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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Nov 04. 2021

그때 그 선택이 최선이었다 2

[ '그때 그 선택이 최선이었다 1' 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망가진 스쿠터를 정비업체에 맡기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고 장소를 지나게 됐다. 불과 몇 시간 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튕겨져 나와 가까스로 삶이 선택된 그곳. 어쩌면 그곳의 풍경이 내 생애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온몸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렇다. 운이 나빴다면, 내 뒤에 날 뒤따라 오던 차가 있었다면, 사고 1-2초 뒤 구르고 있는 내 옆으로 쌩-하고 지나간 그 차가, 아마도 시속 100km 가까운 속도로 운행하고 있었을 그 차가, 하필 내 차선 뒤에서 날 뒤따라 오고 있었다면, 지금 이 글은 쓰지 못했을 것이다.


사고 직후엔 '나는 왜 그 사고를 피할 수 없었을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 '왜 하필 난 그때 그 시점에, 그 지점을, 그 속도로 지나갔을까? 도로 위에 녹지 않은 눈이 남아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었는데 왜 하필 그곳을?' 하며 날 괴롭히던 질문들은 사고 전 내가 했던 사소한 선택들이 하나둘 떠오를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다행이었다'는 결론으로 수렴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1. 난 평소 장갑을 거의 끼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은 날씨가 너무 추워서 30분 정도 운행하다가 갓길에 스쿠터를 세워두고 장갑을 꼈다. 그로부터 10분 후 사고가 났다. 신기한 건 그때 낀 장갑이 사고 며칠 전 아버지께서 선물해주신, 두툼한 장갑이었다는 것. 내가 갖고 있던 얇은 장갑이었다면... 아, 상상하기도 싫다.


2. 난 평소 내복을 입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은 날씨가 너무 추워서 두꺼운 내복을 입었다. 결국 청바지와 내복 모두 구멍이 나고 말았는데 그날 평소처럼 청바지만 입었다면... 아, 상상하기도 싫다.


3. 난 평소 패딩을 잘 입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은 날씨가 너무 추워서 내가 갖고 있는 옷 중 가장 두꺼운 패딩을 꺼내 입었다. 평소처럼 얇은 잠바를 입었다면... 아, 상상하기도 싫다.


4. 사고 당시 무릎부터 바닥에 찧으면서 동시에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기 때문에 탄력을 받아 옆으로 구를 수 있었다. 두꺼운 패딩을 입었기 때문인지, 넘어지는 동시에 을 짚었기 때문인지 얼굴은 도로에 닿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을 때 얼굴이 도로에 같이 닿았다면... 아, 상상하기도 싫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미 일은 일어났고 그 사건을 일어나게 만든 경우의 수는 그 조합이 무한대에 가깝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후회하며 돌아볼 필요 없다는 것. 아침에 일어날 때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날까 5분만 더 자고 일어날까, 아침 식사는 먹을까 말까, 먹는다면 어떤 메뉴로 먹을까, 신발은 현관에 나와있는 신발을 신을까 아니면 신발장 안에 있는 신발을 신을까, 와 같은 사소한 선택 하나하나가 모여 그날의 사건을 만들었음을 기억하자. 내가 그중 단 하나만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사건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더 나은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모르지만 더 나쁜 방향으로 흘렀을지 누가 알겠는가.


이제 나에겐 단 하나의 선택지만 남았다. '그때 내가 했던 선택들이 최선이었다'라고 믿는 것. 그나마 그랬기 때문에 덜 다친 거라고, 그때 내가 했던 선택보다 나은 선택은 없었다고, 믿어버리는 거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문제니까, 마음 편하게.


나는, 그날 기어코 눈을 밟고만 선택을 후회하던 나는, 이그날 두툼한 장갑을 꼈던, 내복을 입었던, 두꺼운 패딩잠바를 입었던 선택에 대해 감사한다. 내 뒤에서 바로 뒤쫓아오지 않고 옆 차선으로 운행해 준 차에게도... 이렇게 살아남아 글로나마 그날 그 사건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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