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인생의 OST 1'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다음은 내 인생의 OST 목록이다. 기회에 당신의 인생 OST 목록도 만들어보시길.
어린 시절부터 내 음악 취향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했다.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버스 장기자랑에서 ‘향수’를 부른 것만 봐도 얼추 짐작이 가능하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되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아무도 모르는 노래를 혼자 감정 이입하여 부르고 있는데, 4절까지 노래가 이어지자 이제 그만 하라며 작은 시위(?)가 일어났다. (참고로 이 노래는 5절까지 있다) 초딩의 시대를 앞서간 실험 정신과 패기에 노래를 끊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시던 담임선생님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위 사건이 발생한 때는 바야흐로 1990년대 중반, 서태지와 아이들의 혜성과 같은 등장으로 대중음악 시장이 댄스 음악 중심으로 재편되던 시기였다. 아이들이 동요를 부르다가 어느 순간 유행가로 갈아타던 그때, 나는 우리 집 차만 타면 별수 없이 들어야 했던, 하지만 듣다 보니 좋아하게 된 노래들의 제목을 아버지께 여쭤보고 있었다.
그때 들리던 음악들은 산울림, 트윈폴리오, 송창식, 임지훈 등 7080 포크송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그중에서도 산울림의 노래를 유달리 좋아했다. ‘회상’, ‘청춘’, ‘안녕’, ‘너의 의미’ 등 주옥같은 노래가 많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때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따라 불렀던 ‘독백’의 가사가 가슴 속에 사무친다.
‘나 혼자 눈 감는 건 두렵지 않으나
헤어짐이, 헤어짐이 서러워.
쓸쓸한 비라도 내리게 되면 금방 울어버리겠네.’
어린이의 삶이 삶을 배워가는 여정이라면 어른의 삶은 죽음을 배워가는 여정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어찌어찌 세상에 떠밀려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이제 혼자 눈감는 게 두렵지 않다.
그런데 헤어지기 싫은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난다. 더 서러워져도 좋으니 떠날 때 헤어짐이 서러워지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언젠가 내가 세상 떠나는 날엔 내가 서러워하는 만큼 그들도 같이 서러워해 줬으면 좋겠다. 그럼 내가 바라는 것처럼 이 세상 소풍 마치고 하늘로 돌아가는 날, 웃으면서 떠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살짝 서글퍼진다.
듣고 있으면, ‘쓸쓸한 비라도 내리게 되면 금방 울어버릴’(‘독백’의 마지막 가사) 것만 같은 노래다.
* 1가수 1노래의 원칙에 따라 OST에서 아쉽게 제외된 노래가 하나 있다. 산울림의 ‘안녕’. 대학교 때 여러 사람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분위기 살린답시고 이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깔아놓았다. 눈물만 펑펑 흘리고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 한 채 서둘러 도망 나와야 했다. 이후로 내 인생의 금지곡이 됐다.
이 노래와 슬픈 감정이 만나면 눈물샘 수도꼭지가 고장 나버린다. 누군가와의 헤어짐이 힘들어 잠이 오지 않는 밤, 이 노래를 들으면 울다 지쳐 잠들 수 있다.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이, 그리움에 한없이 울 수 있는 헤어짐은 잦은 게 좋은 걸까? 어쨌든 모든 헤어짐을 슬픈 것이니 드문 게 좋은 걸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어느 날엔가는 아버지 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영어가 들렸다. 아버지께 누가 부르는 거냐고 여쭤보니 '사이먼 앤드 가펑클' - SG 워너비는 그들 같은 가수가 되고 싶은 바람을 담아 Simon & Garfunkel의 약자 SG에 워너비wannabe를 붙여 팀명을 만들었다- 이라고 하셨다.
처음 듣는 데도 너무 좋았다. 바로 테이프를 빌려서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다. 나중에는 영어 알파벳도 모르는 초딩이 노래를 외워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이들을 통해 처음 팝 음악을 알게 됐고, 그렇게 또 하나의 신세계가 열렸다. 훗날 아내에게 프러포즈할 때 이 노래의 가사(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써먹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인생의 OST 목록에 올라갈 자격이 충분하다.
