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카파도키아 풍선을 타고 내려다본 모습. 이때만 해도 좋았지.
터키에 간 한국이라면 많이들 공감할 텐데 터키 사람들이 엄청 친한 척을 잘해. 특히 한국인들에게. 그들 눈에는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중국인이나 비슷할 텐데 한국인이란 걸 아는 순간 '오 브라더' '오 마이 프렌드'가 쏟아지곤 하지. 저 말을 남발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주로 상인들이야. 친밀감을 형성해야 물건 파는데 유리할 테니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아. 한국과 터키가 서로 형제의 나라로 부른다는 걸 잘 알고 있고, 한국인이라서 좀 더 환대해준다는데 굳이 마다할 건 아니니까. 큰 기대는 아니지만 즐겁게 일주일을 보낼 수 있을 거라 예상하고 2010년 터키로 떠났어. 카파도키아에서 사흘을 먼저 보내고 이스탄불에서 남은 사흘을 보내는 여정. 예상은 크게 어긋나지 않았어. 터키인들의 친한 척도 내가 느낀 만족감도 적당했어. 이스탄불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기 전까지는.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종종 외로움을 느끼고 그보다 더 자주 느끼는 건 심심함이야. 특히 계획했던 볼거리 다 보고 또 홀로 뭔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감성에 촉촉이 젖는 시간을 어느 정도 갖고 나면 뭐랄까 좀 놀고 싶을 때가 있어. 혼자라면 신나게 놀기엔 한계가 있으니까.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이 되면 유난히 그래. 여행 내내 줄곧 혼자 있었으니 아쉬움이 남는달까.
이스탄불에서의 마지막 날 저녁이었어. 딱히 목적 없이 도심 근처를 방황하고 있는데 또래(로는 안 보였지만 암튼 나이가 비슷하대) 남자 둘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니 A와 B로 할게. 한국인이란 걸 알더니 A가 불쑥 자기 여자친구가 한국인이라고 하더라고. 터키로 온 유학생이라고. 그렇게 여자친구 얘기를 하다가 A가 '우리 벨리댄스 공연 보러 가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라고 하는 거야. 심심했던 나는 그러자고 했고 셋이서 같이 택시를 탔어. 약간의 불안감은 있었지만 택시는 나도 어제 갔었던 번화가에 내렸고 벨리댄스 공연장은 여행 가이드북에도 나오는 유명한 곳이었어.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8시쯤이었는데 공연은 9시 30분쯤 시작한다고 쓰여있더라고. '시간이 뜨네. 뭐하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A가 "우리 그럼 이 근처에서 맥주 한 잔 하면서 기다리자"고 하는 거야. 난 흔쾌히 '그러자' 했지. 여전히 속마음은 '심심한데 잘됐다'였거든.
근데 또 자기들이 아는 곳이 있다며 택시를 타고 가자네. 택시비까지 자기들이 내면서. 우리는 맥주를 먹고 또 양주(인지 보드카인지 암튼 맥주가 아닌 술)도 한 병 시켰어. 양주 가격이 한국돈으로 4만 원 정도였던 거 같아. 맥주도 양주도 어쨌든 나도 마셨으니 n분의 1로 나눠내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 가던 중 A가 옆 테이블로 가더니 여성 3명을 데려왔어. 불가리아에서 왔다고 하는데 나이는 나보다 어리다고 했어. 지금 떠올려도 그 나이라는 게 믿기지는 않지만. 암튼 흡사 나이트 부킹 같았어. 커플 세 쌍이 만들어진 모양이 됐는데 내 옆에 앉은 여자가 칵테일을 하나 사달라고 하네. 다른 여자들도 각각 옆에 앉은 A와 B에게 칵테일을 사달라고 했지. 알겠다고 하고 메뉴판을 보는데 내 옆에 앉은 여자가 '데킬라 선라이즈'를 먹고 싶대. 아마 세상에서 제일 흔할 것 같은 칵테일인데 어랏 메뉴판에 없어. 그래서 그 여자는 바텐더에게 데킬라 선라이즈를 만들어줄 수 없냐고 물었고 바텐더는 당연히 만들어주겠다고 하더라.
