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이야기.
묵혀두고 묵혀두었던 여행기를 갑자기 꺼내든 것은 물론 독자분들 때문이다.
오밤중에 이것저것 할 일을 정리하고 이제 침대로 가볼까 하면서 노트북 화면을 덮으려던 찰나였다.
'띠링' 하면서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누군가, 어느분께서 내 브런치를 구독하기 시작하셨다는 "알림"이었다.
심하게 포스팅이 자주 없는 브런치임에도 불구하고 구독을 눌러 주시는
독자분이 계시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하고 매우 날카롭게 양심에 찔려서 도저히
그냥 노트북 화면을 덮을 수가 없었다.
자, 어차피 바로 잠들지도 않을 테니 지난 번에 이어 여행기나 마저 쓰자.
하던 마음으로
천수대에 올라 내려다본 후쿠오카는 꽤 숲이 우거진 도시였다.
부산에 비해 꽤 시골이라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고층 건물도 많았고
그에 비해 오래도록 많이 초록이 우거진 자연과 함께하는 도시였다.
그래서 쾌적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물론 나무가 우거진만큼 모기에게 헌혈도 제법 해야 했지만!!!
도심 한 가운데 이렇게 한적하고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건
정말 장점이 아닐까?
천수대에 홀로 앉아 세상을 다 가진 것 마냥 아래를 한참 동안 내려다 보며
지친 다리를 쉬어주었다.
많이 걷기도 했고 기왕에 땀 흘리며 올라왔으니 조금은 쉬어 주어도 괜찮을 것이다.
누구하나 재촉하는 사람 없으니 바쁠 것도 없는 여정이었다.
뒤를 돌아 보아도 쫓아 오는 사람 없고 앞을 보아도 도망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천천히 걸어도 괜찮은 그런 길이다.
내 삶도 그런게 아닐까.
이미 서른도 훌쩍 넘겨 버린 나이지만,
이십대 후반쯤 되었을 때 문득 나 자신이 너무 나이가 많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다른 친구들은 사회에 나가 이것 저것 하는 것도 많고 잘 나가는 것 같은데,
나 자신만 너무 뒤쳐지는 것 같다고 느끼던 시절이었다.
혼자 속상해 하고 혼자 고민하고 그러다 끝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어린 날의 치기였던 것 같다.
그래도 남들은 서른즈음에 그런 고민을 한다던데.
난 너무 어린 나이에 그런 고민을 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또 조숙했던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살짝 웃음이 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고민을 가지고 살아왔기에
지금은 살짝 웃으며 여유를 가지고 삶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조금 느리면 어때.'
'조금 덜 가지면 어때.'
중요한 건 나 자신이 얼마나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느냐가 아닐까.
쉬엄 쉬엄 걸어 내려 오다 보니 오래된 우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물 주변으로 정자라던지, 혹은 우물 입구가 막혀 있는 건 아마도 어린 아이들이 뛰어놀다가
행여 우물 안으로 빠지는 걸
방지하기 위한 차원이 아닐까 싶다.
슬쩍 우물 안을 들여다 보니 아니나 다를까.
잔뜩 동전이 쌓여 있었다.
아마도 우물 안으로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빌었겠지.
나도 주머니를 뒤적여 우물 안으로 던져 넣고 박수를 두어번 탕! 탕! 친 다음
마음 속으로 소원을 빌어 본다.
"로또 걸리게 해주세요!"
(아, 마음 속으로 빈게 아닌가? 킥)
그리고 돌아나오는 돌담길은 어쩐지 꽤 익숙했다.
구마모토 성에서도, 오사카에서 보았던 히메지성에서도.
건축학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어쩐지 일본의 성 구조란 다들 이런 식인가 보다 싶어졌다.
후쿠오카 성을 벗어나는 길은 쉽지 않았다.
어쨌든 대로변쪽으로 가야 지하철을 타든 버스를 타든 할텐데
이 길이 왜 이리 긴지.
그래도 나는 무언가 사색을 하면서 굉장히 유의미한
느낌을 가지려고 애쓰면서 걷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경악에 빠지게 하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독거미주의"
대충의 해석을 해보자면,
"세아카고케"라는 거미가 발견되었습니다.
사진상의 거미를 본다면 손으로 만지지 마시오.
그리고 아래의 연락처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정도이려니 라고 추측(?) 해봄.
그리고 이 세아카고케라는 독거미는 원래
오스트레일리아에 서식하는 거미라고 한다.
사람이 물리면 죽을 정도의 독은 아니지만
심한 경우에는 온몸이 아파오고 두통과 구토를 유발한다고 하니 안물리는 게 좋을 듯^^;;
어쩐지 해질 무렵도 다가오고 갑자기 숲이 으스스 해지는 거 같고,
독거미 이야기도 나오고 내 발걸음이 빨라지는 것과 전혀 상관관계가 없지는 않겠지^^;;
서둘러 숲을 벗어 나니 점차
걸음이 느려진다.
아, 다리야.
2년이 지난 지금도 괜히
다리가 아파오는 기분이다.
그 날의 감정이 새록새록 되살아 나는 기분.
오우, 많이 걸었군.
오전엔 배를 탔고, 오후에만 거의 2만보를 걸었다.
후덜덜..
어쩐지 다리가 아프더라니..
문제는 앞으로 더 걸어 가야 한다는 거.
자, 부지런히 가 봅시다.!!!
그렇게 후쿠오카 성을 빠져 나온 나는,
지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들어와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때 부르르르 핸드폰이 울렸다.
"언니, 어디유?"
"응? 나 후코콰지."
"긍께, 후코콰 어디냐고."
그 순간 뭔가 촉이 예리예리하게 움직였다.
"너도 혹시 후코콰냐?"
"크크크크크크크."
"뭐야? 어디야?"
"우리 텐진으로 가고 있는 중인데 언니도 합류할라우?"
"뭐야? 우리라 하면 누구누구? 언제 도착인데?"
뭐, 이런... ;;;
나의 숙소에서 텐진까지 걸어 가면 30분 정도.
그들이 텐진까지 도착 예정 시간은 30분 후.
우습게도 다들 결혼하고 애기 낳고 각자 사느라고 바빠서
부산에서도 얼굴 본 지가 거의 반년이 넘었는데!!!
어이없게도 남의 나라에서, 일본에서, 후쿠오카에서,
그것도 우연의 일치로 그대들은 내일 나가고, 나는 오늘 들어와서!
이렇게 만남의 장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SNS 계정에 바다 사진을 올려 놓고 잘 다녀 오겠다고 한 사진에
어디 가냐고 후쿠오카 가냐고 한 댓글 단 이유가,
이렇게 시간 맞으면 같이 맥주 한 잔 하자고 하려고
일정 확인 한 거였단다. (큐슈 여행 #10 참조)
웃기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한참을 웃었다.
전혀 예정에 없던 일행이 생겨서 좋기도 했다.
배낭 여행을 다닐 때면 항상 그 여행지에서 즉석으로
마음 맞는 친구가 생겨서 밥을 같이 먹기도 하고
술 한 잔을 같이 기울이기도 하고 한시적으로 여행을 같이 다니기도 했지만
이렇게 원래 알던 사람과 조인하기는 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또 걸었다.
이미 지치고 힘든 다리였지만 술 기운에 힘든지도 모르고 걷는 걸음이었다.
한국어로 쓰인 타이틀도 신기했고 알딸딸하게
취한 터라 쓰러진 자전거도 신기했나 보다.
기분 좋게 취해서 돌아와 죽은 듯이 잤던 2015년 9월의
큐슈 여행 첫째날은 그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