Bohemian Rhapsody를 처음 듣던 밤을 또렷이 기억한다.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 시간, 선물로 받은 중고 소니 CD 플레이어에 Queen의 라이브 앨범을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지금까지 들었던 음악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만난 느낌, 어쩌면 음악이란 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겠구나! 노래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Simon & Garfunkel이 나를 팝의 세계로 이끌었다면 Queen이 록의 세계로 인도하사, 나의 본격적인 음악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사형수의 애절한 이야기를 담은 이 노래는 영국의 음악 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팝송 1위에 랭크됐을 정도로 대중음악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1991년 프레디 머큐리가 세상을 떠나면서 더는 그들의 라이브를 볼 수 없다는 게 못내 아쉽다. (2014년 프레디 머큐리와 베이시스트 존 디컨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이 내한했다. 역시 퀸다운 멋진 무대였지만 프레디 머큐리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다)
프레디 머큐리의 가창력과 특유의 무대 매너는 정말이지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 남겨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전히 그는 내 마음속 최고의 보컬이다.
20대 초반 처음 이 노래 뮤직비디오를 봤을 때의 떨림을 잊을 수 없다. 집에 돌아오면 Daum 음악 감상 카페에서 그날 업데이트된 뮤직비디오들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무심코 열었던 뮤직비디오 한 편이 나의 20대, 아니 내 삶 전체를 뒤흔들 줄이야!
처음 시작할 때 나오는 실로폰 소리에 마음이 촤악 가라앉더니, 톰 요크의 목소리가 나오자 갑자기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이젠 감성이 무뎌진 건지, 속세에 찌든 건지 음악 듣다 울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2012년 라디오헤드 첫 내한 공연(2012 지산 록 페스티벌) 때 첫 곡을 듣자마자 다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인터넷 ID를 ‘라디오헤드 내한공연 추진위원회’로 써가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리뷰를 쓴 라디오헤드 베스트 앨범을 만들어 선물해가며, 그동안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가?! 나의 20대 감성의 8할은 라디오헤드가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이야 감정 따위에 쉽사리 휩쓸릴 일 없지만 한창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에는 잊고 싶은 일이 있을 때마다 이 노래를 무한 반복해놓고 잠들고는 했다. 꿈속에서도 ‘띠디디딩- 띠디디딩-’ 멜로디가 배경음악으로 떠다니는 듯 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다음 날 아침이면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나에겐 음악으로 치유가 가능함을 알게 해 준 모르핀 같은 노래, 나의 20대 감성을 지배한 노래, 잊고 싶은 일이 있을 때마다 망각을 선물해주던 노래, 그래서 여전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노래이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끔 감정의 밑바닥까지 가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래야 다시 치고 올라올 수 있다. 이 노래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No alarms and no surprises...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던가. 사실 인생은 수많은 희극과 비극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인생은 더 많은 희극을 맞이하는 것보다 비극을 덜 맞이하는 삶이었으면 한다.
난 지금 이대로가 좋다. 계속 이렇게, 끝까지 흘러갔으면 좋겠다. 어떤 알람이나 놀라움 없이...
나는 인생을 그린데이처럼 살고 싶다.
그들의 음악처럼 단순하지만 신나게, 남 눈치 안 보고, 내 멋대로 살고 싶다.
한번은 방송으로 생중계되던 뮤직 페스티벌에서 공연 관계자가 이들에게 공연 시간을 줄여달라고 요구했던 적이 있다. 그것이 저스틴비버와 어셔의 공연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차린 우리의 빌리 조 암스트롱(그린데이 보컬, 이하 빌리)은 남은 시간 내내 비방용 쌍욕을 마음껏 시전하시고는 끝내 연주하던 기타(퍼포먼스용 가짜 기타가 아닌 진짜 기타였다)를 무대 위에서 부숴버렸다! 월드와이드 똘끼라 할 만하다.
