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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Apr 27. 2020

캠핑카 첫 정박지의 조건

하루 한 번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사람은 인류의 조상이 살던 아프리카의 사바나 초원과 비슷한 환경에 끌린다는 이론이 있다.

이른바 아프리카 사바나 가설. 이건 본능적인 끌림이다. 인류가 수렵 채집으로 생존을 이어가던 시절, 앞이 탁 트여있지 않은 공간은 공포 그 자체였다. 언제 어떤 맹수가 날 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잠식당한 인간은 언제든 숨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두고 앞에는 탁 트인 공간을 두어 맹수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이 마음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유전되어 인류는 지금도 앞이 탁 트인 공간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가설이 아프리카 사바나 가설이다. (우리가 카페를 갈 때 모서리의 벽을 등지고 앞이 탁 트인 자리를 선호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나도 카페에 가면 주로 구석에 가서 넓은 공간을 마주 보고 앉는다)     


내가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옛날 인류의 조상이 바다를 보며 느꼈을 감정을 지금 내가 바다를 보며 느끼고 있다니, '그 옛날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이 세상을 살다가 갈 때가 되어 떠났다'는 사실은 '한 문장 안에 결코 담을 수 없는 그 무엇'이리라. 먼 훗날 그 사람의 마음에 제 마음을 포개어보는 누군가가 있는 한...

우주의 나이를 1년으로 치면 인류는 12월 31일 11시 46분에야 등장한다고 한다. 우주의 나이는 가늠도 못하겠고, 그 옛날 바다를 바라보며 삶의 의미를 되새겼을 인류의 지난한 세월이라도 가늠해보려다 이내 포기한다. 그저 파도 소리에 귀 기울여 ‘지금, 나, 여기’를 느낄 뿐...


잔잔한 바다에서도 파도는 친다.


바다를 질릴 때까지 바라본 사람은 안다.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일지라도 파도는 친다는 것을. ‘이게 바다가 호수와 다른 결정적인 차이야’라고 말하려는 듯, 파도는 쉼이 없다.

파도 소리는 사유를 부르는 BGM(BackGround Music)이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해안가를 걷고 있노라면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내 걱정거리도 잘게 부서져 흩어지는 듯하다. 하루에도 수만 번씩, 지구가 탄생한 후 언젠가부터 한 시도 쉬지 않고 들이닥쳤을 저 파도... 지구의 나이를 지금껏 파도가 친 횟수라고 한다면 내 인생은 저 파도 하나만큼의 의미는 가질 수 있을까? 난 세상에 어떤 의미를 새길 수 있을까? 내 인생도 언젠가는 저 파도처럼 흩어지겠지.. 세상에 의미 있는 뭔가를 남기고 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파도를 보며 바다의 부지런함에 감탄했고, 바닷가 모래와 가지각색의 돌 모양을 보며 그 안에 새겨진 시간의 영원성에 겸허해졌다.      




파도 소리가 들리는 곳을 첫날의 앞마당으로 삼고 싶었다. 지난 두 달 동안 후보지들을 몇 번이나 재방문했는지 모른다. 땅 보러 다니는 복덕방 아저씨도 나만큼 신중하게 장소를 고르진 않겠다 싶을 만큼 신중에 신중을 더했다. 그 결과 캠핑카 정박지의 조건을 4가지 선정했으니,     


1. 바다가 보여야 한다. 파도 소리가 들리면 더 좋다.

2. 화장실이 근처에 있어야 한다.

(캠핑카 안에 이동식 화장실이 있긴 한데 쓸 일이 없을 것 같아 아직 포장지도 안 벗겼다)

3. 차를 세울 공간이 넓어야 하고, 주변에 사람이 없어야 한다.

4. 와이파이가 터지면 금상첨화다.      


올림픽 선정위원회보다 까다로운 심사를 거친 끝에 드디어 첫 번째 정박지가 결정됐다.     

법환 포구. 스무 살 때부터 수백 번도 더 걸었을, 법환 해안도로의 끝. 사각 프레임 안에 담긴 범섬과 포구, 그 위로 달빛 조명이 내려앉을 때면 술을 마시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곳. 바다 내음이 비리지 않고 적당한 온기를 머금은 바람이 적당한 때에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로 거기.       


캠핑카를 사면 반드시 한 번은 여기서 살아보리라 다짐했던 그곳에 차를 세웠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많은 것들이 달랐다.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 사람들이 별로 없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수시로 낚시꾼들과 올레꾼들이 지나갔고, 물때가 맞았는지 밤에도 수십 명의 낚시꾼들이 이 곳을 찾았다.

캠핑카는 소음에 치명적이다. 감각이 예민하지 않음에 감사하며 사는 나조차도 새벽 3시에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면 난 아마 첫날의 정박지 결정에 '실패' 딱지를 붙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새벽 3시에 분주하 움직이는 낚시꾼들의 소리에 잠을 깨 눈 비비며 차 문을 여는 순간, 하늘에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달빛이 바다에 부서지고 있었다. 파도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마치 그동안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 '창백한 푸른 점' (by 칼 세이건)


근래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 본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 한참을 밤하늘 가득한 별빛을 바라보며 난 그저 황홀했다. 예상치 못한 손님들의 소음에 잠마저 달아나버렸으나, 내가 지금, 여기 살아있다는 실감과 우주의 신비에 휩싸여 다시 한번 삶에 감사함을 느꼈으니, 하루 한 번씩은 밤하늘을 바라보자는 다짐을 얻었으니, 잠보다는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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