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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과 중국, 그리고 외국인

2013.11.08

by 정한별

중국어, 한자(漢字)는 성조로 하여 그 기의(岐義-언어학자 최석기 선생께서 일찍이 전한 기의(記意)와는 다른, 중국에서의 의미), 그 '의미'를 발돋움을 한다. 즉 여러 뜻을 품은 함의(含意)로의 용적을 자랑하는 것이다. 현재는 그 성조가 쇠락하여 대륙에서 4개의 성조로 표의, 통용된다.


한글은 성조가 없으며 표음의 문자로 알려져 있고, 합(合)이 없이는 그 한 자에는 의미가 없다고들 함으로 나락에 빠진다. 이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편협하고 게으른 하품 같은 소리이다. 한국인은 그 직관력만으로도 한 글자에 담긴 수많은 의미를 판단할 수 있다. 가령 "아"에 맞는 상황이다. 고함의 '아', 탄식의 '아', 깨달음의 '아'는 모두 다르게, 이미 여러 뜻을 지니고 활용되고 있다. 나아가 세상에서 '아'자로 발음되는 모든 소리의 뜻(값)을 획득해 버린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의미를 담고 있듯이, 낱자마저도 모두가 우주어로, 그 의미를 넓게 지닌 체, 쓰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한탄스러운 것은, 끊기고 수탈당하며, 게으름으로 방치한 연구이며, 한글을 천대한 기득(지식) 계급들의 수치스러운 역사이다.


중국은 그 많은 글자(실은 그림)의 수량으로 치매예방에 좋으며, 두뇌계발에 유리하다 말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글에 내재된 전달력과, 빠른 습득의 위력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실책의 소리이다.


중국에는 한자의 해석(정확하게는 그림의 설명)과 그 유래들로 하여 그 의미를 찾는데 도움이 되는 공구서(工具書)를 사용하고 있다. 나는 오로지 이 그림들로 한글이 담을 수 있는 기의(歧義)를 나타내고, 그리며 표현하는 것을 즐긴다. 한글 한 자로 4 성조의 한자 의미를 모두 담아낼 수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 '한자를 한글의 공구서'로 삼는 것은 큰 재미이다.


우매한 몇 학자들만이 여적, 중국말을 숭앙한 나머지 상형의 그림 그리기를 그들의 법칙, 그들의 궤도와 목적대로 추종하며 알려고 할 뿐이다. 고구려 말기, 중국의 복식과 문장(구양수 등)을 앙모하여 많은 식자들이 중국의 문화에 매료, 빠져들어 젖어들어갔다. 심오한 그림 또한 절정의 예술에 닿겠지만, 한국에서의 한자사용은 중국과 달라야 맞다(참조:차자표기법/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0c1572a). 차자표기는 서기체(誓記體), 이두, 구결, 향찰 표기법 등과 함께 차차 발전, 쓰이게 되었다. 나라 말 씀은 말 뿌리가 모국어인 한글임을 망각하지 말고 써야 맞다. 중국그림, 중국어에 '중국식'을 뿌리로 담아두고 우리에게 그 외국어의 억지해석을 바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이것 또한 삼가야 할 내용이다.


중국의 역사가 유구하고 또, 문인들이 글로 심경을 나누고 주고받는 것은 아름다운 일임에 분명하다. 시대를 초월하여 교류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문자에 담긴 힘에서 나온다. '안중근전기전집' 및 사료집을 발간하는 일 중에 마주친 중국 지사들의 추도와 안중근의사를 향한 앙모는 또한 현실에 이르러 한국인의 안에서 몇, 그를 '테러분자' 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작금의 실정과 비견하여 안타까운 탄식이 절로 나오게 한다. 실제로 그 중국인이 기록한 안중근의 전기를 순수한 한글로 옮겨 보려는 노력은 결국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부끄럽게도 본인조차 알아볼 수 없는 한글, 사용법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문자를 통하여 시공을 초월한 만남이 생기고, 마음을 깊게 교류할 수 있음은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만의 특별한 축복일 것이다. 다만, 그 뿌리는 어디까지나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고, 타국의 역사를 존중하며, 사랑과 깊은 인본(人本)에의 의미까지이다. 언어를 넘어선 오만으로 타국을 무시하고 타인을 경멸하려 하는, 기득의 전리물로서의 글사용은 멈추어야 함이 마땅하다.

일례로 오래전에 북경대학의 한 교수가 한국의 한류 문화에 대하여 '한국인들은 한류에 사명감을 가져라'라는 글을 기고하여, 읽어 보았다. 누구의 번역인지 기억이 나지를 않으나 유독, '사명감을 가져라'라는 제목에서 이미 나는 그들의 은근짜 한 우월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사명감을 가지라는 말은 중국의 지식인이라고 하나 일개 한 개인으로 한국의 모든 인구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님이 정확하기 때문이다. 사명감이란 일의 현장 당사자 또는 공통된 무리의 수긍할만한 수장이 지니고 있는 일에 대한 애정과 책임을 말하는 바, 결코 타인이 지시하거나 획책할 수 없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류 문화를 중국에서 바라본 사람의 입장은 사뭇 기분이 나쁜 말로 메아리쳤다. 그 기사의 내용이 번득이고 사리에 맞는 듯 보였지만, '사명감을 가져라'하는 투의 글은 이미 나에게서 벗어나 버렸다.