그렇게 그들처럼 살다보면, 그들처럼 슬럼프를 겪는 날도 올 것이다. 그때, 그들처럼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해 제 2의 전성기를 누린다면 그보다 드라마틱한 인생이 또 있을까? 그들을 화려하게 부활시켜 준 앨범 『American Idiot』의 첫 타이틀곡을 미국 대통령을 신랄하게 까는 노래(American Idiot)로 들이대는 배짱 하며, 2010년의 역사적인 내한공연에서 보여준 2시간 반의 헌신적인 라이브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취향저격이다.
이 노래는 사실 그들의 수많은 히트곡 리스트에도 없고 그들의 공연 세트리스트에도 못 끼는 소위 ‘못 뜬 노래’다. 하지만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노래이다. 지금껏 살면서 이 노래처럼 2분 안에 기분을 확실히 띄워주는 노래를 들어보지 못했다. 이 노래만 나오면 반사적으로 헤드뱅잉을 하게 된다. 요즘은 내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 둘째 아이가 이 음악만 나오면 헤드뱅잉을 한다.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보다.
지금 시간 새벽 4시. 나는 지금 ‘The Grouch'를 들으며, 헤드뱅잉을 하며, 글을 쓰고 있다.
1990년대 말, 그린데이가 일으켰던 네오펑크 붐이 서서히 사그라들 때, 우리나라에서는 크라잉넛, 노브레인, 레이지본 트로이카가 이끄는 조선 펑크 전성기가 시작됐다.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가 인디 음악이라는 단어를 대중음악 카테고리에 새겨놓더니, 뒤이어 이름이 특이한 펑크 밴드가 레이더망에 잡혔다. 노브레인(No Brain).
‘우리나라에도 진짜 펑크가 나타났다!’
하루는 길을 걷다가 노브레인의 공연 포스터를 발견했다. 장소는 옆 동네의 이름 없는 지하 클럽. 신의 계시인가, 주변 친구들을 꼬드겨 봤지만 노브레인이 누구냐는 대답만 돌아왔고 결국 혼자 클럽을 찾았다. 보컬의 카랑카랑한 금속성 보이스도 일품이지만, 정말이지 차승우의 기타 치는 폼은 월드 클래스다. 만약 기타 치는 폼으로 점수를 매기는 대회가 있다면 국가대표로 보내고 싶을 정도로 멋있다. 그날 밤, 흥이 덜 가라앉혀진 나는 집에서 빗자루 잡고 차승우의 기타 플레이를 따라하며 광란의 밤을 보냈다.
무엇보다도 노브레인이 가장 멋있었던 때는 일본의 후지 록 페스티벌에서였다. 당시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으로 한일 분위기가 한창 냉각됐던 시기였는데, -언제 냉각기 아니었던 때가 있었겠냐마는- 보컬 불머리가 일본 TV로 생중계되던 록페 무대에서 일본 관객들에게 ‘여러분 일본 교과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묻더니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를 이빨로 찢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외쳤다.
"Fuck the Japanese imperialism(제국주의!)"
나도 모르게 관객들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순간, 이어지는 연타석 홈런.
"This is the Korean anthem(애국가)“
애국가에 이어 분노가 덜 가신 목소리로 불렀던 노래가 바로 ‘청년폭도맹진가’다. 난 지금도 유튜브에서 이날의 공연 영상을 보고 있으면 피가 뜨거워짐을 느낀다.
