위험을 감지하고 도로에 나뒹굴기까지 0.5초나 걸렸을까?지난 인생이 스쳐 지나가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구르고 있는 동안 스쿠터와 하늘, 도로가 번갈아 보였는데 빨리 피하지 않으면 위험하겠다는 생각은  번쩍 들었다. 뒤에 차가 따라올지도 모르니 구르면서도 뒤를 확인했는데 다행히 뒤따라 오는 차는 없었다. 앞을 보니 스쿠터가 도로 위를 저 멀리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2초 뒤, 바로 옆 차선으로 차가 쌩-하고 지나갔다.


스쿠터를 그대로 놔두면 뒤차들이 위험해질 것 같아서 재빨리 스쿠터를 도로 옆으로 옮겨 놓고 나니 무릎 부위에 통증이 찾아왔다. 청바지와 내복은 터져 구멍이 뚫려었다. 터진 구멍 사이로 상처를 확인했다. 다행히 뼈는 보이지 않았지만 상처가 심상치 않았다. 벗겨진 피부에 섬유 조직이 엉겨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바로 스쿠터 정비업체에 전화했다.

"11시에 도착하기로 했는데 사고가 나서 제 때 도착 못할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다음에 맡길게요."


119를 불러야 하나?그런데 지금 119를 부르면 119 대원들한테도 민폐고 스쿠터도 다시 찾으러 와야 하잖아? 통증은 심했지만, 걸어보니 걷는 데는 문제가 없었고 스쿠터에 시동을 걸어보니 시동이 걸렸다. 다만 조향장치가 어긋나 핸들 각도를 20도 정도 오른쪽으로 틀어야 직진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발생했을 뿐. 바로 차 없는 도로로 빠져 스쿠터 정비업체로 스쿠터를 몰았다.


패딩 점퍼도 터지고, 내복도 터지고, 청바지도 터지고, 무릎도 터지고. 터진 패딩 점퍼에서 가짜 오리털이 자꾸 삐져나와 내 마음도 터져버렸다. 거지도 이런 상거지가 없었다. 스쿠터 업체 사장님께서 내 몰골을 보고는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를 본 듯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셨는데 나는 스쿠터 견적이 더 걱정됐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수리비로 48만 원이 청구됐다.)


의사는 상처를 보더니 "소독부터 할게요. 피부에 엉겨 붙은 섬유 조직을 빼내야 해서 좀 많이 아플 거예요. 기절할 아프면 소리 지르세요."

"그렇게 아플 거면 마취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물어보려는 찰나,


'으- 으으--'

너무 아프면 소리 조차 낼 수 없다는 것을 그날 알았다. 사실 수술이랄 것도 없었다. 의사 수세미처럼 생긴 뭔가로 상처 부위를 박박 문질러댔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난 침대에 누워 네 가지 생각만 번갈아 했다.


1.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런데 도대체 언제 끝나나요?

2. 내가 다시 스쿠터 타면 사람이 아니다.

3. 아프다고 소리 지르면 없어 보이니까 소리는 내지 말자. 간지는 챙겨야지.

4. 살면서 가끔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자.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의 고통을 떠올리는 순간만큼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고통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는 사람이 될 테니까.


의사 "다 끝났습니다. 잘 참으셨어요" 한마디에 어찌나 감사하던지...


'아닌 낮 중에  하늘나라 로그인할 뻔' 사건은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남겼다. 이제 남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음으로써 그날 일어난 일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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