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슈 여행 #6

조금은 다른 여행

by 한겨울

밤 사이 내리기 시작한 비는 아침에도 여전했다.

제법 이른 아침에 오카미상이 차려주는 정성스런 조식을 먹고 산책을 나섰다.


그래 봐야 동네 한 바퀴였지만.


잘 정리된 오-타 료칸의 정원

어두운 밤에 보았을 때의 정원은 비내리는 아침에 봤을 때 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구석구석 산재한 깨알같은 너구리마저 반가웠다.


정말 너구리 정령이라도 살 것 같은 그런 느낌의 정원.


정성이 없다면 나무를 이렇게 가꾸기는 쉽지 않을 텐데.


구석구석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성정이 엿보이는 곳이었다.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는 뒷산.



그리고 정원 너머로 보이는 저 건물.

바로 이 곳 쿠로키 마치에 있는 중학교였다. 할아버지께서 이 학교에서 평생 동안 영어 선생님으로 재직하셨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영어를 꽤 많이 써먹고 싶어 하셨다. 아마도 칠십에 가까운 그 연세에도 외국어를 써먹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싶으셨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우리의 대화는, 꽤 기이하게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영어로 말을 걸고 우리는 일본어로 대답하는 그런 기이한 ... (죄송합니다. 영어로 말하는 것보다 일본어로 말하는 게 더 ... 편했어요. 제게는)


이 집은 이제 새로 짓는 집이었다. 누군가의 터전이 될 곳.
이름표를 보고서야 라일락인 줄 알았다.

료칸을 나오자 마자 발견한 집 정원에 핀 라일락.

라일락 꽃 향기를 맡으며 빗 속을 거니는 그 기분은 글쎄... 꽃말이 첫사랑, 젊은 날의 기억이라는데.


확실히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고 좋았던 날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대부분의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고 안 좋았던 일조차 그 일에 대한 분노는 잊혀지기 마련이니까.


"아무 것도 모르고 하나만 생각하면 되던 그 시절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러게. 우리 그 때 정말 재미있었는데..."

서클활동 시간에 모여 학교 근처에 있던 시장통 안 분식집에서 20인분의 떡볶이를 양동이에 가득 담아왔던 시절의 이야기.


지금 생각해도 양동이에 담아온 떡볶이는 무언가 특별한 느낌이다. 요즘도 아주머니가 양동이에 담아 주시지는 않겠지. 후후후.



비가 와서 공사를 중단하고 가신 모양인지 쓰던 모종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직 집도 덜 지어졌고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이 곳에서 누군가가 있었다는 흔적.




초인종이 없는 이 시골 마을에는, 누군가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알 수 있도록 문 사이에 이렇게 종이 달려 있었다. 모든 게 전자식으로 흘러가는 시스템에 익숙해 있던 내게, 매우 느른하고도 아날로그적인 이 느낌!!!


여행을 다녀오고 거의 2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 현상한 필름에서 이 사진을 찾았을 때 다시 한 번 내가 왜 필름을 버릴 수 없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우리 아이의 소중한 자전거가 비를 맞으면 안되니까요."


안장 높이와 페달길이를 굳이 따져 보지 않더라도 네 발 자전거는 분명히 어린 아이의 것일테지.


자식의 소중한 자전거가 비맞아 녹슬까 걱정한 사람의 마음이 녹진녹진하게 묻어나왔다.




그리고 비닐 하우스.


그나저나 지난 밤부터 아침에 이르기까지 돌아다니는 사람이라곤 우리 밖에 없는 이 시골 마을.


분명히 곳곳에 집은 있는데 과연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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