그날 그들의 모습은, 섹스 피스톨즈를 보는 듯했다. 펑크 그 자체였다는 뜻이다.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던 멜로디가 하나 있었다. 차돌가라 불리는 제주일고의 축구 응원가. 매년 봄 열리는 백호기 축구대회 구경을 가면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게 됐을 정도로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그 학교 출신 친구들에게 노래를 누가 만들었는지 물어보면 한결같이 가사는 학교 선생님이 쓴 거로 알고 있는데, 작곡은 누가 했는지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끝내 노래의 작곡가는 찾지 못했다. 궁금해 미칠 것 같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하며 마음 한 쪽에 보관해두었다. 해묵은 궁금증은 몇 년 후 크라잉 넛에 의해 해소됐다. 멜로디의 주인은 ‘독립군가’였다. 그렇게 크라잉 넛과의 연결고리가 하나 늘었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친구 둘과 함께 떠났던 전국일주,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드럭이었다. 대한민국 펑크의 성지라 불리던 지하의 허름한 클럽에서 레이지본과 크라잉 넛이 내 앞에서, 마음만 먹으면 마이크도 잡을 수 있는 거리에서 -실제로 나와 내 친구는 보컬의 마이크를 빼앗아 노래를 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노래를 불렀다. 반항기 가득한 눈빛하며 클럽 특유의 거친 사운드, 노는 물이 다른 서울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몸부림을 보며 그날, 나 또한 펑크 키드로 거듭났다. 그 후로 들었던 수많은 펑크 음악들은 하나같이 일단 달리고 보는 특징이 있었다. 그런데 유독 달리면서도 마냥 신나게 달릴 수만은 없는 노래가 바로 이 노래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올 때마다 전장 어디선가 불렸을 이 노래의 가사를 되뇌다보면 절로 숙연해진다. 펑크는 달릴 때 가장 펑크답지만 가끔은 달리지 않아도 펑크다울 때가 있다.
이 노래가 그렇다.
가끔 내가 가는 길의 방향이 맞나 싶을 때, 나는 지금 가는 길의 방향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누군가 그 방향이 아닌 거 같다고 얘기할 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적어도 나에게는) 최선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나는 이 노래를 부른다.
I'm free to be whatever I
whatever I choose And I'll sing the blues if I want
내가 뭘 하든 나는 자유로워.
블루스를 부르고 싶으면 블루스를 부르는 거야
‘뭘하든 내가 선택하는 거야. 난 내 갈 길 간다’
내 인생은 나답게,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갈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응원의 메시지. 듣고 있으면 힘이 난다. 따라 부르다 보면 내가 가는 길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저 밑에서부터 솟구친다.
그들의 그룹명처럼 내 인생의 오아시스 같은 노래다.
군대 노래방에서 병장 스웨그(SWAG)를 뽐내며 군대 내 힙합 대중화에 힘쓰던 시절, 후임병의 추천으로 처음 누자베스를 알게 됐다. 이 노래를 듣기 전까지 내가 생각하는 힙합은 ‘총알보다 강한 mc의 철학(타이거 JK의 가사)을 라임과 플로우로 구조화하여 자신감 있게 내뱉었을 때 나오는 멋’이었다. 누자베스의 재즈 힙합을 듣고 난 후, 나는 힙합의 정의에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추가했다.
그중에서도 Luv pt2는 비트, 래핑, 가사 하나 빠질 것 없는 랩 클래식이다. 누자베스의 이 아름다운 비트위에 결혼식 축가를 랩으로 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노래다.
* 옆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의 누자베스는 몇 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Rest in peace & Rest in beats...
10. Imagine - John Lennon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 중 누가 더 위대한가? 이 문제는 전 세계 대중음악 팬들의 가장 큰 논쟁거리 중 하나이다.
나는 존 레논 편이다. 사실 노래만 놓고 보면 둘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만, 나는 존 레논의 사상과 그의 드라마틱한 삶에 더 끌린다.
You may say I'm a dreamer
당신은 나를 몽상가라 말할지도 몰라요
But I'm not the only one
하지만 저와 같이 말하는 사람이 저 뿐만은 아니에요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언젠가는 당신도 함께하리라 믿어요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세계는 결국 하나가 될 거예요
우리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게 가능할까 하는 현실의 벽에 가로막혔을 때, 이 노래는 세상을 바꾸는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을 일깨워준다.
일단 나부터 시작하자. 그리고 함께하자고 손을 내밀자.
음악으로 세상을 바꾸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밥 말리의 생애를 따라가면 그 속에 답이 있다. 자메이카도 한 때 우리나라처럼 좌우의 극심한 이념대립으로 나라가 두 동강 났던 때가 있었다. 당시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르며 월드 투어를 돌던 밥 말리는 음악으로 국민들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일념 하에 자메이카에서 대형 공연을 열기로 한다. 그러나 공연을 며칠 앞두고 자신들의 편에 서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던 극단주의자들의 공격에 총상을 입으면서 계획에 차질이 빚어진다. 예정대로 공연을 열 경우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 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켰다.
