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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Dec 02. 2019

밴 라이프의 서막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현실이다

얼떨결에 혼자 살게 됐고, 무한의 자유를 누렸고, 난 뭘 할 때 행복한 사람인지 확실히 알게 됐고, 행복한 감정을 느낄 때마다 가족이 그리워졌고, 주말마다 만났고, 헤어질 때마다 울었다.

헤어질 때 우는 행위만큼 사랑의 확실한 증거는 없기에 슬픈 눈물은 아니었다. 공항이 가까워 올 때마다 울기 시작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시야의 절반은 수면 아래로 잠겼다. 눈물이 떨어지고 나면, 다시 세상이 환해졌고, 인생은 참 아름답다고 느꼈다.


한 달 전, 대학원 파견 시험을 봤다. 합격하면 아내가 다니는 대학원에 함께 다니게 될 터였다. 주말마다 헤어질 때 서로 눈시울 붉힐 일은 없겠지 하는 마음에 나름의 준비를 했지만, 역시 나는 공부랑은 체질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만 재확인하고 보기 좋게 떨어졌다.


대학원 시험은 서술형 시험과 면접으로 이뤄줬다. 서술형 시험은 다행히 내가 쓰기 좋은 주제가 나와서 1시간 주어지는 시험에서 50분 만에 답안지를 제출하고 멋지게 퇴장했다. 시험장에서 나오고 나서 같이 시험 본 후배를 학교 밖에서 기다리는데 시간이 돼도 후배가 나오지 않았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전화기를 왜 꺼놨지?


시간표를 다시 확인했다. 시험 시간은 1시간이 아니라 2시간이었다. 사람들은 그게 말이나 되냐고, 어떻게 시험 시간도 확인 안 하고 시험을 볼 수 있냐고 했지만, 자책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에서 떨어졌다는 건 캠핑카에서 살게 될 확률이 늘어난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무의식 속에서는 차라리 시험에 떨어지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캠핑카를 살 것인가, 말 것인가?

아니, 캠핑카를 '사도 될 것인가, 지금 사면 안 되는 것인가?'


캠핑카 뉴스 기사에는 늘 이런 댓글이 달린다.

'캠핑카 살 돈이면 호텔에서 편하게 자면서 여행 다니는 게 낫지 않나요?'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나는 여기에서 살(Living) 거라서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내년에 캠핑카에서 살게 된다면 대략 5백만 원(집세, 관리비, 전기요금, 수도세 등)을 아낄 수 있기에 사는(Buy) 쪽으로 마음이 조금 기운다. 캠핑카를 여행 목적의 세컨카로 쓸 게 아니라 나의 첫 차로, 일상생활에서도 쓸 수 있는 데일리 카로 활용할 거라서 그들과는 또 다르다. 때문에 위시리스트에 올려놓은 캠핑카도 대놓고 '나는 캠핑카입니다'라고 자기 PR 하는 캠핑카가 아닌 '캠핑카인 듯, 캠핑카 아닌, 캠핑카 같은' 녀석으로 골랐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돈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걸 사는 순간, 빚이 더 늘어날 것이고, 이미 있는 빚의 대출 상환기간도 자동으로 연장될 것이다. 일단 마음을 접고 안정된 미래를 도모해야 하는가?


그때 내 눈에 들어온 뉴스 하나.

[내년 캠핑카 법 개정으로 가격 대폭 상승 예상]


내가 봐 뒀던 캠핑카는 대략 천만 원 가까이 오른다고 했다.

그래. 이건 하늘의 뜻이다. 가야 할 때 가지 않으면 가려할 때 가지 못한다.

난 은행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계약했다.


드디어 내년에 캠핑카에서 살아보게 됐다. TV도 없고 샤워실도 없고 세탁기도 없지만, 몇 달 동안 TV, 냉장고, 세탁기 없이 살아본 내공으로 미니멀 라이프에는 이미 단련이 되어있다. 캠핑카에 냉장고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감사하던지...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나는 다른 감정은 다 이겨도 두 가지 감정에는 늘 진다. 설렘과 연민.

행복이라는 큼지막한 뭔가가 다가오는 설렘은 빚이 늘어난다는 두려움을 덮고도 남는다. 설렘이 두려움을 덮고도 남을 때마다 나는 늘 내 길을 갔고, 그리하여 단 한 번도 내 선택에 후회해본 적이 없다.

지금 사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캠핑카에서 살게 될 날이 오겠지만, 그건 그때의 행복이다.

난 지금 행복해지고, 내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하겠다.


내년은 아마도 내가 가장 나답게 사는 한 해가 될 것 같다.

설레는 기분은 늘 좋다.

설렘이 지속되는 한, 소풍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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