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는 관계문화(꽌시원화关系文化)가 있어 아무리 용을 써도 관계(인적, 물적, 바탕이나 토대 등) 없이 일 성사나 성립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어느 구석에서든 연을 끌어대 사업을 이룬 경우를 밝히면 한국도 물론 예외가 아니다.
공정이니 평등이니 제 실천 없는 혀 내밀기의 지루함만큼, 누가 대통령(또는 수장)이 되어도 똑같다는 자포자기의 넋두리도, 바른 관계나 문화를 이야기함에는 큰 쓸모가 없다.
소위 '인물'은 개인이 겪은 ‘겪음의 습관’을 ‘합리화’시키고 이미 단계를 마친 ‘인물’, 즉 ‘상(像)’이 되었고, 이 상을 ‘합리화’ 하는 실력은 나날이 진화하기에 말이다.
무엇으로든 ‘생존’을 모색하는 인간의 본능적 ‘방향성’과 선택의 ‘어찌’를 평가하기에는, 평등과 불평등 ‘기준’인 그 ‘습(習)’과 ‘관(慣)‘에 관한 실체 파악과 고증은 조금도 구체적이지 않다.
개인 내부를 습(習), 그 표출을 관(慣)이라 보자면 이미 대본을 읽고 배역을 꿰찬(꿰차려는) 의지는 그 관(버릇)을 훈련하여 고도화된 행태를 간직함으로, 일반의 그것보다 한층 복잡하고 겹겹의 구조일 경우가 많다.
결국 악습(惡習)을 지닌 자이냐, 바른 습을 가진 자이냐의, 인정과 성실한 갱생의 의지와 버르장머리 문제가 알짬일 것이다. 개인이 아닌, 대중에게 공개되어 공공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공무원(公務員)의 경우 사회통념적 대중의 잣대, 도덕의 기준에서 벗어남이 없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이 비정상이 정상인 시대의 마구잡이 얼개의 호도(糊塗)는 이미 명쾌를 출산하지 못한다.
촌티를 막 벗은 종교인이 브로커를 찾아가 다른 나라의 대학 명예 졸업장과 수료증 심지어 차사(茶師)라는 요사스러운 팽주 수료증을 매입하거나, 그럴듯한 액자들을 끌어모아 뒷벽에 걸고 일렁거리는 눈동자를 뛰룩거리며, 흠흠 흠향하고 마는 짓이 비일비재했다. 어긋난 모정 캄보이(護送, convoy)가 아무 대로나 비상등을 켜고 애를 매단 체 달리며, 때로는 중앙선을 넘은 경우가 한 둘이랴?
이렇게 잇댄 과시들이 열등을 울먹이고 있는 제 자신을, 정말로 자신들로부터 위로할 수 있을까? 만무하다.
그뿐이랴 명문대에 배정된 기부금 입학과 방귀쟁이들의 식탁 의자에는 구린 티오(table of organization)들이 앉아 짐짓 그런 척 냄새로만 앉아들 있었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렇게 문제를 문제로 인지하지 않는 그로테스크들의 향연을 어떤 젊은이가 ’ 현대‘나 ’현재‘로 인정 할 수 있을까? 이 인정은 결국 제 살을 파먹는 일과 같은 일이 될 것이다.
-도저하게 바름을, 끈질기게 요구를 해야 한다.
이성의 마비로 좀비개혁을 이야기한다면, 어떤 번개가 내리쳐 통섭이니 융합이니 창조나 신생의 혁명을 이룰까? 가을비에 살찐 법꾸라지도 승천을 하겠다. 다만, 이 최후의 만찬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많다. 그것은 바로 정의(定義), 뜻매김인데 소요나 일렁이는 범람 속에서 용케 주지(主枝)를 붙들고 살아남은 ’ 생존‘이 그렇다. 속에 백의 꼬물거리는 명(命)이 있는데, 유독 이상한 한 놈에게만 먹이를 먹여 덩치를 불려 결국 자신마저 잠식당한 숙주야 그렇다 치고, ’나‘가 먹이를 먹인 연가시는 내보낼 때가 아닌가. 어어 소리를 쫓는 맹종(盲從)의 떼 속에도, 소박하고 바른 인재는 늘 있었다.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