공연이 절정에 달할 무렵 이미 앙숙이 되어버린 양당의 지도자들을 불러 무대 위에서 악수시키는 장면은 언제 봐도 감동적이다.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음악으로 해낸 것이다. 그때 밥 말리가 불렀던 노래가 'War'이며, 이 모든 과정은 밥 말리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MARLEY』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훗날 이 노래는 또 하나의 전설적인 장면을 남기는데...
아일랜드 출신의 여가수 시네이드 오코너가 삭발 헤어스타일로 여전사 느낌을 물씬 풍기며 무대 위에 오르자 장내의 거의 모든 미국인이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사연인즉슨, 그녀는 평소 솔직하고 거침없는 언행으로 매번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특히 평소 미국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 왔던 터라 그녀가 등장하자 공연장 내 다수의 미국인이 야유로 답한 것이었다. 노래를 부른다 해도 들릴까 싶을 만큼 공연장이 떠나갈 듯한 야유와 분노 어린 시선이 가녀린 그녀의 온몸에 꽂혔다. 과연 저 상황에서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마음을 졸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 그리고 이어지는 세기의 명장면!
그녀가 갑자기 세션들의 연주를 멈추더니 무반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장내는 이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노래가 끝나고 무대 뒤에 가서야 눈물을 흘리며 누군가의 품에 안긴 시네이드 오코너. 나는 그 장면에서 음악의 힘을 느꼈다. 수많은 사람을 한 순간에 침묵에 잠기게 하고,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눈물을 삼킬 수 있게 만드는 강력한 힘!
누가 봐도 그 공연장에 있던 사람들 중 유일한 승리자는 그녀였다. 그때 그녀가 불렀던 노래가 밥 말리의 ‘War’이다.
(그녀는 가사 중 ‘인종차별’은 ‘성적학대’로, ‘우리 아프리카인’이라는 가사는 ‘어린이들’로 바꿔 불렀다.)
'war'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떤 인종은 우월하고 어떤 인종을 열등하다는 철학이 완전히 폐기되고 영원히 버림받을 때까지 전쟁은 어디에나 있는 거야.
어떤 국가에서건 계급이 사라질 때까지, 인간의 피부색이 눈동자 색보다 중요하지 않게 될 때까지 나는 전쟁이라고 말할 거야.
인종과 관계없이 모든 인간에게 기본적인 권리가 동등하게 보장될 때까지 나는 전쟁을 말할 거야. (중략)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이 비열하고 불행한 체제와 아동학대, 그리고 피지배 계급을 억누르는 굴레가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모든 곳은 전쟁인 거야.
이 노래를 버스 안에서 처음 듣고 울었다던 김광석처럼 나 또한 처음 듣고 한동안 먹먹해졌던 기억이 있다. 한 평생을 함께 했던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이 느꼈을 만감이 교차하는, 직접 겪지 않으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슬픔을 꾹꾹 눌러 담았다. 노래 가사처럼 세월이 흘러감에 흰머리가 늘어감에 모두가 다 떠나갈 때, 내 손을 꼭 잡아줄 수 있는 사람 하나 남길 수 있다면 떠나는 길이 외롭지만은 않을까.
그랬던 그가 왜 먼저 먼 길을 떠나갔는지, ‘사람들이 노래와 삶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다른 가수들은 가수랍시고 노래를 선택하겠지만 나는 삶을 선택하겠다’던 그가 왜 먼저 떠나갔는지. 진실이 꼭 밝혀졌으면 한다.
술 땡기는 날이면 늘 그가 그립다.
