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싫어 갓난아기를 버리고 떠난 엄마의 제삿밥을 양부모의 제사 때 따로 제사상에 올리는 아빠는 애초부터 울보였다. 여자 가슴만 보면 울어 동네 아낙들이 가슴을 쳤다고 한다. 마침 아이들이 있는 고모의 젖을 물고 그것이 다 채워지지 않아 또 울면 동네 아낙들이 들이며 밭에 나가 일하다가 잡아 괴춤 주머니에 담아와 우리 집 솥에 던져놓고 간 개구리를 고아 먹고 컸다고 한다.
엄마가 버린 자식으로 만고에 의지할 때 없는 아빠를 마침 아이가 없는 큰집에서 데려다 길렀고, 아버지는 참 예쁘고 고운 사람으로 살아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양부모와의 사랑과 기억들, 그것은 내 눈으로 보아왔기에 더욱 그러하다.
아버지가 젖동냥을 가장 많이 한 고모의 아들이 오늘 새벽 소천하셨다.
츤데레 김천열, 그이는 6.25 전쟁이 터져 중부 전선 어느 고지에서 친동생과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온통 총 나팔 소리에 사격을 가하다가 보니 저 절벽 아래로 눈에 띄는 물체가 하나 굴러 떨어지더라, 굴러가며 옷이 붉게 물들어가는데 그 굴러가는 얼굴이 내 동생이 아닌가? 아, 절벽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찰나, 허리께부터 뻐근한 불길이 허벅지를 뚫고 들어왔다. 피를 철철 흘리며, 한 눈은 동생을 바라보며, 동시에 총구를 동지들에게 돌려 말하고 있었다. “나를 끌고 내려가라, 내 집에 이제 나밖에 없다, 부모님 볼 도리가 없으니 나는 이제 정말 똑 살아야 한다. 나를 엄호 삼아 끌고 내려가면 너희도 살고 나도 살 것이다.” 그렇게 피 흘리며 끌려 내려와 아버지의 둘도 없는 의지처이며 비빌 언덕으로 고향 여주를 지키고 사셨다.
늘 밤나무에 올라 노래를 부르는 아버지가 “형님 난 가수가 될 거요,”, “형님 난 학자가 될 거요.”하면 늘 "너 까짓 게 뭘 해?”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뒤로는 바라지 바라지 온 마음 바라지를 하시던 분. 내가 어렸을 때도 우스운 질문을 해대곤 했었는데, 대게 엉뚱한 서울 녀석의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당숙, 소들도 닭들도 방귀 뀌어요?”, “이눔아 그런 건 오양간에 들어가서 소 엉덩이를 쳐다보고 있어 봐라.” 그걸 또 정말 소우리에 들어가서 한참을 보다가 터져 나오는 소의 힘찬 방귀에 놀라 뛰쳐나가며 당숙에게 흥분해서 “당숙 소.. 소가 방귀를 정말 뀌네요” 이런 나를 웃으며 바라봐 주시던 김 천자 열자, 사랑하는 츤데레 당숙, 고아 아버지의 둘도 없는 형이자 고향, 비빌 언덕. 당신이 있어 아름답고 따듯한 고향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 오늘 새벽하늘로 떠나셨어도 내 일부입니다. 사랑합니다. 좋은 곳으로 가시길, 그리고 늘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