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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Apr 17. 2020

내가 가는 곳은 길이 되고, 멈추는 곳은 집이 된다

밴 라이프 D+1

모험은 늘 설렘을 가져온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렘이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덮고도 남는 사람만이 모험의 자격을 가진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집 앞 골목길을 따라 몇 분만 걸어가면 냇가가 나왔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궁금한 게 생기면 그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나는, 어느 날 문득 냇가의 출발점이 궁금해졌고, 무작정 냇가를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뭐, 톰 소여의 모험도 아니고, 그때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내 유전자는 모험 DNA를 타고났으나 내 체력은 모험가의 자질을 타고나지 못했기에, 나는 얼마 가보지도 못하고 지쳐버렸고 날이 어두워지자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위험한 상황 또는 부모님의 잔소리를 피할 수 있다는 한 줌의 현실인식이 내 발걸음을 집으로 되돌렸지만, 그때의 설레던 마음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때의 내 표정이 어땠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사각형 TV, 스마트폰의 작은 세계에 갇혀 더 멀리 가볼 용기를 내지 않는, 아니 더 멀리 어떤 세상이 있는지 알려고도 안 하는 요즘 아이들에 비하면 분명 행복한 어린 시절이었다.

다행인 건, 내가 닿은 곳 저 너머의 세상이 궁금한 건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것. 그래서 내 삶은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 난 여전히 오늘의 저녁노을이 어떤 색으로 하늘을 색칠할지 궁금하고, 내일은 또 어떤 일들이 나를 설레게 할지 궁금하다는 것. 이 마음들이 모여 내 집을 2평짜리 캠핑카로 바꿔놓았을 테니, 다시 한번 나의 어린 시절에 감사를.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뻘짓을 하든, 자기 앞가림은 하겠지 하며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게 해 주신 부모님께는 찬사를...




내가 캠핑카에서 살기로 했다고 하자, 주변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언젠가는 그럴 줄 알았다'와 '그 정도까지는 예상 못했다'

누군가는 런 조언을 해줬다. "캠핑카는 두 번 좋대. 살 때와 팔 때"

나를 뭐로 보나. 캠핑카 사장님이 캠핑카의 장점으로 사고 나서 가격이 폭락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을 때도 나는 무심히 대답했다.

"팔일은 없어요. 애들 다 크면 그냥 여기서 평생 살라구요."


분명 우리는 환상의 조합이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소유욕이 별로 없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서른한 살에 버킷리스트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도 90개가 넘어가는 버킷리스트 중, 갖고 싶은 건 딱 둘 뿐이었다. (그 둘 중 하나가 캠핑카였으니 이제 남은 장바구니에는 클래식 바이크 로얄 엔필드 하나만 남았다.) 

언젠가부터 타인의 욕망과 나의 욕망을 구분하게 됐고, 그때부터 남을 따라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이 가지 못한 길을 내가 가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도. 그때 썼던 버킷리스트를 보며 나는 내 삶의 정체성이 '히피와 보헤미안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확신했다.


집 욕심도 없다. 크고 좋은 집을 평생 꿈으로 간직한 사람도 많던데, 나는 그런 집에 살아보지 않아서 그런지 작고 아담한 집이 좋다. 크고 좋은 집에 살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자기 합리화는 아닌가 수백 번도 넘게 스스로에게 되물었지만, 언제나 답은 그대로였다. 내가 그런 사람인 걸 어떡하냐.


난 그냥 나를 하자. I do me.


작년의 경험만 봐도 그렇다. 작년에 우연한 기회로 40평 넘는 집에 석 달간 혼자 살게 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난 방 한 칸에서만 살았다. 집이 아무리 넓어도 실제 우리가 쓰는 공간은 집 전체 공간의 40% 정도라는 연구 결과를 어느 책에선가 봤다. 난 20%나 썼을까?

그 후 6평짜리 원룸으로 집을 옮겼을 때, 좁아진 집 면적과 반비례하여 내 행복지수가 급상승하는 걸 느꼈다. 소유로 인한 스트레스로부터의 해방! 이 주제로 깊게 들어가자면, 논문 하나 분량은 나올 것 같고...

암튼, 그때 결론을 내렸다. 나에게는 단순하고 간소한 삶,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같은 삶이 가장 어울리는 삶이라는 것을. 이것이 내가 2평짜리 집에 살아도 누구보다 행복한 이유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말했다.

"이른 아침 산책의 기대로 마음이 설레어 잠에서 떨쳐 일어나지 않는다면, 첫 파랑새의 지저귐이 전율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눈치채라. 당신의 봄과 아침은 이미 지나가버렸음을"


여수발 제주행 배에 내 집을 실어 남해 어딘가를 미끄러져 가고 있는 지금, 난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 마냥 마음이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소로가 얘기하고 싶었던 게 이 느낌이었구나! 소로 할배, 전 당신처럼 통나무 집 사는 건 체질에 안 맞을 거 같구요. 그냥 남은 인생 여행하듯 살랍니다. (우연히도 내 캠핑카를 만든 회사 이름은 '월든' 캠핑카다)


내 봄과 아침은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


2020.3.29

밴 라이프의 시작을 앞두고. 남해 어딘가. 설렘을 가득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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