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 때문에 용서하는 거야,
케냐 마사이마라

사진/너 때문에 용서하는 거래.

by 모래파파

2015년 12월 난 케냐 마사이마라를 간다는 사실에 들떴어. 어릴 때부터 숱하게 상상했던 아프리카의 그 장면. 사자가 뛰어다니고 코끼리가 긴 울음소리를 내는 야생. 고작 일주일의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음이 아쉬웠지만 설렘은 커져만 갔지. 허나 설렘을 감동으로 터뜨리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어.

DSC00202.JPG 어릴 때부터 상상한 아프리카 초원. 디즈니 '라이온 킹'의 배경이 됐다고 해. 실제 라이온 킹을 보면 마사이마라가 딱 떠올라.


여행을 다니다 보면 비행기를 타게 되고 저마다 웃지 못할 비행기 또는 공항 에피소드 한두 개씩은 있기 마련이야. 불행인지 다행인지 난 비행기 무용담은 특별한 게 없었어. 2015년 케냐를 가기 전까지. 그동안 못 겪었던 황당한 비행기&공항 스토리를 한국에서 케냐를 오가면서 종합 선물세트처럼 맞이했어.


케냐를 가기 위해 이용한 항공은 에티오피아 항공이야. 혹시 '케냐 나이로비 직항이 있지 않나'라고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옛날 얘기야. 한때 대한항공에서 호기롭게 인천-나이로비 직항 편을 개설한 적이 있어. 사자가 다가오는 TV광고도 대대적으로 했지. 지금은 없어. 5년 전에도 없었어. 대한항공이 직항 편을 없앤 계기는 2014년 아프리카를 덮친 에볼라 바이러스야. 하지만 뒷얘기를 들어보면 탑승객이 너무 적어서 어떻게 하면 폐선할까 구실을 기다렸다고 해. 실제 지인 중 하나가 르완다를 다녀오는 출장 귀국길에 나이로비발 인천행 직항 편을 탄 적이 있는데, 당시 승객이 5명이었대. 승무원 수보다 적은 탑승객이라니. 내가 못 타본 게 아쉽긴 하다.


DSC00250.JPG 날 마사이마라로 이끈 큰 이유가 얘네들이야. 야생 사자를 마주할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는데...


2015년 에티오피아 항공을 탄 나는 인천에서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가서 거기서 나이로비행 비행기로 환승하는 여정이었어. 인천에서부터 불안했어. 출발이 2시간 넘게 미뤄졌거든. 그래서 파일럿이 액셀 좀 밟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비행기 안에서는 '설마 다음 비행기를 놓치겠어'라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아디스아바바에 가까워질수록 불안해졌어. 환승 비행기 이륙 시간이 정말 얼마 안 남았거든. 아디스아바바 공항에 착륙하고 비행기 문이 열렸을 때 환승 비행기 이륙 시간이 채 10분도 남지 않았어. 황당해할 새도 없이 일단 냅다 뛰었어. 중간에 공항 직원 한 명이 나이로비행 비행기는 몇 번 게이트라고 알려주는 걸 듣고 정말 미친 듯이 달렸어. 근데 그 게이트가 가까워질수록 정말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고요하더라. 게이트 입구에도 사람이 없었어. 딱히 막는 사람도 없길래 입구를 지나 비행기 출입구로 달려갔지. 그때도 정말 조용했어. 이상했지. 달리면서도 나는 나이로비행 비행기 승무원이 나를 태우겠다고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비행기 출입구에 도착했는데 어랏 닫혀 있네? 내가 할 수 있는 건 문을 두들기는 거밖에 없었지. 그때서야 문이 열렸어. 승무원들이 황당했는지 보딩 패스 보여달란 말도 않고 가만히 쳐다보더라. '허 이 사람들이, 지금 누가 더 황당해야 되는데...' 암튼 적잖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좌석에 앉았어.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땀을 식히는데 머릿속을 스치는 게, '나는 이렇게 죽어라 뛰어서 타긴 탔는데 내 가방은 어찌 됐을까'.


