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슈 여행 #2

조금은 다른 여행

by 한겨울
배 안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넘실거렸다.

이미 1년도 훨씬 넘은 이야기이다. 그 때 일본을 다녀온 이후로도 몇 번인가 더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그 때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마음 먹은 건 필름 탓이었다.


묵혀둔 필름. 최근 카메라를 뒤적거리다 내게 아직 현상하지 않고 남겨둔 필름이 있는 걸 찾아냈다. 그걸 모아서 현상하고 스캔한 필름에서 작년 여행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도 현상하지 않은 채 모아둔 흑백필름은 꽤 된다.)





부산에서 혼자 배를 탔다. 여행지에 가면 혼자가 아닐 테지만 출발은 혼자였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은 채 수속을 밟고 움직여야 했다. 간만에 홀로 떠나는 여행인지라 꽤 기분이 묘했다.

홀로 떠나는 여행은 편했지만 속으로는 많은 것을 떠올리게 했다. 장소에 대한 기억, 함께 했던 사람과의 추억, 좋았던 순간도 나빴던 순간도 모두 한꺼번에 생각나게 했다.


우습게도 기억하는 줄도 몰랐던 시간이 한번에 떠올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 그런 시간도 있었더랬지.


우습게도 헤어진 지 몇 년이나 지난 사람과의 추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라 당황스러웠다. 더 이상 그 사람을 사랑하진 않지만 함께 했던 기억은 쉽게 잊혀지는 게 아니구나 새삼스레 깨달은 순간이었다.



현상한 필름을 받아들고 작년의 여행 사진을 찾아낸 순간 또 발견했다. 한 장의 사진을 통해 잊었던 그 때의 기억을 고스란히 다시 떠올리며 웃어 버렸다.


"어멍."

내가 현상한 사진을 그녀에게 카톡으로 보내주었을 때 선배가 한 첫마디였다.


"자그마치 작년입니다."

찍은 사진을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전송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1년하고도 6개월이나 지난 시점에서 전송하는 사진에 '자그마치'라는 말이 붙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모든 게 빨리 빨리 지나가 버려 아쉬운 추억은 나 혼자 붙들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느릿한 필름을 사랑한다. 유통 기간이 훨씬 지나 버려 원래의 발색을 내지못하는 컬러네거티브 필름일지라도. 그것은 또 그것대로의 맛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라서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꽤 늦은 여행기에 이런 저런 사유가 뒤죽박죽이겠지만.



사실 여행을 하는 이유는 없었다. 그저 떠나고 싶어서 떠났을 뿐이었다.


"후쿠오카는 자주 가지 않았어요? 왜 맨날 후쿠오카만 가요?"


종종 물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꼭 후쿠오카만 가는 건 아닌데.'


속으로 생각했지만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자주 가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고 굳이 그 사람의 생각이 이상하다고 지적해주어야할 필요도 못 느낀 탓이었다.


여행이란 갈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매번 똑같은 사람과 같이 가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같은 사람과 갈지라도 매 순간순간 느낌이 다른데. 상대가 보기엔 내가 매번 후쿠오카만 가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나는 하카타항을 기점으로 해서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녔을 뿐이었다. 시작과 끝지점이 하카타였을 뿐인데 사람들은 모두 내가 같은 곳을 다녀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날씨가 맑았으면 좋겠어."

사세보로 출발하기 전 그녀가 말했다.


"왜요?"

내 물음에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선글라스를 새로 샀으니까."

"아."


흐릴 거라는 예보와는 달리 그녀의 기대대로 날씨는 제법 맑았다. 다행이었다.



"사세보에는 가본 적 없어요."

"응. 나도 이렇게 차로 가는 건 처음이야. 그래서 설레."


"저, 일본에서 운전하는 건 처음이에요."

"응. 난 어제 드디어 면허증이라는 걸 받아왔어. 나보단 네가 낫겠지."

"......"



일본에서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도로비가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아서 우리는 국도로 가기로 했다. (실제로 한 번길을 잘못 들어서 톨게이트를 통과하고 바로 돌아나왔는데 도로비 300엔을 지불해야 했다. 젠장.)


고속도로를 달리면 빨리 가기는 하겠지만 나는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천천히, 가다가 좋은 풍경이 보이면 서서 카메라에 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네비게이션의 지시등은 똑같았다. 길도 모르는 주제에 저 네비게이션이라는 기계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편한 세상이었다. 그래서 용감하게도 길을 나섰다.




99100006.JPG 사세보 가는 길에 만난 풍경



"와아~"

너무 좋은 것 같다며 그녀가 함성을 내질렀다.


"난 운전같은 건 할 줄 몰랐으니까 여행지에 가면, 항상 기차나 버스만 이용했거든. 그러니까 목적지에 가서 그 곳만 둘러보고 말았는데. 이렇게 차로 움직이니까 가는 곳곳에 좋은 풍경도 보고 좋은 것 같아."


목표를 세우고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 과정을 즐기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성과나 목적 달성도 중요하겠지만 여행은 그런게 크게 상관없을 테니까. 어디까지나 본인이 만족하면 그만 아닌가.





듣기만 해서는 꽤 시골일 것 같았던 사세보는 의외로 군데 군데 컬러풀한 포인트가 돋보이는 곳이었다.


사세보에 대해서 이렇다할 느낌도 정보도 없던 나에게 사세보는 그저 "햄버거" 하나로만 남은 곳이기도 했다.





4박 5일 정도의 짧은 일정이기도 했고 애초에 내가 가고 싶은 곳은 한 군데 뿐이었으니 관심두지 않았던 탓이기도 했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도 몰랐고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지라 동선은 선배에게 일임했던 탓이었다.


99100011.JPG 의외로 소박했던 빅맨버거집

사세보에는 여러 버거집이 있지만 선배는 이 곳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사세보 인증 버거. 사실 처음 사세보 버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당시 미군이 전한 레시피라는 말도 함께 들었다. 그래서 사세보라는 지역이 일본의 오키나와 어디쯤 있으려니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버거를 먹으면서 선배가 말했다.


"이 근처에 하우스텐보스도 있고..."

"어?"

"왜?"

"그럼 저 사세보가 처음은 아닌가봐요."

"너 사세보 와 본 적 없다며?"

"하우스텐보스는 갔었거든요. 4년 전에..."

"너 진짜 아무 생각없이 돌아 다니는구나."

"......"


부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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