결혼식의 신랑, 신부 입장곡과 행진 음악을 뭐로 할지 밤새워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결국 신랑 등장 음악은 제목이 선정 이유를 말해주는 퀸의 'I was born to love'로, 신부 등장 음악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잘 골랐다고 생각하는 원스(Once) OST의 ‘Fallen from the sky'로 결정했다. 마지막 행진곡이 문제였다. 도무지 어울리는 노래가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선택한 노래는 콜드플레이의 'Viva la vida'. 웅장하고 비장한 분위기가 결혼식 행진 분위기와 제법 어울렸지만, 사실 가사는 결혼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다. 제목의 뜻(인생이여 만세)은 결혼식 행진과 잘 어울리는 제목이었으니 그걸로 됐다며 정신 승리를 했다.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시규어 로스의 'Festival' 클라이맥스 부분을 결혼식 행진 음악으로 쓸 것이다. 내 인생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이 노래가 BGM으로 울려 퍼진다면 황홀함에 몸서리쳐질 것만 같다. 영화 127시간에서 주인공이 탈출하는 장면에 BGM으로 쓰인 노래이기도 하다. 영화의 결말을 알고 보면서도 그 장면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 것은 순전히 음악의 힘이다.
누군가는 이 노래를 장례식 배경음악으로 쓰고 싶다고 했다. 그날이 노래 제목처럼 ‘축제(Festival)’ 같을 수만 있다면 잘 어울릴 것도 같다.
검정치마는 육아휴직 최대의 발견이다. 그의 음악을 듣자마자 나 자신을 책망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제야 들었냐고.
검정 치마의 음악은 버릴 게 없다. 1번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 까지 다 좋다. 좋은 곡들과 더 좋은 곡, 특별히 좋은 곡들만 존재한다. 때문에 다 좋은 노래 가운데 가장 좋은 곡 하나를 뽑는 게 쉽지 않았는데, 그중 ‘젊은 우리 사랑’을 뽑은 것은 가사의 역할이 크다.
오- 젊은 사랑 그것은 너무도 잔인한 것
어-린 마음에 몸을 실었던 내가 더 잔인한가
결국 이별로 끝나게 될 것을 알면서도 강한 끌림에 마음을 실을 수밖에 없었던 젊은 날의 치기 어린 사랑을 이처럼 아름답게, 그것도 두 줄 안에 담아낸 노래 가사가 있었던가. 7080 포크 전성시대의 쎄시봉을 연상시키는, 아날로그 포크 감성이 진하게 배어 나오는 통기타 반주에는 옛 추억을 강제 소환하는 마성의 힘이 있다. 모든 스쳐 가는 것에 대한 찬가처럼 들려서 들을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시리다.
나의 EDM(Electronic Dance Music) 입문곡. 2013년, 인터넷에서 UMF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길래 뭔가 하고 찾아봤더니 새롭게 선보이는 일렉 페스티벌이란다. 록 페스티벌 비슷한 건가? 시간이 흐를수록 인터넷 음악 커뮤니티에서 온통 UMF 얘기로 시끄러웠다.
당시 EDM을 클럽에서 DJ가 트는 음악 정도로만 이해하던 시절이라 헤드라이너 음악이나 들어보자 하고 처음 들었던 음악이 아민 반 뷰렌(Armin van burren)의 ‘Intense'였다. 그렇게 또 하나의 신세계가 열렸다. 결국 이 노래를 라이브로 듣기 위해 UMF2013에 처음 참가하게 됐다.
여담이지만, 유튜브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네덜란드 국왕 즉위식 생중계 실황에도 아민 반 뷰렌이 등장한다. 국왕이 탄 배가 강변에 멈추고 국왕 일가가 내린다. 국왕은 한 공연장으로 향하는데, 그곳에는 오케스트라 공연이 한창이다. 국왕이 지휘자에게 다가가 악수를 건넨다. 그런데 가만 보니 뒤에 DJ 세트가 설치되어 있다! 다음 장면에서 국왕이 DJ와 악수를 한다. 그때 국왕과 악수하던 DJ가 아민 반 뷰렌이고, 그때 흘러나온 음악이 ‘intense’이다. 제목처럼 강렬한 장면이다.
국왕 즉위식에서 국왕이 EDM 공연장을 찾는 나라. 네덜란드도 참 멋진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 내 인생의 OST 계속 업데이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