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닿는 대로
계획도 없었고 일정도 없었다.
심지어 해야할 일도 없으니 그저 발길 닿는대로 정처없이 움직일 뿐이었다.
오호리 공원을 따라 걷다 보니 못 보던 공터가 하나 나왔다.
이게 뭐지? 하는 생각으로 바라보다 보니 얼핏 이 근처에 성이 하나 있었던 게 기억 났다.
후쿠오카 성.
쿠마모토 성도 보았고 오사카 성도 보았다.
그 유명한 히메지 성도 갔었고 교토에 있는 니조 성도 보았다.
그 와중에 예고도 없이 훅, 내 눈앞에 나타난 후쿠오카 성.
다른 성에 비해 규모도 작고 웅장하지도 않지만 그리도 오랜 세월을 버티어 온 역사를 갖고 있는 곳이었다.
날씨가 흐려 침침한 기운을 주는 이 곳에서 후쿠오카 성을 만난 건 순전히 이 녀석 때문이었다.
난데없이 내 앞에 나타나 나를 이끌듯 이렇게 멀리 가지도 않고 빙빙 내 주변을 돌고 있는 까마귀 탓이었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 유혹하듯 몇 발짝 가다 서고 또 가다 서고를 반복하는 이 까마귀 뒤를 따라 가다 후쿠오카 성을 발견했다.
이게 행여나 소설 속이었다면 까마귀를 따라가다 어떤 시공간의 차원으로 들어선다거나 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이미 오호리 공원을 한 바퀴 휘돌아 나온 터라 다리가 묵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번이나 왔던 오호리 공원에서 후쿠오카 성을 만나기는 처음인지라 강행하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은 만날 사람도 없고 혼자였으니까.
그리고 여전히 저 멀리서 까마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안 오냐?"
"간다고 가. 헉헉."
그런 대사를 혼자 주고 받으며 까마귀를 뒤따랐다.
후쿠오카 성은 엄밀히 말하는 모든 성이 남아 있는 건 아니었다.
성곽의 모양도 부서진지 오래인 듯 성터가 남아 있는 곳이었다.
그래도 돌아본다. 기왕에 이 곳까지 왔으니까.
가이드 책 하나 없었다. 그저 발길 닿는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혼자 있성터와 망루 이곳 저곳을 둘러 보고 있노라니 길가던 할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곤니찌와."
그렇게 친절하게 웃으며 말하는 할아버지인지라 나도 따라 인사했다.
"곤니찌와."
"어디서 왔니?"
"한국이요. 부산에서 왔어요."
할아버지의 일본어 발음은 웅얼거려 내가 알아듣기에는 다소 편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저 쪽에 가면 말이야. 전망대가 있어. 거기 꼭 올라가 봐."
"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의 강력 추천이니 가봐야지.
이 할아버지.... 내가 이미 오호리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내내 걸어 다니는 중이라는 건
전혀 모르고 계신 것 같지만 그래도 가보기로 했다.
점차 흐렸던 구름이 물러 가고 태양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다리는 점차 묵직해지고 목도 말랐다.
일본에 오면 시시때때로 보이던 자판기조차 오늘은 왜 보이지 않는 건지.
이 길을 계속.... 걸어야만 했다.
'나 뭐하는 걸까.'
문득 의문이 들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이대로 돌아 나간다고 해도 걸어야 했고 앞으로 나가려고 해도 걸어야 하는 ...
그렇다고 쉬기 위해 멈추면 여지없이 모기떼가 달려 들었다. 으윽.
개인적으로 산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한 번 오르면 중도 포기를 할 수 없어서였다.
사람이 힘들면 중간에 멈추거나 그만 두거나 할 수 있어야하는데
산은 그럴 수가 없어서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산에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내 성향은 그랬다.)
오늘의 이 여행도 산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이 곳에서는 멈출 수도 되돌아 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냥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무엇이든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다.
하다가 안되면 말지, 뭐.
그런 마인드였던지라 무엇 하나 끈덕지게 해낸 적이 없었다.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였을 지도 모르겠다.
버티다 힘들면 쉽게 포기해 버렸다.
내가 먼저 놔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상대방과 싸우기 싫어서 그냥 연락을 끊고 돌아서는 경우도 많았다.
내가 먼저 포기해버리고 기대를 비우면 상처도 덜 받으니까.
그렇게 살아온 삶이었다.
2008년 클라이밍을 시작하면서 깨달은 건 중도 포기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거였다.
산이 대표적이었다.
힘들다고 중간에 멈추는 건 인생을 멈추는 거나 똑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하나 하나 정상을 밟고 내려 오는 일을 반복하면서 하나의 습관이 생겼다.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는 것.
오기.
아, 이 다리가 내일 어떻게 되든지 간에 오늘 저 망할 전망대까지 내가 보고 말리라.
아하, 나보다 더 힘든 고행을 하는 사람이 여기 있었네.
딱 보아도 리어렉과 프론트렉까지 장착된 이 자전거.
묵직하게 걸린 패니어가 이 자전거의 주인이 여행 중이라는 걸 알게 했다.
저 자전거로 얼마나 달려 왔을까.
또 얼마나 달려 가야 하는 걸까.
그 사람이 무엇을 하든 나보다 훨씬 더 힘들게 다녔고 힘들게 여행을 할 것이라 생각하니
지금 내 상황은 그저 복에 겨운 투정 같았다.
그래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계속 걷다 보면 언젠간 끝나겠지.
그렇게 걷고, 걷고 또 걷고..
계속 걷다보니 드디어 도착했다.
후쿠오카 성 천수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