그렇게 그 여자는 데킬라 선라이즈를 네 잔 정도 먹었어. 맥주 한 병 값이 4000,5000원 정도였으니 칵테일이 비싸 봐야 1만 원 정도일 거라 생각했지. 메뉴판에 적혀 있는 다른 칵테일들 가격도 8유로 정도였거든. 그래도 네 잔이나 먹는 걸 보면서 가격이 좀 궁금하더라고. '공짜라 그런가. 꿀꺽꿀꺽 잘도 먹네'라고 생각하며 종업원에게 데킬라 선라이즈가 한 잔에 얼마인지 물었어.
"이거 한 잔에 얼마야?"
"150유로"
"뭐........?"
아니 어떻게 이거 한 잔에 150유로?라고 황당해하고 있는데 내 반응을 살피더니 잽싸게 계산서를 갖고 오더라. 내가 '양주가 50유로도 안 되는데 칵테일 한 잔이 그것도 어떻게 이것만 150유로냐'고 따졌는데 A가 나서서 '원래 저건 비싸' 그러더라. 일단 나는 현금이 없다고 했어. 600유로 넘는 현금이 실제 없기도 했고. 그랬더니 친절하게도 건너편에 ATM가 있다며 뽑으면 된다는 거야. 그때 이미 여자 3명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 황당하고 뭔가 창피하기도 하고 아무튼 일단 돈을 뽑으러 나왔는데 친절한 터키인들은 종업원과 A와 B 모두 따라 나왔어. 일단 돈을 뽑으려고 하긴 했는데 뽑히지를 않네. 그러니까 또 친절하게도 저기 ATM이 하나 더 있다며 안내를 하네. 원망스럽게도 이번엔 뽑혀. 사실 그때 잠시 고민했어. 여기서 얘들을 밀치고 냅다 도망갈까. 근데 여기는 내가 전혀 모르는 동네고 도망가다 잡히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드니까 차마 못하겠는 거야.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너무 창피했어. 결국 700유로 가까운 돈을 주고 한숨 쉬며 가게를 나오는데 A와 B가 오더니 "너 이제 돈 없지 않냐"면서 택시를 잡아 세우더니 택시비를 줬어. 정말 어이가 없고 화가 났지만 그 돈을 받았어. 실제 내 지갑엔 돈이 2유로도 없었거든. 숙소에는 가야 하잖아.
그 일이 있고 2년 후엔가 어떤 경찰한테 들었는데 사람들이 사기를 당할 때 언제 사기인지 인지하는고 하면 바로 '돈을 건넬 때'래. 그전까지는 모르고 있다가 돈을 건넬 때 '아 당했다'는 걸 깨닫는다고 하더라고. 고백하건대 나도 그랬던 것 같아.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혹은 나 아닌 다른 누군가 이런 얘기를 들려준다면, 시작부터 '이거 딱 봐도 사기네'라고 알았을 거야. 근데 정말 창피하게도 내 일이 되니까 모르겠더라. 실제로 난 데킬라 선 라이즈가 150유로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A와 B가 처음부터 사기를 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돌이켜보면 한국 여자 친구가 있다는 말로 친밀감을 형성하고, 밸리댄스 공연장에 1시간 반이나 먼저 도착하고, 번화가에서 떨어진 자기들이 안다는 술집으로 데려가고, 나를 위한답시고 여자들을 헌팅해서 앉히고, 모든 것들이 다 사기였는데 말이야. 대학교수가 보이스피싱 당하는 게 이해가 되기도 해.
터키를 가본 거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앞으로 절대 안 가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지만 그닥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은 별로 안 들어. 스무 살에 처음 해외로 나간 이후 20년 동안 로마에서도 키토에서도 케이프타운에서도 사기는커녕 1달러 1유로도 잃어버린 적 없는 나야. 그게 다 터키에서 한 번에 비싼 수업료를 냈기 때문이라고 정신 승리해야 할까. 그때 가슴에 새긴 또 하나의 진리는 여행객에게 말을 거는 현지인은 일단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 가만 생각해보면 현지인이 여행객에게 물어볼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길을 물어볼 것도 아니고. 아 그러고 보니 터키를 가기 8년 전 이미 런던에서 깨달았어야 마땅한 진리이구나. (6화-영국 런던편 참고)