당연하게도 가방은 오지 않았어. 여행하면서 '이런 적은 또 처음이네'라며 쓴웃음을 지으며 짐이 안 왔다는 신고를 하러 갔어. 일처리는 아주 여유로웠고 1시간 가까이 지나고 나서야 출국장을 나올 수 있었어. 만나기로 한 현지 여행사 직원에게 "가방이 안 와서 신고 좀 하느라고 늦었어"라고 했더니 웃으면서 "뭐 하러 신고했어. 나한테 얘기하면 다 찾아줄 텐데"라고 하더라. 뭐지. 그러면서 가방이 안 오는 건 여기서 흔한 일인데 아마 오늘 밤 안에 숙소로 가져다줄 거라더군. 내일 마사이마라로 떠나야 하니 오늘 안에만 오면 다행이겠다 싶었지.


나이로비 숙소에서 바라본 풍경. 나이로비는 사진처럼 딱 저런 빛깔이야.

그날 가방은 오지 않았어. 오랜 비행으로 꾀죄죄한 얼굴과 몸을 물로만 닦아냈어. 작은 백팩에 들어있던 화장품이라곤 선크림과 핸드크림뿐이었는데 핸드크림을 조금씩 얼굴에 펴 바르는 걸로(아무것도 안 바르면 너무 얼굴이 당기니까) 그날의 미용 활동을 마무리했어. 가방이 안 오는 불안감인지 아침이면 마사이마라로 향하는 설렘인지 그냥 시차 때문인지 밤에 잠이 잘 안 오더라.


더욱이 밤새 자동차들의 경적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온 탓에 잠들기는 더욱 힘들었어. 멀뚱멀뚱한 눈으로 왜케 자동차들이 빵빵 거릴까 생각했어. 길은 어두운데 가로등은 별로 없으니 자동차들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여기 있음을 알리기 위해' 경적을 울려대겠구나 싶었어.


다음 날 아침 마사이마라로 날 데려갈 밴 차량이 왔어. 그때까지 가방은 안 왔고 난 가이드에게 '가방이 안 왔다'고 하니 웃으면서 '걱정 마, 마사이마라 숙소로 가져다줄 거야'라고 하더라.

"여기서 엄청 먼데?"

"여기는 그런 일이 흔하고 여행객들 대부분이 마사이마라를 가기 때문에 다른 차량에 가방을 보내면 돼. 너무 걱정 마. 오늘 저녁에는 가방을 받을 수 있어"


그랬지만 그날도 가방은 오지 않았어. 그쯤 되니 초조함을 넘어 정신승리의 단계로 진입하더라. 정 안 오면 출국할 때 받으면 되지 싶더라고. 가방 따위에 신경 쓰고 있기엔 내가 있는 곳이 다름 아닌 마사이마라란 말이지. 다행히 선크림은 하나 있었으니 그걸로 됐다 싶었지. 사자한테 내가 예쁘게 보일 것도 아니고.


그래. 그 어흥 사자. 마사이마라에서는 뚜껑을 여닫을 수 있게 개조한 큰 지프차를 타고 초원 곳곳을 다니며 동물들을 구경해. 얼룩말이나 기린 토피 등은 널렸기 때문에 보통 사자 코끼리 표범 등 귀하신 몸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지. 가이드 운전사들끼리 무전을 주고받으며 어디에 사자가 나타났다 싶으면 그곳으로 달려가는 식이야. 정말 차 바로 앞에서 사자들이 얼룩말과 버펄로를 뜯어먹고 있어. 그들은 차와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어. 에버랜드 사파리에서 차에 달려드는 애들과는 좀 다르지. 이유는 간단해. 마사이마라 사자들에게 차는 먹잇감이 아니거든. 굳이 힘 뺄 필요가 없는 존재들이지. 길들여지지 않았기에 이해되는 상황들.