'대장금'이 한창 중국에서 유행할 때 일화 한 가지이다. 청화대학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는 석사과정 동생 하나가 분에 차, 말문을 열었다. 중국 친구들이 대장금을 보고 있어 함께 보게 되었는데, "너희 나라는 우리 유교문화와 복식, 건축, 예법까지도 잘 받아들여 보존하고 있네"라고 중국인 친구가 말을 한 것이었다. 나아가 "옛날로 치면 너희는 우리에게 조공하는, 내 하인과 같을 텐데 말이야!"라고 말하더라고 말이다. 한류, 자랑할 만한 일이나, 정확하게 연유를 물어야 한다. 번영의 향수를 적시고 달래며 오랜 제국주의의 염원에 아첨하며 전파되어야 할 기세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되어버릴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그 언어의 사용으로 인종의 분류가 가능해진다. 한국에는 토종(토박이)이 많이 남지 않았으니 바로 한국인과 외국인으로의 양분이 가능해진다는 말씀. 비단 말의 사용에 따른 분리뿐 아니라, 정신과 행동의 이식과 세뇌의 정도를 가지고도 이 양분이 가능한 지경에 도달한 것이다.


교(敎)와 육(育)은 나라를 지속하고 연결하는 알짬이다. 이것이 주로 이루어지는 곳은 어디인가? 학교와 집회의 장소, 즉 종교이다. 이 '敎', '가르침'이란 게 대관절 무엇인가? 이식과 세뇌, 분열과 분리의 지렛대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타당한 것인지 되돌아 짚어볼 때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사들이 강조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교육'과 '학교'였음을.


우리의 것을 가르치고 가리키고, 우리의 것을 수호할 때 비로소 외부로 나아가 '우리'로 발돋움할 수 있겠다. 지식이란 이로움의 기록이며, 이 '이로움'을 널리 이롭게 쓰이도록 하는 것이다. 계급 획득을 노린 악용, 수탈과 자리를 차지하는 수단이 아닌 것이다.

타국에 살아도 한국인의 뿌리를 내리고 한국인으로 끝까지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한국에 살면서도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너무나 함부로 제 나라를 쉽게 내던지는 성품이다. 이제 아예 그 종자를 끊고 버려야만 그나마 힘겹게 지켜온 혼을 지키게 될 것이다.


물질만능주의란 그 배고픔에 팔아버린 '자기 매매買賣'의 전적(轉籍) 임에도, 폭력과 회유, 유혹과 거래의 흔적임에도, 자기를 다시 되찾을 궁리조차 하지 않게 되는, 큰 마비(全身, 全神麻痺)의 저주(詛呪) 임을 파악하고, 사방에서 몰려든 주술사, 부라퀴 집단의 주문에서 벗어나야 한다.


中華人民共和國과 大韓民國의 가장 큰 차이는 대국소민과 소국대민의 차이인데, 지금에 도달하여 이마저 말할 수 없게 되었음이 아플 따름이다.


미국과 일본, 야욕의 몇 부라퀴 무리들이 그동안 강제로 목줄을 끌었다면 중국이 앞으로 팽배하여 그 짓거리를 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이 전에 오래도록 조복하고 아첨하던 역사의 증명이 있었으니 더욱 경계할 일이다. 무지한 숭배와 찬탄, 아첨 이전에 스스로의 나라를 바로 세우는 것이 맞다.



*공자는 생전 남을 가르치는 일에 싫증을 내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질색하였다.-생략

가르침에 관해 1인칭 화법으로 이야기할 때, 예컨대 '나는 가르침에 싫증 내는 일은 없다" 같은 경우 공자는 늘 '회'誨 자를 썼다. '훈'訓 자를 써도 될 것 같은데. 두 글자 다 '가르친다'는 뜻이다. 그런데 1세기에 편찬된 사전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보면 '회'는 "빛을 비춰줌으로써" 가르친다(曉敎)는 뜻이고, '훈'은 "말로 이야기해 줌으로써' 가르친다(說敎)는 뜻이다. -안핑친 [공자평전] '가르친다는 일' 편 中.


공자는 남을 가르친다는 의미를 싫어하여, 비춰주고, 깨우쳐 주는 일을 즐겨하였으니, 이 남을 가르친다는 의미의 敎는 매우 오만한 글자로 읽힌다.


심정이 전달되어 부족한 부분이 이곳저곳에서 차오르기를 바라마지않는다. ☆


*백기완 선생님께서 '비나리' 잔치를 하신다는 풍문이 들려온다. 조계종 내부가 정갈하고 비워진 기운은 아니나, 이 한글이 지닌 의미를 일깨워 들려줄 수 있다는 기대가 크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11/11/0200000000AKR20131111145300005.HTML?input=1179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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