DSC00285.JPG 버펄로 먹는 사자
DSC00342.JPG 얼룩말 식사 중인 사자 가족


동물들만큼이나 마사이마라를 추억하게 하는 건 넓은 초원이야. 눈으로 볼 수 있는 지역 모두 초원이고 그 위에는 시야를 가리는 것 없는 커다란 하늘이지. 하늘이 정말 크구나, 볼리비아 우유니(1화 참조)에서 느꼈던 원초적인 감동을 마사이마라에서도 다시 경험했어. 초원 그리고 초원을 노니는 동물들을 바라보며 떠오른 한 마디는 '더 늦기 전에'였어. 내가 더 늙기 전에, 더할 것 없는 자연에 더할 필요 없는 것들이 더해져 순수함을 잃어버리기 전에,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행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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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내 여행의 핵심 중 하나가 된 '하늘이 크다'는 거 깨닫기.


이렇듯 혼란스러웠던 시작과는 다르게 케냐 여행의 중간은 가슴 벅찬 시간이었어. 마사이마라뿐만 아니라 나이바샤 호수, 나쿠루 국립공원으로 이어지는 여정 모두 좋았어. 굳이 '중간'은 참 좋았다고 말하는 건 그래 끝이 참 뒤죽박죽이었기 때문이야. 참, 가방은 결국 셋째 날 저녁에 왔어. 마사이마라를 떠나기 전날 밤이었지. 다시 만난 화학용품들이 반갑고 사흘 동안 못 쓴 걸 자체 보상이라도 하듯 샴푸와 바디워시를 마구 써댔어. 스킨과 로션도 표현 그대로 처발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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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에서 만난 동물들. 케냐 여행을 계기로 서울대공원도 옛날보다 좋아하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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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인들은 이 좋은 초원을 동물에게 내어주고 본인들은 매연 가득한 도시에서 지지고 볶고 살아. 고맙다는 생각도 들어.


원래 일정은 나쿠루에서 나이로비로 돌아와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음 날 공항으로 가는 거였는데 뿌연 도시보다는 자연이 훨씬 좋았기에 자연에 좀 더 머무르기로 했어. 나이바샤로 돌아와서 마지막을 보내고 다음 날 또 다른 국립공원을 구경하고 바로 공항으로 가기로 했지. 케냐에서 나의 이동수단은 1명 또는 2명씩의 각기 다른 여행객들이 함께 타는 밴 차량이었어. 저마다 일정이 다르니 중간에 누군가는 내리고 새로운 누군가는 타기도 하고 그래.


케냐에서 국립공원으로 불리는 곳들은 대부분 동물들의 서식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들이야. 마지막 날 가기로 한 보존 지역의 이름은 'hell's gate'였어. 마지막 날 내 운명을 예언이라도 하는 이름이었던 걸까. 지옥문에서 나와서 이제 나이로비로 가면 되는데 차가 늑장을 부리네. 가이드를 재촉하고 싶진 않았지만 조바심이 났던 건 사실이야.


느지막이 출발을 했는데 이번엔 도로 곳곳이 막혀. 곳곳이 공사 중이어서 갔던 길을 되돌아 가기도 하고 그랬어. 많은 길이 편도 1차로 길이었거든. 이번에도 처음에는 '설마 비행기를 못 타진 않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은 흐르는데 차는 갈 곳을 못 찾는 상황이 이어졌어. 가방이 며칠 늦게 오는 것과 귀국행 비행기를 아예 못 타는 건 충격의 정도가 크게 달라. 제때 돌아가야 하는 직장인들에게는 더더욱. 비행기 출발 2시간 전쯤, 진작 공항에 도착했어야 할 시간인데 아직 나이로비에는 가지도 못했어. 도로는 여전히 정체 구간이 많았고 점점 더 초초해졌지. 근데 운전사가 날 보더니 전화 통화를 하곤 갑자기 나이로비 시내로 들어가는 거야. 운전사는 내가 출국 시간이 임박해서 위험한 상황임을 잘 알고 있었어. 나이로비 도심과 공항을 좀 떨어져 있어. 공항이 목적지라면 굳이 나이로비 도심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 도심으로 핸들을 돌리는 차를 보며 난 정말 99%의 확신으로 날 오토바이에 태워서 공항에 보내주려는가 싶었어. 이 곳 막힌 도로에서 오토바이는 꽤 유용한 수단이었거든. 살짝 고맙기도 하고 현지인들의 결정이니 최소한 비행기는 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근데 웬걸 도심에 들어간 차는 상점 앞에 섰고 운전사는 물과 부식거리를 잔뜩 실었어. 그때는 정말 황당해서 할 말이 없더라.

361.JPG 딱 한 번 만난 치타. 당시만 해도 치타에 대해 잘 몰랐는데 몇 달 전에 '라이프 오브 사만다'란 다큐를 보고 많이 알게 됐어. 그곳의 배경도 마시아마라야.


그 순간부터는 내가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음을 인정하기 시작했어. 공항에서 노숙을 하면서 비행 편을 알아봐야 하나 회사에다간 뭐라고 얘기해야 하나 그런 것들이 하나둘 떠오르더라. 그래도 차는 공항으로 향했고 반포기 상태로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이륙 예정 시간 20분 전이었어. 빠를 리 없는 출국 심사와 사정을 봐줄 리 없는 현지인들의 대응이 상상됐지만 어쨌든 큰 가방을 메고 뛰기 시작했어. 공항 안으로 들어가 비행 일정이 적힌 게시판을 올려다봤는데 내 비행기 옆에 출발이 한 시간 늦어졌다는 표시가 있더라고. 절로 안도의 한숨. 짐을 부치고 늦지 않게 게이트 앞으로 갈 수 있었어. 헌데 비행기는 계속 출발이 늦어졌어. 1시간씩 두 번 더 연착이 되더니 원래 이륙시간보다 3시간이 늦어지니까 어디선가 물이랑 음료수를 나눠주더라. 그렇게 3시간여 만에 비행기를 타서 보딩 패스에 적힌 좌석으로 갔는데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거야. 여기 내 자리라며 보딩 패스를 보여줬는데 그 사람도 '여기 내 자리'라며 보딩 패스를 보여주더라. 그와 나의 좌석 번호는 똑같았어. 어떤 일인고 하면 아디스아바바로 향하는 비행기 3대에 탈 승객들을 한 대로 모은 거였어. 난 승무원에게 "그럼 나 어디에 앉아?"라고 물었지. 승무원 왈 "빈자리에 가서 앉아". 헐 빈자리 없으면 입석으로 가야 하나. 그래도 비행기인데...


다행히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가방도 나와 같은 비행기에 탄 채 무사히 왔어. 중간은 창대했으나 처음과 끝은 진땀 뺐던 일주일. 여행은 '황홀한 순간과 개고생의 조합임을 절감했던 시간. 초조했던 나와 달리 여유만만이었던 현지인들을 통해 낭만 따위 빼버린 '현실 하쿠나 마타타'가 뭔지 배웠던 견학. 사자를 보러 가서 사자를 봤기에 그걸로 됐다며 많은 걸 용서하고 싶었던, 실은 용서하지 않으면 딱히 방도가 없었던 여행. 광활한 자연 속에서 수차례 '더 늦기 전에'를 되뇌었고 돌아와서는 그리고 지금까지도 '더 늦기 전에' 꼭 또 가고 싶다고 상상하는 그곳. 케냐 마사이마라였어.


아참참, 한 가지 팁이라면 팁인데 에티오피아 항공은 목적지가 에티오피아가 아니면 이용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무용담은 무용담이고 시간이 지나면 지금처럼 추억 삼아 얘기할 수 있지만 힘든 건 힘들어.


DSC00299.JPG 네 남편 어딨니. 아쉽게도 사자는 많이 봤는데 갈기 날리는 수사자는 못 봤어.
DSC00161.JPG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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